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이연우의 정신이 말끔하게 돌아왔다. 맑은 정신으로 기억을 떠올리니, 온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저항 불가능한 정신오염. 현실까지 조작하는 아름다움.’
신화에나 나올 법한 초월적인 존재다. 두 눈으로 직관한 인간은 정신이 나가버리는, 그걸 예방할 수도 없는, 차라리 코즈믹 호러에 가까운 존재.
적어도 이연우의 인식은 그러했으니, 이연우는 파들파들 떨며 간신히 말했다.
“진짜 못합니다. 그런 걸 어떻게-”
클럽의 의뢰. 예술가 협회장을 툭툭 건드려 달라는 그 요구는 절대 들어주면 안 된다.
하지만 이연우는 다급하게 말을 멈췄다. 상대가 클럽임을 깨달았다.
‘…얘네도 비슷한 급이잖아.’
협회장과 싸운다는 회장과 황금만능주의.
협회장의 힘을 지독하게 느낀 이연우는 클럽의 힘을 다시 평가했고, 황금만능주의도 어느 정도 상대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이 단번에 사라졌다.
그는 황급하게 말을 바꿨다.
“할 수는 있는데요. 실패나 대실패 나오면 협회장한테 좋은 일만 될 수 있습니다. 아십니까? 이거 리스크 굉장히 큽니다.”
- 사소한 판정이면 됩니다. 눈이 간지럽거나, 피로가 쌓이거나, 잠이 오거나.
비서실장은 조금 당황한 목소리로 답했지만, 이연우는 손을 절레절레 내저었다.
“아, 이게 거리가 멀어서 안 됩니다. 이게 가까운 범위만 돼서…. 저도 정말 돕고 싶은데….”
이연우는 거의 울먹거리는 지경이 되었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것도 아니고. 나는 그냥 가만히 있고 싶다고.’
전쟁도 싫고, 괴물들끼리 싸우는 데 끼어들기도 싫다. 함부로 끼어들었다가는 목숨이 몇 개여도 부족하다.
비서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 핸드폰 너머에서 두 종류의 소음이 들려왔다.
차르륵, 뭔가를 옮기고 쏟는 소리. 클럽 회장인지 누구인지, 계속해서 말하는 소리. 듣기만 해도 살벌한 그 목소리.
‘제발 포기해라.’
이연우가 초조하게 발을 동동 굴렀고, 비서실장은 다시 입을 열었다.
- 거리는 괜찮습니다. 우리가 당신을 옮겨드리면 되니까요. 그리고.
사소한 문제는 다 해결해주겠다는 말 뒤로는, 이연우를 설득하기 위한 말이 이어졌다.
- 보복이 걱정되는 거면 문제없습니다. 협회장은 이후로 함부로 못 움직이게 될 겁니다. 당신이 지금 참전하더라도 협회장은 당신 공격할 여유가 없고요.
“아니, 그게.”
- 예술가들도 복수하겠다고 움직일 정신이 없습니다.
거절하기도, 동의하기도 난처하다.
그때, 마크 정이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이연우가 통화하는 것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연우 님. 이사님한테 연락 왔습니다. 클럽에 협조하라고 하십니다.”
거기에 더해 비서실장이 말했다.
- 예술가 협회의 본진하고 이사들, 지금 대악마한테 납치되었다고 합니다. 복수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아.”
순간 이연우가 가벼운 탄식을 뱉었다. 이 정도로 상황이 진행되면 생떼 부리듯 거절하기도 힘들다.
사실 보복 걱정 없고, 조금의 안전이 보장되기도 했고.
‘전쟁이잖아. 사람 하나하나 찾아가면서 화풀이하지는 않겠지. 그리고 황금만능주의를 상대하는 데 날 신경이나 쓰겠어.’
이연우는 체념하고는 회사원의 슬픔을 담아 작게 중얼거렸다.
“결과 어떻게 나와도 전 모릅니다….”
***
황금만능주의가 이연우를 옮겼다. 병실에서, 어딘지 모를 산의 정상으로.
하늘을 가로지르는 운석 파편이 셋. 그중 하나에 협회장이 있다. 이연우는 잠깐 하늘을 올려봤다가, 핸드폰을 입 앞으로 가져왔다.
“도착했습니다. 대충 마무리되면 저 다시 옮겨주셔야 합니다.”
- 당연히 복귀시켜드려야죠. 아마 별문제 없을 겁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사소하게 건드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도움이 된다, 보상을 기대해도 좋다, 뭐라고 인사치레를 하는데, 이연우는 가차 없이 통화를 끊었다.
이딴 통화에 집중할 때가 아니다.
이연우는 심호흡을 반복했다. 다른 것도 아니고, 그 협회장을 건드리는 일이었다.
“준비, 준비.”
생각보다 위험한 느낌은 안 들지만 경계는 해야 한다. 이연우는 형광조끼와 돌을 꺼내 쥐고, 시간을 사는 지폐를 주머니에 잔뜩 욱여넣었다.
이연우는 가만히 멈춰서 고민하다가, 수면 안대와 귀마개를 꺼내 눈과 귀를 가렸다. 혹시라도 협회장이 모습을 드러내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협회장이 오면 저절로 떨어질 것 같긴 한데. 안 하는 것보다는 낫겠지.’
새까만 시야. 먹먹한 귀.
어둠 속에는 정신 한편의 주사위만 보인다.
‘주사위. 해보자.’
이연우가 주먹을 꽉 쥐며 판정을 준비했다. 클럽과 본사가 원하는, 사소한 판정을.
‘눈 깜빡임이 신경 쓰일 가능성, 침이 목에 걸릴 가능성, 발바닥이 간지러울 가능성, 감기에 걸릴 가능성, 갑자기 졸릴 가능성, 뭔가 잊어버렸는데 그게 뭔지 기억이 안 나는 감정에 휩싸일 가능성.’
데구르르, 주사위가 정신없이 굴렀다. 그리고, 결과가 나왔다.
실패, 실패, 실패, 실패…. 모두 실패했다.
‘이럴 거 같긴 했어.’
이연우는 침착하게 다음 판정을 계속해서 굴렸다. 어차피 협회장을 위해서 움직이는 세계였다. 주사위의 결과에도 영향을 끼칠 것이다.
그렇게 주사위는 굴렀고, 확률이 조작된 듯 실패만이 나왔다.
“….”
데구르르, 실패, 데구르르, 실패.
몇 번은 판정을 바꿔서 협회장에게 도움이 될 판정을 굴려보니, 귀신같이 성공이 나온다.
이쯤 되니 이연우도 오기를 느꼈다. 정확히는, 불안을 느꼈다.
“이 정도로 안 통한다고?”
아예 대항조차 불가능하다는 말 아닌가. 저런 것이 자신을 죽이려고 들면, 그냥 죽어줘야 한다는 뜻이지 않나.
주사위가 멈췄다. 이연우가 더 굴리지 않았다. 이연우는 새까만 시야 속에서 기억 속의 협회장을 떠올렸다.
이제는 정확히 기억도 나지 않는, 흐릿한 인영. 세계가 찬양하던 그녀.
‘만약 그게 나한테 죽어달라고 부탁하면.’
온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듯, 손발이 차게 식고, 생기가 옅어졌다.
‘보는 것만으로 위험한데, 강제로 보게 만들었어. 주사위가 아니면 대항할 방법도 없는데, 주사위도 안 통해.’
안 된다. 이대로는 안 된다.
상대가 아무리 위험레벨 6이고, 정상급 집단의 핵심 이상개체여도, 대항할 수단이 하나도 없어서는 안 된다.
이연우가 이를 악물었다.
‘감각을 곤두세우는 것만으로는 안 돼.’
지금도 느껴진다. 모든 결과는 협회장에게 도움 되는 쪽으로만 나올 것이다.
원하는 결과를 강제로 뽑아야 한다. 최소한 한 번이라도, 협회장이 아니라 자신의 뜻대로 결과를 고정해야 한다. 하다못해 무작위로 결과가 나오게 만들어야 한다.
‘집중해, 집중해, 집중해. 도주할 능력은 있어야지.’
심장이 쿵쿵 뛴다. 이연우는 입술이 찢어질 정도로 꽉 깨물었다. 어둑한 시야와 갑갑한 청각 대신, 피비린내가 진하게 났다.
그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이건 기회야.”
이건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상대하는 법을 익힐 기회다. 생존능력을 키울 기회다. 협회장 정도 되는 이상개체를 상대해볼 기회다.
이연우가 정신을 집중했다. 평범한 총탄이 머리에 겨눠진 듯. 협회장이 눈앞에 있는 듯.
“….”
극한까지 곤두선 감각이 가능성을 흐릿하게 탐지했다. 협회장을 위해 기울어진 가능성. 황금만능주의가 움직이는 가능성. 주사위로 조작할 가능성.
‘이걸 움직여야 하는데. 어떻게 하지?’
손을 휘적여도 보고, 괜히 눈을 부릅뜨고 수면 안대를 노려보고, 확률을 붙잡듯 주먹을 쥐어도 보고.
하지만 하나도 통하지 않았다. 확률과 가능성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못 하나?”
이연우가 떨떠름하게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무래도 무리 같다. 주사위에 오염이 덜 된 모양이다.
그때였다.
시선이 느껴진다. 수면 안대가 흘러내렸다. 귀를 꽉 막은 귀마개가 스르륵 떨어졌다.
“….”
돌연 들이닥치는 세상. 이연우는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하늘 가운데에 멈춘 운석과, 운석에서 무언가가 자신을 보는 듯한 시선을.
협회장이다. 협회장이 시선을 던졌다. 그녀를 귀찮게 굴던 무언가를 찾아서. 인식왜곡 장비가 힘을 잃었다. 그녀를 속이면 안 되니까.
그 선명한 시선에 심장이 쿵 떨어졌다. 이연우의 머리가 하얗게 질렸다.
‘이건…!’
아직 그녀의 형상이 보이지는 않지만, 그것도 시간문제다. 이연우의 머릿속에서 얼마 전의 과거가 빠르게 스쳤다.
정신이 오염된 자신. 세상을 움직이는 협회장. 상대할 수 없는 위험!
본능이 비명을 질렀다. 이연우도 비명을 질렀다. 하얗게 질린 머리는 복잡한 생각은 하지도 못했고, 단말마 같은 생각 하나를 폭발시켰다.
“도망! 아니! 이동!”
오로지 본능에만 충실한 행동. 생각도, 계산도 없이, 짐승처럼 움직이는 몸.
주사위가 굴렀다.
데구-
늘어지는 시간 속에서 이연우는 가능성을 느꼈다. 협회장을 위해, 이연우가 도망치지 못하게끔 실패로 기우는 가능성.
‘안 돼!’
꿈틀거리는 가능성이 완전히 고정되기 전에, 이연우는 물에 빠진 사람처럼 손을 허우적거렸고.
결과가 바뀌었다.
성공!
이연우가 보던 세상이 한순간에 바뀌었다. 어딘지 모를 산 정상에서, 그가 있던 병실로.
“어, 어, 어.”
이연우는 식은땀으로 푹 젖은 이마를 짚었다. 눈동자가 쉴 새 없이 떨리며 사방을 둘러봤다. 마크 정이 의자에 앉아 쉬다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오셨습니까?”
“와, 왔나? 네, 도망친 거 같습니다.”
이연우는 횡설수설했다. 지금도 이해가 잘 안된다. 도망쳤나? 진짜로?
‘…어떻게 했지? 아냐, 일단 그거한테서 도망쳤으면 됐지.’
이연우는 힘이 빠져, 침대에 축 늘어졌다. 팽팽하게 당겨졌던 신경이 탁 끊어진 느낌.
그가 마크 정에게 말했다.
“이런 의뢰는 안 받겠습니다. 진짜….”
“아니, 무슨 일이 있으셨길래.”
마크 정이 물었고, 이연우는 쿵쿵거리는 심장을 달래며 짧게 설명했다.
협회장이 자신을 봤다고. 그래서 도망쳤다고.
그 말에 마크 정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협회장도 지금 공격할 여유는 없으니까, 그냥 시선만 던졌을 뿐일 텐데. 그래도 도주에 성공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