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류보호회사 (154)화 (154/194)

사랑

멸망주의자의 어두운 은신처에서 음모가 무르익었다. 여자 하나가 향수 병 하나를 든 채, 핸드폰을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이 사람한테 미인계를 쓰라고요?”

“맞아!”

전자세계의 유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령은 손을 휘적였고, 여자의 핸드폰에 온갖 자료가 다운로드되었다.

전부 이연우의 정보였다.

회사의 프로파일러가 분석한 성격을 비롯해, 그의 업무 기록, 인간 관계.

여자는 입을 헤 벌린 채 문서를 읽었다. 유령이 가만히 기다려줬기에 고요한 분위기가 은신처에 맴돌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여자는 자신감 있는 표정을 지었다.

“까짓거 한번 해보죠.”

솔직히 문서만 봐서는 실패할 확률이 높았다. 이연우는 미인계 같은 게 통할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사무실에서 먹고 자는 인간. 자기 생존에만 관심 있는 인간. 취미도 없고, 약점도 없는 인간.

하지만 그들에게는 향수가 있었다. 사랑의 묘약. 냄새를 맡은 자를 지독한 사랑에 빠뜨리는 이상개체가.

전자세계의 유령도, 여자도 자신감을 가졌다. 제아무리 생존주의자여도 사랑 앞에서는 눈이 멀 수밖에 없다. 그게 이상개체로 만들어진 감정이어도 말이다.

전자세계의 유령이 흐뭇하게 웃었다.

“이연우만 우리 편이 되면 안심이지.”

***

시간이 지났다.

멸망주의자 중 스파이 역할을 하는 여자는 차를 타고 대기했다. 어느 아파트 주차장에서 노련하게 눈을 빛내며 사람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조사반 반장한테 먼저 접근하자.’

아무래도 이연우가 의뢰도 안 하고 사무실에만 틀어박혀 있다 보니, 반장을 징검다리 삼아 만날 생각이다.

예를 들어, 반장과 교통사고를 일으키고 미안하다며 커피나 먹을 것을 싸 들고 반장의 사무실에 찾아간다거나.

무턱대고 찾아가면 이연우가 수상함을 느끼고 경계할 테니까, 그럴듯한 명분이 필요했다.

‘이연우와 자연스럽게 만나는 순간 향수를 뿌리면 끝이야.’

여자가 보석으로 만들어진 병을 확인할 때였다.

이른 아침, 반장이 출근을 위해 나왔다. 하품을 크게 하며, 어슬렁어슬렁.

“염병. 출근하기 귀찮네.”

나왔다. 여자가 눈을 번쩍였다. 이제 반장이 차를 빼는 순간, 적당히 들이박으면 된다.

여자는 자동차에 시동을 걸었고, 인도 근처에 주차했던 반장은 슬슬 후진하며 차를 뺐다. 그 차가 완전히 빠지기 전에 여자는 재빠르게 액셀을 밟았다. 휙휙, 운전대를 꺾으면서.

자동차가 헤드라이트를 밝게 빛내며 달려들었다.

“염병.”

그리고, 반장의 반응은 신속했다.

찰나. 몇 초도 안 되는 순간.

드르륵, 기어를 후진에서 주행으로 바꾸고, 액셀을 꽉 밟는다. 여자가 차를 들이대는 것과 반장의 차가 인도를 향해 전진하는 것이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

그 결과는 단순했다.

꽝!

여자는 반장의 차가 아니라 그 옆의 차를 들이박았다. 애꿎은 차가 찌그러졌다.

반대로 반장의 차는 인도에 앞바퀴를 올린 채, 멀쩡한 모습을 뽐냈다. 그 짧은 시간에 충돌을 피한 것이다.

‘이걸 피했다고?’

여자는 당황했지만, 일단 차에서 내리며 머리를 숙였다. 윤기 있는 머리카락이 스르륵 흘러내리고, 맑은 목소리가 다급하게 나왔다.

“죄송해요! 차가 갑자기 급발진을 해서! 어디 다치지 않으셨어요?”

“….”

반장은 창문을 내리고는 창문 너머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리고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차 빼쇼. 출근해야 하니까.”

“그래도 혹시 후유증이라도-”

“내 차는 긁히지도 않았구만. 일단 당신 차부터 빼라니까.”

조사원다운 신속한 반응 덕분에 반장의 차는 멀쩡했다. 또한 반장은 이런 사고에 연연하며 시간을 끌 생각도 없었다.

‘일반인 같은데. 다친 것도 없고, 망가진 것도 없으니까 그냥 넘어가자고.’

반장이 창문 너머로 손을 휘적였다.

“나는 됐고. 그쪽이 박은 차나 신경 쓰쇼.”

여자는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 계획의 시작부터 틀어졌다. 역시 조사반의 반장이라고 할까.

‘반장을 통해 접근하는 방법은 포기. 괜히 여기서 더 들이댔다가는 망해.’

결국 여자는 입을 꾹 다물고 차를 빼 반장의 차가 빠져나갈 공간을 내주었다.

반장은 대수롭지 않게 운전하며 아파트 주차장을 떠났다. 새벽녘의 주차장에 홀로 남은 여자는 자기가 들이박은 자동차를 보다가, 액셀을 밟으며 휙 떠났다.

미리 세워둔 계획이 빠르게 떠올랐다.

‘유지유한테 접근할 수는 없어. 정보부의 유령이랑 고위 간부의 가족이잖아. 그 학생도 애매하고.’

결국 여자는 향수 병을 꽉 쥐었다. 정면 돌파가 최선이다. 마침 이연우의 카드 사용 기록도 있지 않나.

며칠에 한 번씩은 햄버거를 사 먹으러 나가는 인간이니, 잠깐 외출하는 그 기회를 노린다.

여자의 자동차가 조사반 사무실 근처로 달렸다. 이연우와 마주할 기회를 기다리기 위해.

***

시간이 지나는 동안 조사반 식구들은 감기에서 회복했다. 졸업을 앞둔 최재민은 고등학교 친구들끼리 어디로 놀러 갔고, 반장과 유지유는 사무실로 출근해 두런두런 잡담을 나누었다.

반장이 말했다.

“너희들도 차 사고 조심해라. 급발진하는 차가 가끔 있던데, 그런 차에 치이면 답이 없어.”

“맞아요. 언니도 교통사고가 제일 위험하다고 말하더라고요.”

유지유는 정보부의 유령인 언니를 떠올리며 답했고, 이연우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교통사고 정도는 뭐.’

빗물이 강화한 회복력이 있다. 무슨 고속도로에서 과속 트럭에 치이지 않는 이상 문제는 없었다. 그런 사고가 나도 주사위가 있고.

‘평범한 위험은 이제 어느 정도 괜찮지.’

물론 급소를 파괴당하는 사고는 위험하다. 고층 건물 아래를 지나가다가 떨어진 화분을 머리에 맞거나, 공사 현장 근처에서 건축 자재에 맞거나, 그런 것들.

‘어후. 위험해라.’

괜히 소름이 돋은 이연우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유지유는 그런 이연우를 이상한 눈으로 보다가, 다크서클이 내려온 눈을 비볐다.

“쉬다가 일하니까 싫네요….”

“일은 개뿔. 그냥 사무실에서 시간만 보내고 있으면서.”

“그건 그런데. 그래도 출근했잖아요. 그것 자체가 좀.”

그렇게 한창 대화하던 그들이 이연우를 보았다. 이연우는 출근과 퇴근이 의미 없는 회사원이었으니까. 아니, 사무실 바로 옆 방에서 숙식을 한다고?

좋은 점보다는 싫은 점이 더 많을 거 같은데?

“연우 씨, 괜찮아요? 아니, 다른 게 아니라. 살 만해요? 여기서?”

“안 그래도 집 구하려고 합니다. 괜찮은 걸 얻었거든요.”

이연우는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문서 한 장을 꺼냈다. 클럽의 부동산계약서였다.

순간, 반장이 몸을 일으켰다. 계약서를 보기 위해 다가왔다.

“이걸 어디서 얻었냐. 클럽에서 밖으로 유포하지 않는 건데.”

“의뢰금으로 받았습니다. 쉘터 하나 구해서 계약서까지 쓰면 안전하지 않겠습니까?”

한편 유지유는 눈을 깜빡였다. 저 계약서를 언젠가 본 거 같다. 정보부의 유령이 자랑하듯 가져왔던 거 같은데.

그쯤에서 이연우는 계약서를 반장에게 넘겨주며 일어났다.

“반장님, 구경하십시오. 저는 점심 먹고 오겠습니다.”

“구경은 무슨, 됐다. 그보다 점심은 같이 먹지, 왜?”

“저 햄버거 먹을 건데….”

반장이 손에 쥔 계약서를 팔랑이다가 이연우에게 돌려줬다. 햄버거는 좀.

“그래, 먹고 와라. 사고 조심하고.”

“예.”

그렇게 이연우는 조사반 건물을 떠나, 사람이 돌아다니는 거리로 들어섰다.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사람이 많다. 이연우는 괜히 자동차나 하늘을 주의하며 걸었다.

그리고, 여자를 보았다. 평범하게 생겼나? 흔한 외모 같긴 하다. 하지만 이연우는 시선을 떼지 못했다.

칙, 칙-

길을 걸으며 향수를 뿌린 여자. 바람이 불어오며 향이 다가왔다. 향은 이연우가 들이마시는 숨을 타고 폐 깊이 파고들었고, 즉각 효과를 발휘했다.

사랑의 묘약이다.

‘아.’

이연우는 사랑에 빠졌다. 첫눈에 반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손바닥에 땀이 맺혔다. 아드레날린이 쏟아졌다.

그 반응은 위기를 느꼈을 때의 그것과 같았고.

‘망했다!’

이연우는 사랑을 위기로 느꼈다. 흔들다리 효과가 반대로 적용되었다. 위험 상황에서 흥분하면 사랑과 비슷한 신체 반응이 일어나, 흥분과 사랑을 분간하지 못한다고 했던가.

위험을 하도 많이 겪은 이연우에게는 그게 이상하게 뒤틀렸다. 사랑의 신체 반응이 위험에 빠져 생존본능이 발악하는 결과로 해석되었다.

이연우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몸을 홱 돌렸다. 배고픔이나 햄버거도 잊고, 조사반 사무실로 내달렸다.

쿵쾅거리는 심장이 심상치 않다.

‘이 정도면 거의 이상기후 급인데? 멸망 시나리오 진행되는 거잖아!’

한시라도 빨리 마크 정과 연락하고, 본사의 정보를 들어야 한다.

그렇게 이연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쌩 달렸고, 거리에 남은 여자는 멀어지는 이연우를 황당한 표정으로 보았다.

“도망친다고? 왜?”

사랑의 묘약이 고장 난 건 아니었다. 길거리를 걷던 사람들이 향을 맡고는 사랑에 빠져, 넋이 나간 표정을 지으며 여자에게 다가왔으니까.

핸드폰을 꺼내며 번호를 요청하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여자가 거칠게 걸어갔다.

‘저항할 시간도 없었는데? 이유가 뭐지? 내가 수상해 보였나? 아닌데? 이대로 포기해야 하나? 아냐, 아직 방법은 남았어.’

여자는 후일을 기약하며 한발 물러섰다.

한편 이연우는 허겁지겁 사무실로 돌아와 바쁘게 움직였다. 한 손으로는 마크 정에게 전화를 걸고, 다른 손으로는 회사 인트라넷을 뒤지고.

반장과 유지유가 점심을 먹으러 떠나 텅 빈 사무실. 이연우가 통화하는 소리가 울렸다.

“예, 접니다! 혹시 멸망 시나리오 진행되고 있습니까? 아뇨. 그냥 갑자기 불안해서. 없다고요? 확실합니까? 아, 확실하군요. 아니, 아닙니다.”

의아함의 섞인 마크 정의 목소리에, 이연우는 조금 안도하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는 천장을 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느릿하게 손을 움직여 심장 어림에 얹었다. 아직도 쿵쾅거리는 심장 박동이 선명하게 느껴진다.

“그럼 뭐지? 위험이 찾아오나?”

목숨이 위급한 상황에서나 느끼는 흥분. 이연우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에코백을 점검했다.

아무래도 이연우 개인에게 미지의 위협이 다가온 모양이다. 그 대비를 할 시간이다.

거리에서 마주한 여자는 잔상조차 남기지 않았다. 생존욕구가 이연우의 머리를 가득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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