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류보호회사 (127)화 (127/194)

입원

이연우와 마크 정은 한참 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계약을 맺을까, 말까? 맺으면 조항을 어떻게 수정할까? 안 맺는다면 정보 제공을 막기 위해 어떻게 행동할까? 협상과 별개로 뭔가 뜯어먹을 수는 있지 않을까?

이연우는 지친 얼굴로 머리를 꾹꾹 눌렀다. 복잡하고 난해한 조항들과 클럽의 계약 사례를 읽다 보니, 두뇌가 과열됐다.

그런데도 결론이 나오지 않는다.

“솔직히 어느 쪽이든 마음에 드는 부분도 있고, 마음에 안 드는 부분도 있습니다.”

계약을 맺으면, 주사위가 제한된다는 점이 제일 마음에 안 든다.

그렇다고 계약을 거부하고 클럽에 머리를 들이박아 보자니….

“황금만능주의? 그게 진짜입니까?”

“예. 클럽의 핵심개체입니다.”

“세상에, 뭔 그딴 이상異常이.”

적절한 양의 황금만 바치면 뭐든 이뤄준다? 대실패 같은 위험도 없고, 진짜 만능 아닌가. 심지어 클럽은 황금을 잔뜩 비축하고, 지금도 사들이고 있다는데.

황금만능주의와 그것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구축된 시스템.

이연우가 두려움에 몸을 부르르 떨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무리 그래도 황금만능주의 때문에 지레 겁먹고 불리한 계약을 체결하는 것도 좀 그렇다.

‘안 되겠다. 이대로는 괜찮은 결론을 내리지 못하겠어.’

잡생각도 많고, 처음으로 생각해보는 이상계약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찬물을 뒤집어쓰듯, 정신을 차릴 필요가 있다.

이연우가 병상 한쪽에 던져둔 권총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는 권총을 곧장 마크 정에게 쥐여줬다.

“그 총으로 저 좀 겨눠보세요.”

“예? 아.”

어리둥절하게 권총과 이연우를 번갈아보던 마크 정이 깨달았다.

위험을 연출해 정신을 차릴 생각이라고.

마크 정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권총을 놓았다. 거절은 아니었다. 그 대신 정장의 안주머니로 손이 들어갔다.

“이왕 할 거면 제대로 하죠.”

“이 권총이면 충분-”

그리고, 이연우의 동공이 확장됐다.

마크 정이 꺼낸 손에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연우가 지녔던 권총이 들려 있었다.

평범한 총탄을 장전한 권총이.

마크 정이 진지하게 이연우를 노려보았다. 두 손으로 권총을 붙잡아 모범적인 사격 자세를 취하면서.

“이연우 씨가 마음을 바꿔 다시 달라고 할까 봐, 제가 지니고 있었습니다. 하하. 제가 지금 방아쇠를 당기면.”

죽는다. 진짜 죽는다.

빗물? 총상을 재생하지 못한다. 부활? 평범한 총탄으로 인한 상처는 그대로다.

이연우의 눈동자에 핏발이 섰다. 솜털이 일어서고, 등줄기를 타고 한기가 기어올랐다. 쿵쿵거리는 심장박동이 두뇌를 두드린다.

‘생각해, 생각해, 생각해.’

빠르게 휘도는 핏물이 머리에 산소를 공급했다. 두뇌에서 사고가 반짝였다.

‘주사위로 저 인간을 기절시키거나, 심장마비를 일으키거나, 권총을 망가뜨리거나. 아니. 이게 아니라.’

생존으로 확 기울어지던 생각을 가까스로 바로잡고, 골드버그 클럽과 계약과 정보 문제를 생각한다.

“….”

“….”

침묵이 내려앉은 병실.

마크 정은 마른침을 삼켰다. 이연우가 핏발 선 눈으로 지그시 노려보는데, 무섭다.

‘갑자기 나 공격하는 거 아니야? 불안한데.’

마크 정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권총의 끝도 흔들렸다. 이대로 내리고 싶었다. 그래도 딱히 뭐라 말은 하지 않았는데, 그만두기도 그렇다.

그렇게 마크 정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불안감에 벌벌 떤 지 얼마나 지났을까.

이연우가 문득 말했다.

“정보를 보호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죠. 그러면 말입니다. 정보가 유출됐다는 건 알아챌 수 있습니까?”

“그건 가능합니다. 즉각적으로 알아차리기는 힘들어도, 알 수는 있습니다. 자원을 더 투자하면 알아내는 데 걸리는 시간도 줄어들고요.”

“좋습니다. 강제 계약은 안 맺습니다.”

이상개체를 이용해 강제력을 부여하는 계약에 너무 얽매였다. 강제력이 없어도 괜찮은데.

이연우는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고.

마크 정은 한숨 돌리며 권총을 다시 품에 넣은 후, 이연우를 보았다.

“그러면 어떻게 하실 생각인지?”

“그 클럽장이라는 어르신이 말했죠. 이익으로 얽힌 공존.”

이연우는 손가락을 마구 그어가며 복잡한 실타래를 그렸다.

“클럽 입장에서 생각해봤습니다. 돈이 우선인 클럽이니, 저는 놈들하고 손해와 이익으로 엮일 겁니다.”

“어떻게…?”

마크 정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연우가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는 어설프게 휘두르는 시늉을 했다.

“내 정보를 팔면 끔찍한 손해를 본다.”

다른 것도 아니고 주사위다. 상황이 잘 풀리면, 운이 충분히 좋다면, 감각이 극한까지 곤두선다면, 황금만능주의와도 몇 수 주고받을 수 있다.

이는 클럽도 무시하지 못할 위협이었다. 노인이 괜히 협상을 위해 찾아온 게 아니다.

‘상황이 극한까지 치달아봐야 손해만 보니까.’

마크 정은 부정적으로 보았다.

“글쎄요. 위협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대놓고 협박하면 클럽이 어떻게 반응할지. 제거하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익으로도 얽히면 됩니다.”

주사위는 이연우만 대상으로 굴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연우가 데구르르, 주사위 굴러가는 소리를 입으로 내었다.

“주사위 이용권을 팔 생각입니다. 저한테 대가를 바치면 주사위를 굴려주는 거죠.”

주사위를 굴릴 기회를 판다. 이건 거부하지 못할 상품이었고.

또한 이연우를 위협하는 요소를 하나 줄이는 것이기도 했다.

“이건 단순히 클럽한테만 파는 게 아닙니다. 이용을 원한다면 누구든지 팔 생각입니다.”

평범한 총탄 앞에서 치열하게 생각한 결과.

‘주사위만 아니면 내가 노려질 이유가 거의 없는데?’

이연우는 간과했던 점을 떠올렸고, 이런 제안을 만들었다.

‘주사위를 이용할 기회를 팔면, 주사위를 노리겠다고 나를 공격할 사람은 줄어들겠지.’

녹색협회만 해도 그렇다.

만약 주사위 이용권을 파는 중이었다면, 굳이 습격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이용권을 사고, 정체 모를 씨앗 하나를 싹 틔워달라고 부탁했을지도 모를 일.

마크 정은 피곤한 상황에서도 명민하게 맥락을 파악했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계약보다는 괜찮네요.”

이연우를 적으로 돌려서 얻는 것. 최소 재산 손실에서 최대 대공황. 어쩌면, 결과를 알 수 없는 주사위와 황금만능주의의 전투.

이연우를 파트너로 삼았을 때 얻는 것. 그 주사위를 이용할 기회.

손을 잡으면 둘 다 이익을 얻는 관계다.

“손익이 확실합니다. 이러면 클럽도 정보를 팔 생각은 안 하겠죠. 주사위를 노리는 인간도 거래를 우선 생각할 것이고요. 그런데.”

마크 정이 서류를 하나 꺼냈다.

“그 정보상은 어떻게 할 겁니까? 이런 건 전부 클럽과의 협상 아닙니까?”

“아, 그거요. 그, 뭐야. 상품 홍보를 위한 대상으로 삼을 겁니다. 주사위로 이런 게 가능하다고. 보상은 보상대로 받고요.”

정보상의 대리인이라는 노인도 정보상에 대해서는 별말 안 하고 돌아갔다. 어떻게 처리하든 간섭 안 하겠다는 뜻 아닐까?

‘내 정보를 판 대가는 치러야지.’

이연우가 눈을 반짝이며 서류를 받았다.

서류는 두 종류였는데, 하나는 정보상의 자산과 사업 현황이었고, 다른 하나는 회사가 분석한 주사위 연구기록이었다.

이연우는 주사위 연구기록부터 보았다.

***

아니, 제발, 연구과제를 줄 때는 말이나 되는 걸로 주십시오!

주사위를 분석하라고요? 보고서 몇 개랑 촬영기록만 가지고요? 실험실에서 주사위를 굴려보지도 못하는데? 전문관측장치도 쓰지 못하고, 실험도 못 하는데?

이런 걸로 무슨 결과를 냅니까! 결과라고 해도, 신뢰성 0의 가설, 가설도 못 되는 쓰레기지!

좋습니다. 제 소견을 말해드리겠습니다.

주사위는, 현실조작일 수도 있고, 행운과 불운을 다루는 것일 수도 있고, 가능성과 확률을 다루는 걸 수도 있고, 운명을 뒤트는 것일 수도 있고, 아무튼 뭐든 가능합니다!

지금으로선 데이터가 없는데 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나마 비슷한 사례를 찾아보자면, 축복받은 아이나 예술가협회의 협회장과 조금, 정말 조금 비슷하긴 합니다.

기괴할 정도로 운이 좋은 축복 받은 아이, 세계에게 사랑받는 협회장.

총으로 쏘려고 하면 총이 스스로 망가지고, 암습하려는 자는 갑자기 심장이 멎고, 가둬두면 문이 저절로 열리고, 목이 마르면 비가 오고, 배가 고프면 열매가 열리는 그 이상개체들 말입니다.

주사위는 비슷한 결과를 대실패, 실패, 꽝, 성공, 대성공으로 구분하고 확률적으로 구현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냥 가설조차 안 되는 이야기로 여기세요.

확실한 결과를 원하면, 주사위랑 그 사용자를 이곳으로 데려오시라고요.

***

연구기록의 탈을 쓴 소견서를 보며 이연우는 눈을 깜빡였다.

‘내가 판정을 정하면 랜덤하게 가능성이나 확률을 구현하는 것 같은데.’

어쨌든 회사도 감을 못 잡는 걸 보니 좋다.

딜레이나 그런 단편적인 정보는 유출되었어도, 근본적으로 주사위를 카운터 칠 준비는 하지 못한다는 소리니까.

그보다는 정보상의 정보다. 사락, 이연우가 종이를 넘겼고, 의외로 젊은 사람의 사진이 보였다.

“이 사람이 정보상입니까? 내 정보를 판?”

“예. 회사가 정보를 잘 빼앗기기는 하는데, 정보를 빼내는 건 더 잘합니다.”

마크 정이 어딘가 불안한 표정으로 이연우의 눈치를 살폈다. 당장 클럽에서 대공황을 예견했다고 하지 않나.

“이연우 님. 여파가 커질 판정은 자제하셔야 합니다.”

“저도 압니다. 방금 아이디어를 얻은 게 있는데, 그걸 굴리려고요.”

이연우는 다른 서류는 힐긋 보고 넘겼다.

주식과 화폐에 집중된 정보상의 자산. 아마 이걸 건드렸다가 대실패나 대성공이 나온 듯하다.

그보다는 연구기록에서 본 사례를 비틀어보려고 했다.

“행운의 반대말이 불운이죠? 불운을 부여해보려고요.”

“실패하면 운이 좋아지는 거 아닙니까?”

“그럼 홍보되는 거죠. 주사위가 이걸 할 수 있다. 그리고, 정보상한테는 행운의 대가를 받고요.”

보상을 뱉을 때까지 계속 주사위로 괴롭히면 된다.

이연우는 가볍게 주사위를 불렀다.

“주사위. 이 사람한테 불운 부여.”

주사위는 가만히 있었다. 대상을 찾지 못한 듯, 제자리에 멈췄다.

처음 보는 반응에 이연우가 당황했다.

‘어. 눈앞에 안 보이면 못하나? 아니면 나랑 직접 관련되지 않아서? 아니면 주사위가 할 수 있는 판정이 아니라서?’

아니다. 이연우는 직관적으로 알아차렸다.

‘가능성. 확률.’

멀어서 그렇다. 조작할 가능성과 확률이 이곳에 없어서.

순간 이연우의 눈이 가라앉았다. 예전에 무슨 조각가를 괴롭히겠다는 허세가 떠올라서가 아니다. 주사위의 약점을 깨닫고, 그 한계를 뚫기 위해서다.

‘주사위의 한계는 내 생각의 한계야. 그렇다면 지금 구현할 가능성은.’

도미노를 무너뜨리듯, 이곳에서 구현한 가능성이 현실의 무수한 가능성을 거쳐서 적에게 닿아야 한다.

이연우는 판정을 골랐다. 단순한 주사위 놀음에서 벗어나, 조금 더 주사위의 본질에 가까운 판정을.

‘내 적이 불운을 겪을 가능성.’

주사위가 구른다.

데구르르-

성공!

이연우를 중심으로 확률과 가능성이 변동한다. 이연우에게서 시작된 결과가 뻗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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