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류보호회사 (128)화 (128/194)

입원

자정을 넘은 밤이다.

골드버그 클럽 한국지부의 임시거처인 펜트하우스는 전부 압류되었기에, 노인과 정보상은 새로 구한 호텔 방에서 만났다.

노인이 지팡이를 딱딱 짚으며 들어오자, 정보상은 느긋하게 고개를 들었다.

“영감님. 협상은 어떻게 됐습니까?”

“이제 제안 넣었어. 뭘 바라나? 그럴듯한 내용이 나오려면 아직 한참 멀었어.”

노인은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외투를 벗었으며, 정보상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툭툭 두드렸다.

정보상은 그와 원한을 맺은 사람을 생각했다.

“그 이연우? 어떻습니까? 돈을 얼마나 내야 무마할 수 있을까요?”

“자네는 얼마 정도 생각하는데?”

외투를 옷걸이에 걸쳐놓은 노인이 정보상의 앞에 앉았다.

정보상은 어설프게 웃었다. 눈치 보듯 툭 던지는 목소리.

“녹색협회한테 받은 돈 정도?”

“도둑놈의 심보로군. 더 써. 자네, 돈도 많지 않나?”

“다 주식이랑 달러에요.”

정보상이 어깨를 으쓱였다.

“나스닥은 무적이고, 달러는 신이잖아요. 지금 빼기는 아까운데….”

그는 돈을 버는 족족 달러로 바꾸고, 나스닥 지수를 추종하는 ETF를 사들였다. 대충 미국 주식 시장이 상승세면 똑같이 값이 오르는 ETF에.

노인은 눈살을 찌푸리고는, 잔소리를 뱉기 시작했다.

“죽고 싶은가? 그 돈도 다 못 쓰고 묻히고 싶어? 자네가 적절한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저쪽에서 강제로 대가를 뜯어갈 텐데?”

“에이. 영감님. 조사원입니다. 워낙 해결한 사건이 많아 돈은 조금 번 모양인데, 진짜 큰돈은 못 만진 사람이에요.”

정보상이 얻은 정보에는 이상기후를 해결했다는 업적과 보상이 없었다.

이연우가 감춰달라고 요청한 그건 회사가 심혈을 기울여 보호했으니까.

그렇기에 정보상은 녹색협회에 받은 돈만 돌려줘도 조사원인 이연우가 만족할 거라고 판단했다.

“가치는 상대적이잖아요. 충분히 만족하지 않을까요?”

정보상이 어깨를 으쓱였다.

노인은 버럭 고함을 내지르려고 숨을 들이마시다가, 무언가 떠올리고는 힘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정보상이란 놈이 정보를 볼 줄을 몰라.’

가치는 상대적이다. 생존주의자의 목숨을 위협한 대가가 과연 돈으로 해결될까?

그리고.

‘예지가 뭘 의미하는지도 모르고.’

예지는 미래를 보는 것이 아니었다. 미래를 바꾸는 것이다. 무수한 갈래로 나뉘는 미래의 가능성을 제한하는 것이다.

조언을 들을 자세도 안 된 애송이 때문에 힘을 낭비하기도 싫다. 저러다 죽으면 자연사다.

노인은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자네 마음대로 하게.”

어차피 그의 주 업무는 클럽의 대리인으로서 주사위를 지닌 자와 계약하는 것이니.

정보상은 히죽 웃으며, 몸을 앞으로 당겼다. 테이블에 팔꿈치를 얹고, 손깍지를 낀다.

“그러면 일단 녹색협회한테 받은 돈을 제안해주십시오. 이게 지금은 황금으로 있는데, 적당히 지폐 같은 이상개체로 바꾸길 원하면 가격 조금만 후려치고-”

노인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고, 정보상은 재잘재잘 말하다가 목이 말랐는지 말을 멈췄다.

그가 물병을 잡았다.

“잠깐 물 좀.”

그리고, 이연우가 고르고 주사위가 구현한 가능성이 닿았다.

불운.

벌컥벌컥 들이켜던 물이 목에 걸렸다. 정보상은 푸학 물을 뱉으며 몸을 숙였다. 거친 기침 소리가 나왔다.

“케엑, 켁!”

“물 마시다가 사레가 들린다고? 성격이 왜 이리 급한가?”

노인이 흘겨보았다. 요즘 젊은 사람은 다 이런가 싶다. 하지만 노인의 표정은 금방 굳어졌다.

정보상이 손을 휘적였는데, 불운하게도 팔꿈치가 테이블 모서리를 쿵 찍었다. 그 짜릿한 충격.

“끅!”

정보상이 펄떡펄떡 뛰어올랐다. 그리고 뭘 잘못했는지 바닥을 잘못 디뎠다.

뿌득, 발목이 겹질렸다. 몸이 뒤로 넘어갔다. 의자는 그대로 넘어졌고, 정보상은 휙 뒤로 자빠지다가, 발가락으로 테이블의 각진 모서리를 후려쳤다.

뻐억-!

발톱과 발가락 살 사이로 테이블 외곽이 파고들었다. 그 끔찍한 고통.

“끄아아악!”

머리가 고통으로 물든다. 정보상은 떼굴떼굴 굴러다니며 비명을 내질렀다. 그 위로 물병이 떨어져, 축축하게 젖었다.

노인은 추한 모습의 정보상을 가라앉은 눈으로 내려보았다. 있을 수 없는 불운의 연속.

‘이건. 주사위인가? 판정 하나하나를 따로 굴린 것 같지는 않고. 불행? 거리가 상당할 텐데, 거리 제한은 없나?’

정보상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한편 정보상은 한참 동안 고통에 시달리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어리둥절한 마음 반, 짜증 나는 마음 반이 섞인 눈.

“갑자기 이게 무슨. 영감님, 저 공격 당한 겁니까?”

“아마. 그보다, 자네 주식 확인해봐.”

순간, 정보상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피가 쭉 빠진 사람처럼 창백한 낯빛.

“아니. 설마. 아니. 아니죠?”

손을 벌벌 떨어가며 핸드폰을 꺼낸다. 그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터치도 제대로 안 되고, 로그인에 거듭 실패해 계정이 잠기고, 핸드폰을 떨어뜨렸는데 화면에 금이 가고, 뭐에 베였는지 손가락 위로 핏방울이 맺히고.

그럼에도 정보상은 이를 뿌득뿌득 갈아가며 핸드폰을 두드렸고, 마침내 보았다.

“어. 어.”

그가 지금껏 꾸준하게 사들인 주식이 가파른 곡선을 그리며 급락하는 광경을.

정보상은 멍하니 추락하는 그래프를 보았다. 냉정하게 현실을 부정했다.

“이 정도는 떨어져도 괜찮습니다. 안 그래도 계속 상승세라 조정이 올 법했죠. 그래도 평균 단가 생각하면 아직 이익이에요. 오히려 추가 매수 타이밍입니다. 어쨌든 결국 오를 거 아닙니까. 클럽도 가만히 안 있을 거고요.”

횡설수설하는 정보상을 보고,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꽝, 지팡이를 내리쳤다.

“그래, 경제위기는 클럽에서 막을 거야. 회사도 도울 예정이고.”

고정된 미래인 대공황이 왔다고? 황금만능주의에 황금을 먹여서 막으면 된다. 다른 수단, 다른 힘도 많다.

경제 위기가 오면 금값이 오르는 편이라, 클럽도 손익을 계산해서 위기를 막을 것이다.

회사도 비슷했다.

단순한 경제 위기면 이게 우리가 알 바인가, 본 척도 안 하겠지만.

‘이건 주사위의 결과와 황금만능주의가 고정한 미래가 합쳐진 사고야.’

말하자면 위험한 이상개체 둘이 일으킨, 이상개체로 인한 경제적 재앙이다. 이런 일은 회사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문제는 정보상이다.

노인이 지팡이로 정보상을 가리켰다. 이런 것도 까마득한 후배다.

“그런데, 자네 목숨은? 이만한 사고를 일으킬 수 있는 상대가 자네를 원수로 보고 있어.”

“어….”

“클럽은 자네를 굳이 지켜줄 생각 없어.”

이딴 애송이 하나보다는, 황금만능주의와 대적할 수 있고, 또 시너지를 일으킬 수 있는 이상개체가 더 중요하니까.

이번 계약을 시작으로 때로는 이익을 퍼주고, 때로는 손해를 막아주고, 차근차근 서로 엮이다 보면 결국 친구가 되는 것 아니겠나.

‘이게 클럽이지.’

무식하게 적대하고 죽이기보다는 세련된 방법 아닌가.

그걸 모르는 어리석은 후배들이 많지만 말이다.

그쯤에서 정보상이 상황을 깨달았다. 그는 입술을 파르르 떨다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주식과 달러, 전부 처분하겠습니다. 뭘 얼마나 보상해야 할까요?”

“이제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었군. 듣게.”

노인이 지팡이 위로 두 손을 포갰다.

“돈보다는 업무와 생존에 도움 되는 장비. 그리고 별개로 10억 원. 다시는 주사위나 그 인간과 관계된 정보를 팔지 않겠다는 강제계약서.”

처음부터 뛰어난 사람은 없다. 노인은 정보상이 이번 일로 교훈을 배웠기를 바라며, 낮은 목소리로 조언했다.

***

그때, 병실 안에서 이연우와 마크 정은 노트북 화면을 같이 보며 팔다리를 달달 떨었다.

주사위가 어떤 가능성을 구현했을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펼친 주식 화면. 급격하게 추락하는 나스닥 주식.

“이거, 대공황 전조 아닙니까? 아니, 왜?”

“뭐, 뭘 굴린 겁니까? 불운이라고요? 경제 위기 굴린 거 아닙니까?”

“진짜 불운만 굴렸고, 고작 성공입니다. 이만한 사고 못 일으킨다고요.”

이연우가 억울하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냥 성공인데 왜 이만한 사고가 일어나냐고. 이건 불행한 정도가 아니잖아.’

하지만 주사위를 굴리고 벌어진 일이다.

마크 정이 손을 마구 휘저어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이연우 님. 이건 진짜 아닙니다. 물론 본의는 아니시겠지만, 대공황이라뇨. 주사위 결과 때문에 고통받을 사람이, 아.”

셀 수도 없다. 이상개체 때문에 고통 받을 사람이 말이다.

나름 사명 의식이 투철한 마크 정은 머리를 부여잡고 끙끙 앓았다.

이연우도 할 말이 없었다. 역사책에서나 보던 대공황을 자신이 일으켰다고? 거기에.

‘지금 내가 일으킨 사고가 몇 개지? 렙틸리언 보스 폭주, 평범한 총탄 분실. 이것까지 하면.’

지금까지는 상황도 잘 맞아떨어지고 회사에 이득도 되어서 어떻게 잘 넘어갔지만, 세 번째 사고도 사고로 넘어갈까?

이연우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떨렸다.

‘본사도 나 의심하는 거 아니야? 일부러 사고 터트린다고?’

비틀어서 생각해보면, 렙틸리언 전염병을 퍼트리고, 평범한 총탄을 적대집단에 넘기고, 경제 위기를 부른 거다.

‘…이거 내가 생각해도 멸망주의자 같은데? 회사원이 아니라?’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이연우는 기겁하며 일어나 마크 정의 어깨를 잡고 앞뒤로 흔들었다.

“당신 이사 아래에 있다고 했습니까? 빨리 연락해서 말하세요! 불운 굴렸는데 난리가 났다고!”

“아, 예! 어깨 좀!”

휙휙 흔들리던 마크 정이 핸드폰을 꺼낸다.

이연우는 병실 문 앞까지 물러나, 감각을 곤두세웠다.

통화가 이어졌다.

“예. 지금 주사위 결과 때문에, 아. 아십니까? 클럽이요? 예지가…. 알겠습니다.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통화가 끊어졌다. 이연우는 잔뜩 긴장해 마크 정을 보았다. 혹시나, 평범한 총탄으로 쏴버리라는 명령을 내렸을까 봐.

마크 정이 말했다.

“이연우 씨. 당신 잘못 아니랍니다.”

“확실합니까?”

이렇게 끝날 문제가 아닌 거 같은데?

이연우의 의심이 깊어졌다. 찰칵, 병실 문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고, 문 뒤에 숨었다.

“저도 잘 몰랐는데, 예지란 게.”

마크 정이 한숨 돌린 표정으로 설명했다. 예지가 고정한 미래. 이연우의 결과는 기울어진 미래를 향해 굴러떨어졌을 뿐이라고.

이연우도 이해했다. 오라클 시스템 같은 것.

“그러니까, 다 대응할 수 있다는 거죠? 전부 클럽 잘못이고?”

주사위도 감당 못 해 터진 오라클 시스템인데, 설마 회사가 예지 하나 못 막을까.

과연, 마크 정은 노트북 화면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다시 오르네요.”

대규모 심리조작을 썼는지, 어떤 이상한 이상개체를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사소한 사고로 끝나겠습니다. 그리고 이사님이 말씀하셨는데.”

이연우가 귀를 쫑긋 세운다.

“이런 일 있으면 말하라고 하십니다. 복수든 뭐든 회사가 대신 처리해줄 테니까, 주사위는 제발 업무 나갔을 때만 굴려달라고….”

밖에서 터질 폭탄이 집안에서 터지는 경우를 간접적으로 체험한 이사 또한 기겁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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