나무
이번 일을 보고서로 제출한 다음 날, 호텔 방.
이제 한가롭게 쉬는 일만 남았건만, 정작 이연우는 짜증 가득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붙들고 있었다.
- 이연우 조사원 맞습니까? 저는 물류혁신센터 소장인데, 다름이 아니라 공간확장가방을 연구 목적으로 빌릴 수 있는지 여쭤보려고-
“안 해요!”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기 무섭게, 핸드폰이 다시 진동했다.
이연우는 돌아버릴 것 같은 표정으로 다시 전화를 받았다.
“예, 이연우-”
- 아까 연락드렸던 제독 분야 연구팀입니다! 전화 끊지 마시고, 한 번만 더 생각해주십시오! 주사위 결과만 잘 나오면-
“아, 제발. 저 당장 내일부터 업무 나가야 한단 말입니다. 쉬는 시간은 가만히 두십시오, 좀.”
핸드폰 건너편에서 상대는 뭐라 더 말하려 했지만, 이연우는 진저리를 치며 아예 핸드폰을 꺼버렸다.
‘무슨 연락이 이렇게 와.’
쉬는 내내 온갖 연구소와 부서에서 쉴 새 없이 전화가 왔다. 그나마 빗물은 들키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열렬한 요청들.
뜨거운 핸드폰을 휙 던지자, 푹신한 침대에 안착한다.
이연우는 넓은 방을 빙빙 돌며 짜증을 식히다가, 대충 침대에 누웠다. 핸드폰은 마비됐고, TV도 보기 싫고, 컴퓨터도 하기 싫었다.
TV에서는 렙틸리언 사태를 계속 방송하고 있었는데, 무슨 청와대 테러와 엮여 푸른 꽃과 번개 뱀은 렙틸리언의 공격이었다는 소리를 하지 않나.
컴퓨터도 비슷했다. 인터넷은 활활 불타고 있었고, 회사 메신저에서는 실험 협조 요청이 끝도 없이 들어오고 있었다.
‘뭐하지. 낮잠을 자기도 애매한데.’
이연우는 가만히 누워 멀뚱멀뚱 천장을 올려보았다.
‘핸드폰도 컴퓨터도 안 하니까 할 게 없네. 내가 취미가 이렇게 없었나?’
그렇다고 뭔가 하자니 겨울이라 날도 춥고, 손가락 하나 까딱이기도 싫은 기분인데.
‘괜찮은 취미 없을까.’
이연우가 눈을 감고 뭘 해볼까 고민하는 동안 시간이 지났다.
방문자가 찾아왔다. 마크 정이었다.
“아니, 핸드폰은 왜 꺼두셨습니까.”
이연우가 열어준 문으로 들어오며 마크 정은 투덜거렸고, 이연우는 뚱한 표정을 지었다.
“뭔 에코백이랑 주사위 빌려달라고 전화가 계속 오니까요.”
“아. 연구원들이.”
마크 정이 패딩을 벗다가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에코백과 주사위의 정보가 관련 분야의 연구원에게 퍼진 모양이다.
한 사람당 한 번만 전화해도 그걸 합치면….
“일단 임무 중이라고, 연락 차단해두겠습니다.”
“그러면 좋죠. 지금 진짜 핸드폰을 아예 못할 지경이라서.”
이연우의 표정이 밝아졌다. 거의 핸드폰이 울리는 환청이 들릴 지경이었다.
마크 정은 눈동자를 데구륵 굴렸다. 머릿속에서 여러 생각이 스쳤다.
‘그래도 실험에 참여해주면 좋을 텐데. 아니지. 괜히 연구소나 부서만 날려 먹을지도 몰라. 그건 안되지.’
결론을 내렸다.
“실험 참여하실 생각은 없죠? 실험 요청도 전부 차단하겠습니다. 앞으로 계속.”
“예, 예. 그런데 저는 왜 찾아오셨는지.”
이연우가 물었다. 귀찮은 전화만 멈춰도 좋다. 그보다는 마크 정이 찾아온 이유가 중요하다.
이연우가 침대에 걸터앉는 동안, 마크 정은 노트북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냈다. 추위에 얼어붙은 손을 싹싹 비비며 말했다.
“다음 업무가 정해져서 기본 정보 드리려고요.”
“위험한 일입니까?”
이연우는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슬그머니 노트북이 보이는 자리로 움직였다.
딸깍, 딸깍, 마우스 클릭하는 소리가 이어지더니 문서가 열렸다. 녹색의 문양, 나무가 위로 가지를 뻗은 문양 아래로 녹색 협회 소개서라고 쓰여 있다.
“녹색 협회? 처음 듣는데.”
“위험하지는 않습니다. 우호 집단이기도 하고, 크게 사고 치는 친구들은 아니라서요.”
마크 정은 드르륵, 마우스 휠을 굴려 문서를 넘겼다.
“업무를 말씀드리기 전에 우선 뭐 하는 집단인지부터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세 개의 원이 조금 겹친 그림.
이연우는 묵묵히 마크 정의 설명을 기다렸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정보 하나하나가 중요하다.
“녹색 협회는 세 부류의 인간이 마구잡이로 섞인 집단입니다. 환경운동가, 식물 연금술사, 녹색교단.”
마크 정은 문서를 차근차근 넘기면서, 차분하게 설명했다.
환경운동가.
이상개체로 환경파괴를 막고 환경을 보호하겠다며 활동하는 환경운동가.
식물 연금술사.
물과 햇빛과 흙만으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식물이야말로 연금술의 정수라며, 식물 형태의 이상개체를 연구하는 연금술사.
녹색교단.
식물은 신이다, 식물이 없으면 다 죽을 동물들은 식물을 섬기고 식물의 노예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종교인.
‘와. 진짜 하나 같이 엮이기 싫은 인간들인데.’
이연우는 혀를 내둘렀다. 잘못 엮이면 죽거나, 실험동물이 되거나, 비료가 될 느낌.
그러다가 표정이 굳었다. 이런 인간들 상대로 투입되니까.
“안 위험한 거 맞습니까?”
“높은 확률로요. 가서 회사 대표로 말 몇 마디하고, 살짝 조사하시고 돌아오면 됩니다.”
그렇게 간단한 일일까? 이연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정확히 무슨 일입니까? 우호 집단이라면서요? 제가 갈 일이 뭡니까?”
“딴마음을 품었다더군요.”
딸깍, 마크 정이 사람 한 명의 사진을 띄웠다.
머리는 초록색으로 염색했고, 잡초밭에 물을 뿌리며 경건한 표정을 지은 사람.
“녹색교단의 교주인데, 이 사람이 제보했습니다. 연금술사 파벌과 환경운동가 파벌이 못된 계획을 세웠다고요.”
“어떤 계획을 세웠길래.”
마크 정이 골치 아프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아예 몸을 돌리고 이연우를 마주 봤다.
“연금술사 파벌은 전쟁을 비료 삼아 위험레벨 높은 나무를 싹 틔우겠다고 하고, 환경운동가는 더 많은 인간을 죽이려고 한답니다.”
위험한 나무를 키우겠다는 연금술사나, 인구감소야말로 환경보호를 위한 길이라는 환경운동가나, 어느 쪽이든 회사의 뜻과는 반대되는 행동이었다.
오염도를 줄이는 전쟁, 어쨌든 인류를 위한 전쟁인데.
상황을 파악한 이연우가 턱을 매만졌다.
“그럼 제가 할 일은.”
“녹색협회의 사람 몇을 만나 헛짓거리하지 말라고 말하시면 됩니다. 겸사겸사 그 나무란 게 뭔지 조사하시고요.”
마크 정은 가볍게 말했지만, 이연우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조사가 되겠습니까? 작정하고 숨겼을 텐데.”
회사는 물론, 당장 녹색교단의 교주조차 정확한 정보를 모르는 듯한데. 이건 이연우도 찾을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마크 정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까딱였다.
“단서나 흔적 정도만 찾으셔도 됩니다.”
그쯤에서 마크 정이 노트북을 닫았다. 전할 말은 거의 다 전했다. 떠날 시간이다.
부스럭거리며 마크 정이 노트북을 챙기고, 패딩을 껴입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쪽지 한 장을 건네며 말했다.
“회사에서 차량을 제공할 겁니다. 이날 이때까지 주차장으로 내려오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쉬십시오.”
마크 정이 떠났다. 적막한 호텔 방에서, 홀로 남은 이연우는 가만히 쪽지를 내려보았다.
***
마크 정은 떠났지만, 이연우의 생각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침대에 누워 고민에 빠져들었다.
이번 업무와 그만의 계획.
‘이번 일은 실패해야 하는데. 어느 정도로 실패해야 할까.’
회사의 신뢰와 맡기는 업무가 부담스럽다. 그래서 슬슬 기대감을 깎아내기 위해 업무를 실패할 생각인데.
‘그래도 너무 거창하게 망하면 안 되고.’
생각이 깊어졌다. 감은 눈의 어두운 장막 위로 여러 과거가 떠올랐다.
인간자격시험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렙틸리언 보스처럼 큰 사고는 바라지 않는다. 자신까지 위험에 빠진다. 그리고 이연우에게도 애사심이 있었다.
회사에서 스카우트해준 덕에 공시생 생활을 청산하고 어엿한 회사원이 되지 않았나. 아무래도 고의로 회사에 피해를 입히고 싶지는 않다.
이연우가 주머니에 손을 넣어 괜히 쪽지를 꾹꾹 구기며 생각을 이어갔고, 곧 눈을 떴다.
“적당히 하자.”
계획이라고 할 만한 것도 필요 없다.
마크 정이 말한 대로 가서 회사의 의사를 전하고, 나무 조사는 대충 실패하면 될 일이다. 간단하다.
이연우는 지루함을 잊어버리고 편하게 쉬며 임무를 준비했다.
***
일하는 날이 찾아왔다.
이연우는 회사가 준비한 차에 탄 후, 힐긋 운전자를 보았다. 정장에 선글라스를 쓴, 건장한 요원 느낌.
‘이 사람도 본사 소속인가? 아니면 한국지사 사람인가?’
사소한 궁금증을 품고 바라보자, 요원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목표지점으로 모시겠습니다.”
“예. 그, 어디입니까?”
“녹색협회의 한국지부입니다. 책임자 셋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말에 이연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국지부면 마음 놔도 되겠네.’
연금술사 파벌이 숨기고 있을 나무가 이런 곳에 대놓고 있을 리가 없다. 어디 비밀 장소에 숨겨놨겠지.
여러모로 쉬운 일이었다. 업무를 수행하기도, 실패하기도 쉬운 일.
그렇게 차는 한참을 달렸고, 녹색협회의 한국지부에 도착했다.
아스팔트 없이 흙뿐인 주차장.
“저는 주차장에서 대기하겠습니다. 다녀오십시오.”
“예.”
이연우는 차에서 내려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넓은 평야다. 사방에 논이며 밭이 펼쳐져 있고, 아무렇게나 흩어진 비닐하우스 안에서는 농부들이 바쁘게 움직이며 특이한 작물을 기르고 있었다.
목가적이고 평온한 분위기.
이연우를 마중 나온 사람들 역시 부드러운 분위기였다.
“어서 오세요. 녹색협회 한국지부입니다. 저는 녹색교단의 김포도입니다.”
파마한 머리는 녹색으로 염색되어 있고, 몸빼바지를 입은 사람이 손을 내밀었다. 방금까지 일을 했는지 흙이 묻은 손.
“인류보호회사 특수조사원 이연우입니다. 다른 분은…?”
이연우는 손을 마주 잡으며 다른 두 사람을 보았다.
흙먼지가 잔뜩 묻은, 연구원 느낌의 사람이 웃었다.
“식물 연금술사, 제임스 박입니다. 저기 고양이가 맺혀 있는 나무 보이시죠? 제가 개량한 고양이 나무입니다.”
“어…. 예.”
제임스 박의 손가락을 따라 눈을 돌린 이연우는 진짜로 고양이가 열려 있는 나무를 보았다. 뭔가 기괴하다.
마지막으로 대학생 인상의 여자가 눈을 피하며,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환경운동가 이채린이에요.”
“예. 세 분 모두 녹색협회를 대표로-”
“아닙니다. 세 파벌을 각각 대표하는 사람들입니다.”
이연우는 입을 헤 벌리려다가, 사람 앞임을 의식하며 애써 입을 다물었다.
‘이게 정상적인 집단인가? 뭔가, 뭔가 많이 이상한데.’
첫 만남부터 정신이 아찔해지는 기분.
그때 김포도가 박수를 짝짝짝 쳤다.
“환영합니다! 안 그래도 우리 모두 회사와 대화하기만을 바라고 있었거든요. 자, 안으로 들어가시죠.”
이연우는 정신을 붙잡으며, 그들을 따라 초가집으로 걸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