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반장과 유지유는 점심 식사를 마치고 느긋하게 사무실로 돌아왔다. 손에는 카페에서 사 온 커피 몇 개가 흔들렸다. 반장 손에 하나, 유지유 손에 둘.
유지유가 사무실로 들어오며 커피 한 잔을 들어 올렸다.
“연우 씨, 커피 마셔-. 뭐해요?”
유지유가 문가에서 우두커니 멈췄다. 반장도 어슬렁어슬렁 따라 들어오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무실이 엉망이었다. 권총이나 시간을 사는 지폐는 물론이고 온갖 공구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심지어 휘발유 냄새도 났다.
그 중심에는 이연우가 있었는데, 그는 심각한 표정을 지은 채 장비를 준비했다.
권총을 장전하고, 탄창을 확인하고, 시간을 사는 지폐를 휘발유로 적시고.
“식사 맛있게 하셨습니까?”
“어. 밥은 맛있게 먹었는데. 뭐하냐?”
반장은 이연우의 장비를 슥 훑어보았다. 그냥 평범한 공구들.
그쯤에서 이연우가 문서 한 장을 주섬주섬 주워, 반장에게 건넸다.
“부동산계약서입니다. 일단 이 건물 명의는 반장님 앞으로 되어 있지 않습니까. 이걸로 건물주의 권리를 얻으십시오.”
땅의 주인으로서 강제력을 행사하는 부동산계약서. 클럽의 핵심 이상개체를 받아 든 반장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이거 너한테 한 장밖에 없지 않나? 그걸 나한테 준다고?”
선물이라고 무턱대고 받기에는 지나치게 과분하다.
하지만 이연우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뭘 아낄 상황이 아닌 것 같았으니까.
가슴 위로 손을 올리니, 아직도 심장이 쿵쿵 뛰었다. 방금 전 거리를 걸으며 느꼈던 위험이 계속해서 머리를 맴돌았다.
“뭔가 위험한 직감이 듭니다. 만반의 대비를 해야 합니다.”
“켁, 콜록. 위, 위험하다고요?”
유지유는 빨대로 커피를 쭉 빨아 먹다가 사레가 들렸다. 몸을 웅크리고 기침하면서도, 떨리는 눈으로 이연우를 보았다.
이연우는 세상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예. 멸망 시나리오 같은 건 아닌 느낌인데. 저한테 위험이 찾아올 느낌입니다. 그러면 이 건물도 공격받을 테니, 계약서는 차라리 지금 쓰는 편이 낫습니다.”
반장과 유지유도 상황의 심각함을 깨달았다. 그들은 두말하지 않고 미지의 위험을 대비하기 시작했다.
이연우가 저렇게 반응할 정도면 보통 위험한 게 아니다. 위험한 이상개체나 멸망주의자의 잔당이 전력으로 습격하는 수준이겠지.
반장은 상부와 연락하며 계약서를 갱신했고, 유지유는 온갖 아이디어를 쏟았다. 위험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눌 아이디어를.
“연우 씨, 특수조사원이잖아요. 본사 쪽에 연락해서 경호대대? 그런 인력을 요청하는 건 어때요?”
“아. 연락해보겠습니다.”
확실히 위험은 나누면 절반이다.
어차피 자신을 공격하는 것들은 회사의 적이기도 할 테니, 회사가 도울 의무가 있다.
거미줄같이 복잡한 케이블을 이리저리 만지면서 공구를 충전하던 이연우가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유지유는 그걸 말렸다.
“잠깐, 말 좀 더 들어보세요. 인력만 요청할 게 아니라, 장소까지 빌려요.”
아예 전장을 준비하는 수준으로 대비할 수도 있다. 특전대가 원거리 타격을 대기할 수도 있고, 매복할 수도 있고, 함정을 깔아둔 건물을 준비할 수도 있다.
반장도 동의했다. 볼펜을 끄적이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게 맞다. 솔직하게 조사원 셋이서 뭘 하겠냐. 네 직감만 확실하면, 정보부나 특전대랑 연계하는 게 나아.”
아무리 땅문서가 있어도, 회사가 전력으로 대비하는 것만 못하다.
“직감….”
이연우가 멈칫했다. 전문 병력을 요청할 근거로 충분할까? 단순하게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고 전투원을 보내줄까?
‘…보내줘야지.’
자신이 평범한 회사원은 아닌데. 정 안 되면 아이가 떼쓰듯 배 째라고 구르면서 억지를 부리면 된다.
그만큼 이연우는 위기감을 느꼈다. 그때 느낀 감각은 그만한 위험이었다.
심장이 전력으로 달음박질치고, 아드레날린이 쏟아지던 감각. 시야가 좁아지고, 손끝이 떨리던 그 감각.
이연우가 결연하게 핸드폰을 고쳐 잡았다.
“어떻게든 지원을 받아내겠-”
그때였다.
콰앙-!
건물 바깥에서 폭발음이 들려온다. 한 번이 아니었다. 곳곳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조사원들이 일제히 창밖을 내다보았다. 거리 곳곳에 굉음과 폭발이 일어났다. 거기에 괴한들이 총을 들고 난사하다시피 총탄을 흩뿌렸다.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는 민간인.
공격이었다.
***
이연우가 위기감을 느꼈지만, 조직이 망하기 직전인 멸망주의자도 그 못지않게 위기감을 느꼈다.
시간을 천천히 끌며 작업하지 못할 정도로.
한발 물러선 여자는 곧장 전자세계의 유령을 불렀다.
“개인적으로 접근하기는 힘들어요. 시간이 많이 필요할 거예요.”
“기다릴 시간이 없는데.”
핸드폰 화면에서 튀어나온 전자세계의 유령이 초조하게 중얼거리자, 여자는 머리끝을 비비 꼬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온갖 집단이 멸망주의자를 멸망시키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한시라도 빨리 이연우 같은 전력을 끌어들여야 했다.
여자도 상황을 알았고, 슬쩍 전자세계의 유령을 보았다. 전자세계의 유령은 고민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거기에 여자가 말했다.
“조금 작위적이지만, 이벤트를 진행해볼까요?”
“무슨 이벤트?”
여자가 품에서 총기를 꺼냈다. 그리고는 자기 머리를 겨누며 희미하게 웃었다.
“위험 속에서 사랑이 꽃피지 않겠어요? 남은 멸망주의자 써서 습격해주세요.”
연출된 테러 속에서 이연우에게 자연스럽게 접근한다.
이미 이연우의 성격은 분석되었고, 여자의 머릿속에는 시나리오 한 편이 그려졌다. 최대한 이연우의 호의를 산 후, 향수를 사용하는 시나리오.
“그 사람은 생존주의자잖아요. 같은 위기를 겪고, 그 위기에서 그를 돕고, 그의 생존에 짐이 되지 않는다는 인상을 심어주면, 향수도 제대로 통할 걸요?”
단순하게 향수를 뿌린 것만으로는 부족하니, 향수의 힘을 극대화하기 위해 준비한 시나리오였다.
전자세계의 유령은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런 쪽은 정말 잘 몰랐다.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러려니 하는 표정을 지으며 멸망주의자 수십 명에게 호출 신호를 보냈다. 그들은 이상개체를 이용해 곧바로 이곳으로 넘어올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남은 정예 멸망주의자야. 잠깐 네 밑으로 보낼게.”
본래라면 수평적인 관계로 따로따로 놀던 멸망주의자도 집단의 소멸을 앞에 두자 하나로 똘똘 뭉쳤다.
10분이 채 안 되는 시간.
우두머리급 멸망주의자인 전자세계의 유령이 사람을 준비하고, 여자는 시나리오를 머릿속에서 재생했다.
여자는 속으로 시나리오에 작전명을 붙였다.
‘이번 작전은 흔들다리라고 하자. 위험이 도화선이 될 거야. 향수는 불씨가 되고.’
***
도로에 난리가 났다.
복면을 뒤집어쓴 강도, 총기로 무장한 테러리스트, 연쇄살인마, 지명수배자 따위가 한 몸처럼 움직였다.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를 연달아 터트려 교통을 막았다. 또한 EMP가 터져 일대의 통신망이 먹통이 되었다. 누군가는 건물이며 가스 배관에 불을 붙였다.
조직적인 공격이다. 숙련된 멸망주의자의 집단 공격이다.
“죽이지 마! 어차피 무장 없는 민간인이야! 부상만 입혀! 살려둬야 의료 체계에 부하를 걸고 공포를 퍼트린다고!”
“바이러스 없나? 정신 조작이나? 없어?”
“어린애들이 안 보이는데. 인질로 과시하기 딱 좋은 게 어린아이들인데.”
작정하고 공격에 나선 멸망주의자가 지독한 공포를 퍼트렸다. 거창한 이상개체는 필요 없었다. 기본 무장만으로도 충분했다.
평온했던 거리가 아수라장이 되었다. 비명, 화약 냄새, 신음, 피 냄새.
숨어만 살다가 오랜만에 나온 멸망주의자가 눈을 희번득거리며 중얼거렸다.
“이거지. 이게 우리지. 내일 죽더라도 오늘은 하나라도 더 죽여야지.”
이게 멸망주의자다. 이상세계의 거의 모든 집단이 제거하려는 적. 세상의 멸망을 바라고, 인간의 몰살을 원하는 광인. 선을 넘어 미친 짓을 일삼는 자들.
그쯤에서 어떤 멸망주의자가 외쳤다.
“목적은 잊지 않았지? 빨리 움직여!”
광기로 눈을 번쩍이는 자들이 천천히 움직였다. 사냥꾼이 사냥감을 몰듯, 어부의 그물이 물고기를 사로잡듯, 사람들을 어느 건물로 몰았다.
이상조사반의 건물로.
조사반의 세 명은 창가에 나란히 서서 창밖을 보았다.
비명을 지르고, 피를 흘리고, 다리를 절뚝이는 자들이 공포에 질린 낯빛을 하고는 경황없이 달렸다.
“멸망주의자 새끼들.”
반장이 주먹을 꽉 쥐었다. 누가 봐도 멸망주의자의 소행이다. 한국에서 저런 조직적인 테러라니.
유지유는 어두운 안색을 하고는 침울하게 중얼거렸다.
“지렁이….”
지렁이 교단에서 보았던 피해자들. 지렁이의 환각에 속아 스스로 팔다리를 자른 자들의 형상이 겹쳤다.
이상세계 앞에서 무고한 피해를 당하는 자들.
눈앞에서 펼쳐지는 전장은 유지유에게 상당한 스트레스를 줬다. 복잡한 감정과 강도 높은 압박감. 이런저런 생각이 둥실둥실 떠다녔다.
정보부의 유령인 언니가 여기 있었다면 좋을 텐데, 뭐라도 해야 하는데, 나도 위험한데.
결국 유지유가 우울하게 읊조렸다.
“지렁이가 되고 싶네요. 그때는 이런 생각 따위는 안 했는데.”
“그만. 쓸모없는 생각은 하지 마라. 다 저 새끼들 잘못인데, 우리가 죄책감 느낄 필요는 없어. 그보다는 사람 구할 생각부터 해.”
반장이 이를 까득 악물었다.
조사원이기 전에 회사원이다. 자신의 생존보다 중요한 가치가 있었다. 인류를 보호하라. 오직 그 가치 하나만을 위해 조사원으로 20년 넘게 살았다.
반장은 손이 닿는 한도 내에서 사람을 구하기로 했다. 냉정하게 판단했다.
“사람들 우리 건물로 유도하자. 마침 계약서 있으니까, 멸망주의자는 충분히 막을 수 있어. 응급치료도 가능하고.”
유지유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확성기를 찾았다. 반장이 대충 가져다 놓은 공구 더미 안에 있었다.
유지유가 창가 아래에서 확성기만 창문 쪽으로 내밀었다. 도망치는 사람을 이쪽으로 안내하기 위해서.
그쯤에서 반장이 이연우를 찾았다.
“연우야. 주사위든 지폐든 써서 시간 벌 수 있냐? 격멸대대 지금 호출할 건데, 걔네 올 시간만-”
조사반 반장으로서 격멸대대 호출 버튼을 가진 반장은 버튼을 찾다가, 문득 말을 멈췄다.
이연우의 상태가 이상했다. 총성과 폭발음이 난무하는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머리를 저격당할지도 모르는데 무방비하게.
심지어 눈도 탁하게 풀렸다. 잔뜩 확장된 눈동자가 창 너머의 도로를 보았다.
반장이 힐긋 보니 웬 여자 하나가 허겁지겁 차도를 가로질러 달려오고 있었다.
‘…저번에 차 사고 냈던 여자인데? 연우가 왜 이러지?’
이연우가 입술을 떨며 중얼거렸다.
“사, 사, 사.”
예전에 중독됐던 사랑의 묘약이 여전히 효과를 발휘했다. 세상이 좁아졌다. 오직 그 여자만을 보았다. 심장이 가슴을 뚫고 나올 기세로 뛰었다. 아드레날린이 폭포가 되어 쏟아졌다.
이연우는 이제 알았다. 저 여자다. 저 여자가 이 감각의 원인이다. 위험의 근원이다. 그러니까.
“사살!”
죽인다.
찰나. 이연우가 악을 쓰며 고속으로 움직였다. 한 손에는 권총이 쥐어졌다. 다른 손으로는 탁, 라이터로 지폐에 불을 붙였다.
도화선에 불이 붙었다.
휘발유에 젖은 시간을 사는 지폐 더미가 순식간에 타올랐다.
태운 지폐의 가치에 따라, 사람의 몸값에 따라, 그만한 노동이 순식간에 이뤄지는 지폐. 한순간, 이연우의 주변으로 빈탄창이 우르르 떨어졌다. 사살이란 노동이 이루어졌다.
360도 돌아버린 사고회로가 정확한 판단을 내려, 음모자를 사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