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어두운 밤.
이연우는 잠을 설쳤다. 눈을 깜빡이며 새까만 허공을 노려본다.
‘전쟁이라고. 전쟁터에 안 나가서 좋긴 한데.’
사후세계를 하강시키려는 멸망주의자의 계획은 멈췄다. 그가 만들어낸 사고에 휘말려서, 계획을 진행할 여력을 잃어버렸다.
거기에 그가 구현한 가능성, 적이 불운할 가능성에 휩쓸렸을 테니까 더더욱.
하지만 이상한 불안감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심장이 쿵쿵 뛰고, 신경이 곤두섰다. 병실 안에 드리워진 어둠 속에서 당장 괴물이 튀어나올 듯하다.
‘이건 어린 아이나 할 상상인데…. 아니지.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긴 해. 안 되겠다.’
이연우는 상반신만 일으킨 후, 에코백에 손을 넣어 형광조끼와 돌과 권총을 꺼냈다. 손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렇게 형광조끼를 입고 돌과 권총을 양손에 나눠 쥐니 마음이 좀 편하다.
해가 뜰 무렵이 되어 이연우가 잠에 들었다.
“이연우 씨? 아니, 이 사람은 어딜 간 거야.”
목소리가 들린다. 이연우는 손에 쥔 돌과 권총의 감촉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떴다.
마크 정이 투덜거리면서 병실을 돌아다니는 것이 보인다. 패딩에 장갑에 목도리까지, 완전히 꽁꽁 싸맨 마크 정은 순간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도망갔나? 참관하기 싫다고? 아니면, 무슨 사고라도 당했나?”
안 그래도 추위에 파랗게 질린 얼굴이 시체처럼 창백해졌다. 마크 정이 제자리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아니, 지금 사고 일어나면 안 되는데? 사고 수습할 여력이 부족할 텐데?”
전쟁에 거의 모든 자원이 투자되었다. 정보자원은 멸망주의자와 적대 집단을 감시하고 있으며, 전투인력은 전쟁터와 세계의 주요지역에서 대기하고 있다.
만약 지금 이연우가 대실패 같은 사고를 일으키면….
마크 정이 다급하게 핸드폰을 꺼냈다가, 이연우의 핸드폰이 침대 구석에 있는 것을 보고 손을 파르르 떨었다.
“핸드폰도 챙기지 못했다고?”
이건 이사한테 바로 보고해야 한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그렇게 마크 정이 핸드폰을 누르려고 손가락을 올렸을 때, 이연우가 돌을 놓고 형광조끼를 벗었다.
“여기 있습니다.”
잠에 취해 잠긴 목소리.
마크 정이 휙 고개를 돌려 이연우를 보고는 안도하기를 잠시, 곧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무슨 인식왜곡 장비를 입고 잠을 자고 그럽니까.”
“요즘 좀 불안해서.”
이연우는 크게 하품한 뒤, 졸린 눈을 비볐다. 그 짧은 시간에 피로가 물러났다. 빗물의 활력이다.
마크 정이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 생긴 것만 아니면 됐습니다.”
“전쟁 시작했습니까?”
이연우는 말똥말똥한 눈으로 마크 정을 보았고, 마크 정은 주저앉듯 의자에 털썩 앉았다. 노트북을 꺼내 탁자에 올린다.
“이제 곧 시작합니다.”
한순간에 수명을 빼앗긴 사람처럼 피곤한 얼굴을 한 마크 정이 노트북을 두드렸다.
그리고는 여러 개로 분할된 화면을 띄웠다. 검은 강을 중심으로 사람과 이상개체가 대립하고 있었다. 회사와 우호집단이 한쪽에, 반대쪽에는 적대집단이.
“회사에서 보는 관측화면입니다. 짧게 설명하자면-”
“저 배고픈데, 뭐 시켜 먹으면 안 될까요?”
마크 정은 말문이 막혀 멍하니 있다가,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병원 밥, 아니, 내일이면 퇴원이죠. 마음대로 하십시오.”
전쟁이라고 해도 이건 이상개체 대 이상개체의 전투에 가까웠다. 규칙과 합의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전쟁이었으니까.
그것도 사후세계를 날려버리고, 오염의 근원인 이상개체를 파괴하기 위한 전쟁.
다른 집단의 생각은 모르겠지만.
“그러면 도시락을….”
그리고, 핸드폰을 두드리던 이연우도 정신을 차렸다. 머리를 맴도는 불안감. 멀리서 일어난다지만 여파는 알 수 없는 전쟁.
둔한 머리가 확 깨어났다. 이연우가 손을 저었다.
“아닙니다. 계속 말하시죠.”
“사후세계는 이차원의 일부분인데, 운석처럼 우리 세계에 떨어졌습니다.”
마크 정은 대충 넘어갔다. 사후세계부터 설명했다.
다른 법칙으로 운영되는, 혹은 이상異常에 완전히 오염된 이차원. 사후세계는 그런 이차원의 일부가 우리 차원으로, 지구 근처로 떨어진 것이라고.
“지구와 조금 겹친 사후세계의 중심은 저 검은 강인데, 저 강만 파괴하면 마법학회와 회사의 마법사들이 대마법을 진행해 사후세계를 완전히 추방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연우가 감각을 예민하게 곤두세웠다.
화면을 보니, 두 개의 카운트다운이 돌아가고 있었다.
하나는 전쟁 개시까지 남은 시간. 다른 하나는 사후세계 추방까지 남은 시간. 째깍째깍 줄어드는 시간이 꼭 타들어 가는 도화선처럼 느껴진다.
‘전쟁은 회사 마음대로 될까? 추방은 백 퍼센트 확실한가?’
안절부절못하는 동안 시간이 지나고.
전쟁이 시작되었다.
***
삑-!
시계가 전쟁 시작을 알린다.
격리되었던 이상개체의 봉인이 풀리고, 이상개체에게 대가를 지불하고, 이상개체가 힘을 발휘했다.
수십 개로 나뉜 화면이 동시에 난장판이 되었다. 섬광이 번쩍이고, 관측장치가 어둠에 휩싸이고, 필터가 만든 노이즈가 치직거리고. 스피커는 소리조차 못 되는 소음을 뱉었다.
이연우는 불안감도 잊고 멍하니 화면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요.”
“잠깐만요.”
마크 정은 마우스를 딸깍이며 그나마 멀쩡한 화면 하나를 확대했다.
————!
스피커가 굉음을 토한다. 화면에는 붉은 거인이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불길과 버섯구름을 일으키는 거인이.
그것이 고함을 지르자, 충격파가 터져 나오며 검은 강이 증발했다. 아니, 그냥, 사후세계가 섬광과 폭염과 방사능으로 뒤집어졌다.
이연우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저건 진짜 핵폭발이다.
“회사가 봉인해둔 이상개체, 붉은 거인입니다. 우리가 세계 각국의 정부를 견제하는 이유죠.”
마크 정은 기억을 더듬듯 허공을 바라보다, 애매하게 설명했다.
“2차 세계대전이었나, 냉전 시기였나. 어떤 나라에서 핵과 이상異常으로 무기를 만들려고 하다가, 우연히 만든 개체인데. 핵폭발의 정령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겁니다.”
“아니, 미친.”
이연우는 자제하지 못하고 욕을 뱉었다.
저게 뭔. 아무리 주사위가 있어도 근처에 갈 수도 없는 위험 아닌가.
‘저게 날 죽이려고 하면….’
주사위로 도망치는 게 답 아닐까? 아예 가까이 갈 생각은 하지도 말고.
그러는 사이, 붉은 거인은 폭발을 몇 번 더 일으켰다. 걸음걸음마다 폭발이 일어났다. 버섯구름이 무슨 버섯 농장처럼 솟구쳤다.
그런데도, 거인 앞에 선 것이 있다.
“저건, 악마입니까?”
“세계대전의 악마 같은데….”
무슨 2차 세계대전 시기의 군복 같은 것을 입은 노인이 입꼬리가 찢어지게 웃으며 손을 활짝 폈다.
그것의 목소리가 들린다.
- 제물! 고맙다!
전쟁이란 개념이 극대화된 장소에서, 최악의 전쟁 무기 앞에서, 그것은 그것이 관장하는 개념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노인의 하얀 머리가 까맣게 물들고, 주름살이 사라졌다. 코밑으로 거뭇거뭇한 수염이 나왔다.
- 젊음이, 전성기가 돌아온다!
이연우가 당황했다. 이거 적한테 좋은 일만 해준 거 같은데.
하지만 마크 정은 당황하지 않았고, 과연 공격이 이어졌다.
돌연 악마의 앞에 사람 몇이 나타났다. 헤일로를 달고, 후광에 감긴 사람들이. 그들은 짧게 아멘, 외친 후 주먹을 들었다.
악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 롱기누스의 창?
- 악마는 지옥으로.
꽝! 주먹으로 악마를 쥐어팬다.
기적같이 그들 주변으로는 핵폭발의 여파가 닿지 않았다. 아니, 기적이 맞았다.
“바티칸에 있는 이상개체인데, 롱기누스의 창이라고 찔려 죽으면 3일 후에 이상개체로 부활하는 창이 있습니다. 부활하고 40일이 지나면 사라지지만요.”
이번에는 바티칸의 구마사제와 회사의 악마사냥꾼이 스스로 요청했다고.
그렇게 막싸움이 이어졌다. 후광을 두른 자들이 악마를 둘러싸고 주먹을 휘두르고, 발로 걷어차고, 때로는 채찍으로 후려친다.
붉은 거인은 멍하니 있다가, 작게 울부짖은 후 검은 강이며 주변 세계를 파괴하기 시작했다.
마크 정은 화면을 돌렸다.
귀신들이 비명을 지른다.
- 끼에에엑! 이승 놈들이 쳐들어왔다!
- 도망쳐!
- 도망칠 곳도 없어!
후다닥 도망치는 귀신들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새의 그림자다. 푸른 새가 유령을 덮쳤다.
확 내려와 다리로 귀신을 내리찍고, 부리로 머리를 콕콕 찍는다. 발버둥 치던 귀신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해졌다.
그리고는 비틀비틀 일어나 다른 귀신을 붙잡았다.
- 이거 놔!
붙잡힌 귀신의 머리 역시 푸른 새의 부리에 찍혔다. 그렇게 그 귀신도 정신이 나갔고.
몸집이 커진 푸른 새는 귀찮다는 듯 부리를 쩍 벌리더니, 크게 숨을 들이켰다. 일대의 기류가, 근처 귀신들의 정신이 그대로 빨려 들어갔다.
그 귀신들은 전부 푸른 새의 노예가 되었다.
“정신을 쪼아먹는 새. 회사가 봉인해둔 건데.”
“…이것도 회사가요?”
이연우는 입을 벌렸다.
‘이래 놓고 오염 걱정했다고?’
저딴 걸 무슨 비밀무기처럼 꽁꽁 싸매고 있었으면서? 사실 회사 때문에 이상오염이 심각한 건 아닐까?
마크 정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 다 연구할 가치가 있지 않습니까. 아껴두면 쓸 일이 생길 수도 있고요.”
그러는 동안에도 푸른 새는 사후세계를 날아다니며 귀신들의 정신을 빨아들였고, 순식간에 몸집을 불렸다.
하늘을 가릴 만큼 커진 몸. 그 아래로 따라서 날아다니는 귀신의 군세.
그때였다.
차르륵-
갑자기 화면에 커튼이 쳐졌다. 공연 무대에서나 볼 법한 커튼이.
이상異常의 영향이다. 카메라와 화면까지 영향을 끼치는.
이연우가 긴장하며 몸을 뒤로 빼는 순간, 커튼이 열렸다. 커튼 너머는 무대가 되었다. 내레이션이 들렸다.
중후한 남자의 목소리.
- 그리하여 영웅 일행은 준비를 마쳤다. 위대한 조각가의 도움으로 군세를 얻었으며, 위대한 대장장이의 도움으로 사악한 새를 봉인할 새장을 만들었다.
말을 탄 기사 조각상과 병사 조각상이 도열했다. 그 너머에는 귀신의 군세가 있다.
조각상의 군세 앞, 찬란한 갑옷을 입은 남자가 칼을 치켜들었다.
- 인간을 노예로 부리는 사악한 새를 타도할 시간이다! 두려워 말라! 영광이 우리 앞에 있다!
병사 조각상이 일제히 창으로 대지를 내려찍었다.
마크 정이 중얼거렸다.
“영웅 연극단….”
“감독 같은 현실조작입니까?”
“아마요.”
동시에 돌진한 귀신과 조각상이 한데 어우러져 싸웠다. 찬란한 갑옷을 입은 남자와 궁수와 마법사가 푸른 새와 치열하게 전투했다.
그런 식으로 곳곳에서 비등한 전투가 이루어졌다. 사후세계는 전쟁에 휩쓸렸다. 참다못한 강대한 악귀 같은 것이 동시에 뛰쳐나왔지만, 순식간에 증발했다.
이연우는 쿵쿵 뛰는 심장 위로 손을 올렸다.
‘전쟁터나 대규모 전장은 절대로, 절대로 가지 말자. 전장이다 싶으면 바로 도주 굴리는 거야.’
살아남기 위한 규칙을 하나 더 세운 이연우가 화면에 눈을 집중했다.
그리고, 전황은 회사의 기대와 다른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