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시간이 지난다.
본의는 아니라지만 사고를 칠 뻔했던 이연우는 주사위 쪽으로는 눈길 한 번 보내지 않았고, 이상異常 없이 평온한 일상을 보냈다.
불안해질 정도로 평온한 일상을.
‘이렇게 푹 쉬는 게 얼마 만이지?’
병실 침대에 걸터앉은 이연우는 손톱을 딱딱 물어뜯었다. 다리가 달달 떨리며, 슬리퍼가 딱딱딱 바닥을 때렸다.
병실에 들어온 지 몇 주.
일 없이, 사고 없이 먹고 자고 노는 일상.
처음에는 한껏 늘어지던 몸과 정신이 도리어 불편함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잠들 무렵에 불안하다가, 이제는 시도 때도 없이 불길한 생각이 머리를 떠돌았다.
‘이러다가 업무 나가면 적응 못 하는 거 아냐? 클럽하고 협상은 왜 또 느리고? 전쟁은 이제 곧 아닌가? 별일 없이 끝나나?’
뜨득-
마지막 손톱이 뜯겼다. 이연우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손가락을 보았다. 손톱을 깎지도 않았는데, 열 손가락의 손톱이 바짝 우둘투둘하게 뜯겼다.
“어….”
이연우가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뭔가 잘못됐다.
이연우는 정신 상태를 점검했다. 아무래도 정상이 아니다. 극한 업무에 시달리다가 PTSD라도 온 것 같다.
“상담 선생님 만나봐야 하나.”
고민하는 그때였다.
벌컥-
병실 문이 확 열리며 마크 정이 들어왔다. 몸을 벌벌 떨며 들어온 그는 불평을 늘어놓았다.
“날씨가 뭔. 이상기후 없어진 거 맞나 모르겠습니다. 겨울이어도 그렇지, 이렇게 춥고 폭설 내리는 게 맞습니까?”
신발에 묻은 눈이 녹아내리며 철퍽철퍽 물기를 묻힌다.
이연우는 여전히 다리를 떨며, 마크 정을 올려봤다.
“클럽하고 협상은 잘 됐습니까? 전쟁은요? 별문제 없습니까?”
“다 순조롭게 진행 중입니다. 전쟁은 내일 개전 예정인데….”
마크 정이 의자 위에 앉았다. 그는 기대도 안 했다는 듯, 가볍게 말했다.
“가라고 해도 안 가실 거죠? 솔직히 이연우 씨 투입하고 싶은 마음이 있긴 한데….”
“당연히 안 가죠!”
이연우가 펄쩍 뛰었다. 불안감이 이것 때문이었구나!
전쟁터로 가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위대한 나무인지 뭔지, 위험레벨 6의 그것도 거기서는 자라기도 전에 죽는다는데!
마크 정은 대충 손을 내저었다.
“그럼 됐습니다. 그냥 여기서 관전이나 하세요.”
참관인 느낌으로 멀리서 전쟁터 상황을 볼 수 있다며 설명한 마크 정이 서류를 몇 개 꺼낼 때였다.
이연우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참관 꼭 해야 합니까?”
“예? 하기 싫으면 안 하셔도 되는데. 보는 것만으로도 도움 될 텐데요? 이상개체의 파괴력이나 적대집단의 이상개체나 그런 거.”
그건 또 그런데.
“화면 너머로 영향 받으면 어떻게 합니까.”
보는 것만으로 죽거나, 기억에 담는 것만으로 정신이 이상해지거나.
마크 정은 실없는 웃음소리를 내었다.
“그 정도는 당연히 대비했죠. 필터가 걸러줄 겁니다.”
“그러면 뭐….”
이연우가 마지못해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마크 정은 서류를 흔들었다.
“그보다 협상이나 조정합시다. 크게 두 가지 협상이 있는데.”
하나는 이연우와 회사.
“이연우 씨는 참 정직한 사람이죠. 주사위가 있는데 그걸 사리사욕을 위해 쓰지 않으니까요. 본사가 당신을 좋게 평가하는 이유 중 하나인데, 이거에 관해 이야기합시다.”
주사위로 돈을 벌려고 하지도 않고, 사람을 해하려고 하지도 않고, 사회를 뒤집으려고 하지도 않는다.
주사위 같은 걸 가졌으면 욕망대로 쓸 법도 한데 말이다.
마크 정의 칭찬 아닌 칭찬에 이연우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나 살려고 내 목숨을 위해서 쓰는 건데. 평소에 쓰자니 실패가 무섭기도 하고.’
이연우의 표정이 어떻든, 마크 정은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이연우가 보니 진짜 단순한 글줄이다. 차라리 편지에 가까운 것.
“주사위의 결과는 예상하기 힘들고, 그 여파도 조절하기 힘들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사님이 제안하셨는데.”
이왕이면 업무에 나갔을 때만 주사위를 굴릴 것. 평소 생활 중에는 자제할 것.
일상 중 목숨이 위험한 일은 상관하지 않으나, 귀찮은 일이 있다면 주사위를 굴리지 말고 회사에 알릴 것. 회사가 대신 처리해줄 테니까.
누가 썼는지, 손 글씨로 구구절절하게 쓰인 제안들이었다.
이연우는 나쁘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귀찮은 일이라면?”
“주사위로 해결하고 싶은 일 말입니다. 이번에 정보상처럼 보복하는 건 대신 해주겠다는 말입니다.”
진짜 나쁘지 않다.
‘주사위는 좀 불안하지.’
적당히 성공하면 문제없다. 하지만 실패하면 의미 없고, 대실패나 대성공이 나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가 없다.
차라리 회사에 부탁하면 원하는 결과만 얻을 수 있지 않나.
이연우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어차피 진짜 위험할 때 아니면 안 굴려서.”
마크 정이 안도하며 두 번째 서류를 꺼냈다. 이 또한 회사의 제안이었다.
“저번에 주사위 이용권 팔겠다고 하셨지요. 그거로 이런저런 토의를 해봤는데, 이연우 씨.”
마크 정이 이연우를 본다. 이연우는 서류에 정신이 팔려, 그곳에 적힌 글자를 보았다. 부서 신설 기획.
“조사원 그만두시겠습니까? 아예 새로운 부서로 독립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주사위 이용권 거래를 업무로 삼는 부서.
부서장은 이연우며, 부서의 직원도 이연우 하나뿐이다.
이연우는 당황했다.
“아니, 이렇게 본격적으로 하겠다고요? 이럴 생각까지는 없었는데.”
“본격적으로 해야 합니다. 주사위 쓰려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결과가 불확실해서 그렇지, 주사위로 할 수 있는 것은 많다. 그리고, 굴리다 보면 성공은 나오기 마련 아닌가.
당장 회사만 해도 연구에 돌아버린 인간들이나 결과 하나를 위해 미친 자들이 많다며, 마크 정이 손을 휘적였다.
“물론 특수조사원 직위는 유지입니다. 그리고 이것도 조사원 일하고 비슷하고요. 의뢰받으면 나가서 주사위 굴리는 거니까요.”
“이건….”
이연우가 침을 삼켰다. 고민이 깊었다.
‘조사 대신 주사위 굴려주는 일만? …조사원보다는 안전하겠지.’
아무것도 모르고 맨몸으로 미지의 이상개체와 마주치는 조사원보다는 낫지 않을까.
이연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일단 몇 달 해보고 아니다 싶으면 취소하면 된다. 조사원으로 돌아가겠다는데 설마 막지는 않을 것이다.
“좋습니다. 그러면 이것도 세부 사항 만들어보겠습니다.”
마크 정이 다음 서류를 꺼냈다.
“클럽과 협상입니다. 이연우 씨 의사는 전했고, 클럽은 받아들였습니다.”
“…바로요?”
이연우는 고개를 기울였다. 그가 던진 제안은 협상이라기보다는 협박에 가까웠다.
강제계약? 안 해. 정보 팔겠다고? 팔아봐. 주사위로 복수할 거니까. 대신 주사위 이용권 팔아줄게.
이연우는 협상이 몇 번 더 이어지겠다고 생각했는데, 클럽은 뜻밖에도 바로 수용했다.
“수상한데요.”
“회사도 약간 압력을 행사했습니다. 클럽도 당신을 적으로 만들고 싶어 하지는 않았고요. 클럽 지침을 생각해보면.”
마크 정은 고민하다가, 말을 꺼냈다.
“아마 주사위 이용권 몇 번 구매하고, 계약 몇 번 맺으면서 친분을 쌓으려고 할 겁니다. 회유하고, 회유하지 못한다면 최소한 적의는 없는 관계를 맺으려고 하겠죠.”
싸워서 얻는 이득은 적다. 친구로 만드는 것이야말로 이득이다.
이연우는 클럽의 눈에 들었으니, 친구로 만들기 위해 작업할 것이다.
이연우가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괜찮네요. 저도 적을 만들고 싶지는 않아서.”
클럽의 지침은 이연우와 겹치는 부분도 있었다.
싸우면 위험하다. 위험한 요소는 만들지 않는 것이 좋다. 하지만 위험요소가 그의 목숨을 위협한다면.
“그래도 제 정보 유출되었나 계속 확인해주십시오. 정보유출이 반복되면 저도 주사위로 도박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음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
마크 정은 갑자기 불안한 느낌에, 입술을 떨며 물었다.
“어떤 도박을 하시려고…?”
이연우는 답하지 않았다. 주사위의 정보를 굳이 말해줄 필요 없다. 확률적인 가능성을 구현한다는 주사위의 본질을.
‘내 정보가 이상異常일 가능성을 가지고 굴려야지.’
그가 연수에서 보았던, 읽으면 죽는 책처럼. 그의 정보를 인식한 자를 죽이는 이상개체로.
“물론 실패나 대실패가 무서워서, 어지간해서는 안 할 겁니다. 성공해도 문제가 좀 있고요.”
“어, 어. 아니.”
마크 정이 손을 떨었다. 도대체 어떤 흉악한 판정을 생각한 건지 가늠이 안 간다.
“이연우 님. 진짜 회사가 할 수 있는 일은 회사에 맡겨주십시오. 주사위 대실패 나오면 수습하기 힘들지 않습니까.”
벌벌 떠는 마크 정을 이연우는 대충 무시했고, 마크 정이 든 마지막 서류를 보았다.
“할 말 다 한 것 같은데. 그건 뭡니까?”
“아. 그 정보상이 용서해달라고 보낸 제안인데.”
마크 정은 정신을 되찾았다. 마지막 업무에 집중했다.
“다시는 이연우 씨랑 주사위 관련된 정보 안 팔겠다는 강제계약서고, 바이러스로 빼앗긴 10억과 원하는 물품들로 보상하겠다고 합니다.”
이연우는 시큰둥했다. 이미 정보를 팔아서 날 죽일 뻔 했는데.
“주겠다니 받긴 하겠는데…. 이왕이면 권총, 시간을 사는 지폐로 달라고 해주세요. 아니면 쓸만한 다른 장비나.”
“예,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그럼 내일 오겠습니다.”
마크 정이 서류를 챙긴 후, 창밖을 보았다. 눈이 펑펑 내리는 바깥. 눈이 얼마나 쌓였는지 모르겠다.
“날씨가 진짜….”
머뭇거리던 마크 정이 귀찮다는 듯이 중얼거리고는 떠났다.
홀로 남은 이연우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불안감이 여전히 마음을 떠돈다.
‘내일이 전쟁이라고. 여기서 관전만 하는데 문제가 생기지는 않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