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
시간이 멈췄다.
이연우는 주사위가 굴러 저항에 성공했고, 위화감에 저절로 잠에서 깨 눈치껏 상황을 파악했다.
정적이 내려앉은 병원. 근처에서 노트북을 두드리던 자세로 멈춘 마크 정과 창밖에서 석상처럼 굳은 사람들.
‘시간 정지. 고장 난 시계겠지.’
이전에 겪었던 시간 정지. 아마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회사가 작동한 모양이다.
시계초침제작소로 가 비상통신망을 확인하면 확실히 알겠지만, 이연우는 굳이 찾아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
거리가 멀어서 귀찮기도 하고, 회사원을 직접 만나기도 해서.
벌컥-
무슨 우주복 같은 걸 입은 특수요원은 설렁설렁 병실로 헬멧을 들이밀었는데, 멀쩡하게 움직이는 이연우를 보고는 펄쩍 뛰어올랐다.
“으아악! 안티 타임 이상개체다! 어째서!”
“…괜찮으세요?”
혼자 뒤로 자빠진 특수요원에게 어색하게 묻자, 특수요원은 슬금슬금 뒤로 기어갔다.
더러운 물웅덩이가 물방울이 되어 사방으로 튀다가, 멈춘 시간 속에서 허공에 박제되었다.
“오, 오지 마!”
황급하게 무기를 찾아 손을 휘적이는 모양새가 오발사고라도 터질 것 같다.
이연우는 얼른 손을 들었다. 무장하지 않은 손을 활짝 펴 보여줬다.
“이상개체 아니고 평범한 조사원입니다. 시간 정지에 저항할 수 있어서. 그쪽은 누구십니까?”
“아.”
침착한 이연우의 태도에 특수요원은 한참 동안 숨을 헐떡이더니 민망하게 웃으며 일어났다.
“사태수습 팀에 징집된 직원입니다. 이 병원은 회사가 보존하기로 했는데, 한번 둘러보라고 해서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눈을 내리깔고, 시간 정지에 저항하는 장비인지 우주복을 살피면서 돌려준 답. 회사원답지 않은 추태가 부끄러운지 목소리가 떨렸다.
‘징집? 전문요원 말고 빨리 쓸 수 있는 사람을 대충 끌어모았나? 아니면 이 사람만 이런가.’
혼자 이 병원에 보낸 거 보면…. 이연우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물었다.
“고장 난 시계 맞습니까?”
“아시는구나. 저는 얼마 전에 알았는데. 시간 멈춰 놓고 사태수습 팀이 마법진 그리고, 조사하고, 마법사들 옮겨놓고, 뭐 그러고 있다더라고요.”
시간 끌기 싫은지 종말방어장치까지 이용한 모양이다. 이연우가 고개를 끄덕이다가 질문했다.
“오래 걸립니까?”
“그건 저도 모르겠네요. 아, 그보다 뭐 좀 물어봅시다.”
한창 우주복을 휘적이며 흠집을 확인하던 요원은 진정했다. 얼굴의 붉은 기가 가라앉았다. 요원이 문득 헬멧을 들었다.
요원이 눈을 반짝이며 이연우를 보았다.
“여기 계속 계셨던 거죠?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파편 떨어지고, 귀신이랑 기계 인간이 날뛰고, 회사원 유령이 나타나서 정리하고….”
정보를 주의 깊게 듣던 요원은 중간중간 질문을 던졌고, 원하던 정보를 얻자 뒤로 물러났다.
“협조 감사합니다. 저는 병원 한 번 돌아보고, 다른 지역 지원 가야 해서. 그런데 진짜 부럽네요. 맨몸으로 저항하는 거. 우리는 작전 끝날 때까지 이 슈트 못 벗는데.”
씻지도 못하고, 밥도 유동식을 빨대 같은 걸로 빨아먹어야 한다고 투덜거리며 떠난다.
둔중한 발소리가 멀어졌다.
“별문제 없겠, 아니, 이런 말 하지 말자.”
이연우는 자기 입을 찹찹찹 때린 후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마크 정이 작성하다가 멈춘 문서를 보았다.
주사위 이용권 판매를 업무 삼는 부서. 이연우가 새로 맡을 부서.
‘이거나 고민해볼까.’
앞으로 바뀔 업무고, 그가 부서장으로 있을 부서였다. 아무리 마음에 안 들면 취소하면 된다지만, 이연우는 진지하게 미래를 그렸다.
그러던 중 이연우는 문득 깨달음을 얻었다.
‘이거 꼭 해야 하나? 적당히 회사 보호 받으면서 시간 보내면 안 되나?’
***
멈췄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한다.
납치되듯 옮겨진 마법사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준비된 마법진을 보았고, 회사원의 재촉에 불만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아. 여기에 버릴 생각은 없었는데.”
“어디 가서 말하지 마십시오. 제가 쓰레기 버렸다는 거 알면 보복당하지 않습니까.”
단순하게 보면 쓰레기 투기고, 극단적으로 보면 이상공격이다. 다른 이차원이 어떻게 반응할지 알 수 없단 말이다.
솔직히 지구 출신 마법사들이 쌓은 업보도 꽤 크고….
“추방!”
어찌 되었든 파편들은 무사히 추방되었다. 세상을 오염시키는, 위험한 이상개체와 함께.
그렇게 긴급하게 처리할 사태는 마무리되었고, 이상세계의 여러 집단은 천천히 열을 식히기 시작했다.
피해를 집계하고, 그 피해를 복구하고, 잃어버린 이상개체를 아까워하고, 전후에 재편될 미래를 계획하고.
이연우 또한 미래를 준비했다.
“그래서 말인데, 이용권 꼭 팔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어디 최후의 쉘터 같은 곳에서 시간만 보내면 되지 않습니까.”
이연우는 진심을 담아 이야기했다. 그 눈이 희망으로 빛났다.
대충 회사의 집중적인 보호를 받으며 안전한 장소에서 삶을 보낸다. 그 시간만 잘 보내면, 누구도 그를 위협할 수 없는 수준에 다다른다.
그야말로 완벽한 미래고, 인생이다.
마크 정은 멍하니 노트북 화면과 이연우를 번갈아 보았다.
“이용권 판매 안 하시고요?”
“예. 폐쇄적인 장소여도 상관없습니다. 사실 인터넷만 되고 밥만 잘 나오면 얼마든지 버틸 수 있어서.”
이연우는 말을 할수록 훌륭한 미래가 눈앞에 아른거려, 목소리를 높였다.
“시간만 주시면 위험레벨 6에 오릅니다. 진짜요. 협회장이나 황금만능주의? 그거랑 비슷해진다니까요? 잘 보호하고 밥만 챙겨주면 회사에 최고 전투병력이 나온다는 말입니다.”
“….”
마크 정이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필사적으로 부정할 때는 듬직했는데, 갑자기 믿음이 확 떨어지는 느낌.
‘물론 거짓말은 아니겠지만….’
회사가 이만한 인력을 쉬게 둘 리는 없다. 이연우가 이미 실력으로 증명했으니까. 보호는 필요 없다는 증명.
“이연우 님. 이미 협회장 앞에서 도망치셨지 않습니까. 어떤 보조 없이 혼자서요.”
순간 이연우가 말을 멈췄다. 등골을 타고 오르는 불안감. 회사의 과대평가.
“그건 우연이고, 재현도 못 하고, 기억도-”
“협회장입니다. 그녀가 당신을 인지했고, 당신이 그곳에 있기를 바랐습니다. 우연으로 도망칠 상대가 아닙니다.”
마크 정은 물론이고 본사까지 동의하는 판단이었다.
도주에 성공했다고? 펑펑 터지는 폭탄이 협회장한테서도 돌아올 수 있다고? 인간 종말방어장치 느낌으로 업무 주면 되겠는데?
보호? 오히려 이연우로부터 인류를 보호해야 하지 않을까? 잘못 터지면 망하잖아.
거기에 클럽 회장도 보탰다.
“클럽 회장이 극찬했다던데요. 최소한 6레벨에 발은 걸쳤다고. 언제 몰래 이런 사람을 키웠냐고.”
“아닌데.”
이연우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두 갈래 길이 보인다.
‘이대로면 망한다. 보호받기는커녕, 본사한테 등골 뽑히는 길만 보여. 차라리.’
마크 정의 눈동자가 수상하게 빛난다. 이연우는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용권 판매하겠습니다. 제가 생각을 해봤는데-”
차라리 한국지사에 부서 하나 만들어, 본사의 영향력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난다. 조금 찾아보니 지사와 본사가 수직적인 관계는 아니었으니까.
이연우는 시간이 멈춘 동안 심심풀이로 구상했던 내용을 빠르게 쏟아냈다.
“일단 한국지사에서만 시험 삼아 운영해보고, 몇 달 뒤에 계속할지 정하는 게 좋겠습니다. 사무실도 건물 새로 구할 필요 없이 조사반 건물 쓰고요. 대가는 모르겠지만, 실패나 대실패 위험성 고지하고-”
***
전쟁과 관계가 없어 평온한 조사반 사무실.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연우가 어색하게 웃으며, 반장과 유지유에게 말했다.
두 사람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이연우를 보다가, 뒤늦게 입을 열었다.
“부서 만들어서 독립한다고?”
“부서장 됐다고요?”
“그렇게 거창한 건 아닙니다. 그냥 다른 부서나 집단 사람들 요구대로 주사위 굴려주는 일이라. 계속 유지될지도 모르고요.”
유지유가 헤 입을 벌리고 있다가, 갑자기 박수를 짝짝짝 쳤다.
“축하해요! 승진했네요! 아니, 좌천인가? 특수조사원 직위는 어떻게 된 거예요?”
“그건 계속 가지고-”
비슷한 나이인 유지유와 이연우가 이런저런 말을 주고받았다. 부럽다, 조사원보다 안전한 일 아니냐, 월급 얼마나 받냐, 거기 직원 안 필요하냐….
한편 반장은 눈동자를 데굴 굴렸다. 차마 이연우에게 하지 못할 말이 떠올랐다.
‘회사 괜찮나?’
안 그래도 사건사고를 몰고 다니는 애인데. 실험에 쓰겠다고 이연우 불렀다가 문제만 생기지 않을까?
그때 유지유가 침묵하는 반장을 보았다.
“반장님, 서운해요?”
“아니, 그건 아니고. 연우야. 그, 주사위 굴려주면 어디 가서 하냐?”
“아, 그게.”
이연우도 반장의 생각을 눈치채고, 볼을 긁적였다.
“회사에는 안 팔려고 했는데, 연구원들이 항의를 엄청 해서….”
이연우가 사고를 터트린다는 건 본사도 알고, 한국지사도 알았다. 그래서 회사에서 안 터지게 처음부터 막을 생각이었지만, 그 소식을 어떻게 들었는지 연구원들이 단체로 드러누웠다고.
“아마 사고 몇 번 터지면 다들 피할 거라고, 부서 몇 개 희생양 삼겠다고 합니다.”
“어….”
반장은 입을 달싹거리다가, 돌연 주먹으로 책상을 쾅 내리쳤다.
“어쨌든 승진 축하한다! 고기나 먹자!”
다른 부서 일이 알 바인가? 거기다 사실 아래에 두기에는 감당하기 힘든 직원이기도 했고.
좋은 일이었다. 당분간은 이상조사반 사무실에서 일하기까지 하는데, 쓸데없는 걱정은 불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