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조사반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반장과 유지유는 입을 헤 벌리고 멍하니 이연우를 보았다. 창밖의 온갖 소음도 들리지 않는 듯했다. 오직 두루뭉술한 충격만이 머리를 채웠다.
‘저 여자 민간인 같은데. 민간인을 쏴 죽여?’
반장과 유지유가 무심코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자가 피를 흥건히 흘리며 바닥에 누워 있다. 저 멸망주의자조차 목적을 위해 민간인에게 상처만 입히고 있었는데, 저 여자는 벌집처럼 구멍이 숭숭 뚫린 채 죽었다.
여자가 보물처럼 꼭 쥐고 있던 향수 병이 데구르르 바닥을 구르는 모습이 안쓰럽다.
“어, 어.”
“아.”
그쯤에서 정신을 조금 회복한 반장과 유지유가 뒷걸음질을 쳤다.
이연우가 돌아버린 줄 알고. 멸망주의자가 괴상한 이상개체로 정신을 조작한 줄 알고.
‘멸망주의자보다 이놈이 더 무서운데.’
반장이 침을 꿀꺽 삼키며 땅 문서를 들었다. 그 손이 사정없이 떨려, 문서 또한 푸르르 흔들렸다.
유지유는 형광조끼 보관함으로 슬금슬금 움직이며 이연우를 주의 깊게 살폈다. 기이한 긴장이 은근하게 내려앉은 사무실.
이연우는 숨을 몰아쉬며 눈을 깜빡였다.
‘아. 돌아왔다.’
심장을 뛰게 만든 여자가 죽었다. 머리를 채우던 강렬한 감정이 증발했다. 마치 귀신에 씐 듯했던 정신과 몸이 멀쩡하게 회복했다.
지독하게 격동적이었던 감정, 그 비이성적인 감정이 밀려나며 차가운 정신이 감정을 대신했다.
이연우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권총을 고쳐잡았다. 그리고는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뭔가 이상했다.
‘…저 사람이 위험이라고?’
이만한 위기감을 안겨준 위험치고는 너무 쉽게 처리된 거 같은데?
이연우의 표정이 다시 굳었다. 그는 여자의 시체를 내려보며 총을 겨눴다. 혹시 살아날 수도 있으니까. 그동안의 경험에 따르면 안심할 수 없다.
‘주사위를 써야 할지도 몰라.’
그쯤에서 반장이 입을 열었다.
“어, 연우야. 그 총 내려놓고 나 좀 봐라.”
“예?”
이연우가 고개를 돌렸다. 반장은 이연우의 눈을 유심히 관찰하며 말했다.
“그, 민간인은 왜 죽였니?”
“민간인 아닙니다. 위기감을 느끼게 만든 인간입니다. 아마 멸망주의자 같습니다. 점심에도 저한테 접근했었거든요.”
어쨌든 위기 상황이라 생존본능이 깨어난 상태고, 이연우의 머리는 쌩쌩 돌아갔다.
위기감을 불러일으킨 여자와 때마침 일어난 멸망주의자의 테러. 당연히 연관이 있지 않을까? 어쩌면 저 여자는 우두머리급 멸망주의자일지도 몰랐다.
반장은 우물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여차하면 이연우를 내쫓기 위해 땅문서를 꽉 쥐고 있던 손에서 힘이 풀렸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미심쩍었지만, 저 여자도 수상했다. 교통사고를 내지 않나, 이연우한테 접근하지 않나. 거기에 저 아수라장 속에서 조사반 건물을 향해 일직선으로 다가왔다.
"행동거지가 의심스럽긴 했지."
반장이 긴장을 놓자, 유지유는 눈치를 살피다가 다시 확성기를 들었다.
“민간인들 대피시킬까요?”
“어, 빨리 하자.”
어쨌든 이연우가 멀쩡하면 됐다. 저런 멸망주의자 무리보다 더 큰 사고를 일으킬 능력이 있는 놈이 돌아버리지만 않았으면 괜찮다.
유지유는 확성기를 켰지만, EMP 탓인지 관리를 안 한 탓인지 확성기는 잠잠했다. 결국 유지유는 도구 없이 빼액 소리를 질렀다.
“이 건물로 대피하세요!”
또한 반장은 격멸대대 호출 버튼을 꾹 눌렀다. 특별 사양인 버튼은 EMP 앞에서도 멀쩡했다.
“됐다. 이제 버티면 된다.”
“….”
한편 이연우는 창가 멀리 도망친 후, 턱을 매만졌다.
‘저건 그렇게 위험한 느낌은 아닌데.’
바깥에서 멸망주의자들이 난장판을 만들고 있지만, 반장은 땅문서를 가졌고, 자신은 시간을 사는 지폐를 잔뜩 지니고 있었다. 격멸대대가 올 시간은 충분히 벌 수 있었다.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문제는 저 여자야. 정말 죽었나?’
찝찝하다. 그가 느꼈던 위기의 강도와 해결의 난이도가 어울리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맞나 싶다.
이상한 위화감. 진지하게 고민하던 이연우가 결국 지폐 더미를 쥐었다.
“안전이 제일이지.”
작게 중얼거리며 시간을 사는 지폐에 불을 붙인다.
반장과 유지유는 예민하게 반응했다. 고개를 훽 돌려 이연우를 보았다.
하지만 지폐가 전부 타도 딱히 변한 것은 없었다. 사무실은 물론이고, 이연우조차 이전과 같았다.
의심스러운 눈초리들 앞에서 이연우가 개운하게 웃었다.
“돕겠습니다.”
찜찜한 문제를 해결했다. 이연우는 반장처럼 손이 닿는 한도 내에서 사람들을 돕기로 했다. 안전이 확보된 상황에서, 위험하지 않은 수준에서.
반장이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확실히 이 사무실에서는 변한 게 없다.
“그 지폐로 뭐 했어?”
“그 여자 시체 멀리 옮겨서 묻어줬습니다. 아무래도 우두머리급 멸망주의자 같은데, 근처에 두면 위험하지 않습니까.”
시체가 부활할 수도 있고, 어쩌면 애초에 시체가 아닐 수도 있고, 그 몸이 폭탄처럼 터질 수도 있고, 무슨 괴물이 위장을 찢고 나올 수도 있고.
정보가 없으니 이연우는 상상의 나래를 활짝 펼쳤다. 이상한 세상에서는 뭐든 가능했으니까.
반장 또한 그 의견에 동의했다.
“잘했다. 그보다 어떻게 도울 거냐? 바깥에 나가기는 지나치게 위험해. 건물에서 농성하면서 민간인들 대피하는 거 받는 게 가장 낫다.”
반장은 사람을 더 살릴 수 있는 판단을 내렸다.
나가서 멸망주의자와 대적하는 것보다는 이게 더 많은 목숨을 구한다. 응급처치만 제때 해도 좋다.
하지만 이연우는 웃을 뿐이었다.
“제가 사람들 납치해오겠습니다.”
“어?”
“사람들이 이곳까지 찾아오기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멱살 잡고 끌고 오죠.”
이연우가 시간을 사는 지폐를 들었다. 납치라는 노동에 쓰일 시간을 산다. 그야말로 안전하고 신속하게 사람을 구할 방법이다.
물론 그랬다가는 가진 지폐를 다 쓸지도 몰랐지만, 이연우는 개의치 않았다.
‘클럽에서 또 받으면 되지. 나랑 친분 쌓겠다는 클럽인데 거절하겠어?’
반장은 멍하니 있다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맞네? 맞긴 한데.’
반장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건 납치가 아니라 구조 아니냐. 왜 말을….”
단어 선택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데? 아닌가? 갑자기 끌려오는 거니까 납치인가?
반장이 혼란에 빠지는 그쯤에서 유지유가 눈을 빛냈다. 목 아프게 외칠 필요 없다면 다른 일을 하면 된다. 보다 직접적으로 사람을 구하는 일.
“저는 구급 키트랑 기억소거제 준비할게요.”
“제 에코백에 붕대랑 거즈랑 상처 소독제 넉넉하게 있으니까 그것도 쓰십시오. 반장님은 땅문서로 방어할 준비를 해주십시오.”
“오냐.”
그렇게 세 명은 한 몸처럼 사람을 구하기 위해 움직였다.
***
멸망주의자들은 슬금슬금 조사반 건물 근처로 모여들었다. 그들도 작전을 안다. 스파이를 그 건물로 자연스럽게 침투시키기 위해 사람들을 내몰 것.
어떤 멸망주의자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시간 충분히 준 거 같은데? 이제 돌아갈 준비 하자고.”
“몇 놈 안 보여.”
“눈 돌아가서 딴짓하고 있겠지. 버려.”
멸망주의자로서 오래 살아남으려면 시간은 칼같이 지켜야 하는 법.
그들은 분주히 후퇴를 준비했다. 포탈이 열릴 시간을 기다리며, 괜히 근처 약국으로 들어가 의약품을 빼앗거나 상처를 입고 쓰러진 사람에게 칼을 빼 들고 다가가거나.
멸망주의자가 킥킥 웃으며 마체테를 질질 끌었다. 녹슨 마체테가 아스팔트 도로를 긁으며 점점 가까워졌다.
허벅지에 총상을 입고 쓰러진 사람이 입을 뻐끔거렸다. 지나친 공포에 말이 나오지 않았다.
“죽을 시간이야.”
“으, 아-”
쐐액-
마체테가 허공을 갈랐다.
“…응?”
말 그대로 허공을 지나쳤다. 분명히 사람을 향해 내리쳤는데, 사람이 휙 사라졌다. 순간이동처럼.
근처에 모인 멸망주의자들의 얼굴이 굳었다.
“벌써 왔다고?”
“회사야? 클럽이야? 예술가야? 악마야? 마법사야? 누구야?”
적이 하도 많으니까, 그 정체를 짐작하기 힘들다. 정상급 집단이라면 공간 정도는 다룰 수 있어서 더.
무엇보다 한가하게 추리할 시간이 없었다.
다음 순간, 그들 중 하나가 사라졌다. 공간 이동에 당해 끌려간 것이다.
멸망주의자들이 나지막이 욕설을 내뱉었다.
“이놈들이 이렇게 빨리 반응할 리가 없는데. 일단 빨리 흩어져!”
“도망-”
그리고 잠시 후.
마체테를 든 멸망주의자가 공간 이동에 당했다. 정확히는, 이연우에게 납치되었다.
순식간에 바뀐 공간.
마체테를 고쳐 잡으며 멸망주의자가 눈을 크게 떴다. 시야를 넓게 두며 환경부터 파악하려는 것이다. 곧, 그는 눈을 깜빡였다.
‘여긴. 멸망주의자의 소굴인가? 다른 멸망주의자가 우리의 도주를 도운 건가?’
사람들의 시체가 잔뜩 널려 있었다. 아무렇게나 벽에 기대어 눕히고, 땅바닥에 대충 던져둔 시체들. 그 수많은 시체에서는 피 냄새가 잔뜩 풍겼고. 흐릿한 신음 또한 들려왔다.
“시체가 아니잖아?”
멸망주의자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다 환자들이다. 왜 다 같이 자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응급치료의 흔적이 보이는 게 멸망주의자의 소행은 아니다.
그때였다. 뒤에서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연우야. 민간인 데려와야지, 이딴 놈들을 계속 끌고 오면 어쩌냐.”
“그게, 지폐가 단순노동은 잘 되는데. 조금 복잡해지니까 잘 안되네요.”
멸망주의자가 튀어 오르며 몸을 휙 돌렸다. 그는 그제야 세 명의 사람을 보았다.
중년 남자, 젊은 남자, 젊은 여자. 그들이 두른 분위기는….
“너희는 뭐냐?”
중년 남자는 회사원 같은 사명감이 느껴지고, 젊은 여자는 성격 나쁜 악마한테 시달린 악마숭배자처럼 우울한 기색이고.
젊은 남자는 예술가나 악마나 멸망주의자처럼 정신이 이상한 느낌이다.
'이게 무슨 조합이야. 아니. 잠깐만. 이 남자....'
얼굴이 익숙하다. 누가 보여준 것 같다. 열심히 기억을 떠올리던 멸망주의자의 동공이 문득 확장되었다. 입이 쩍 벌어지며 절규 같은 소리가 터졌다.
"이연우! 도대체 우리가 너한테 뭘 잘못했다고 이렇게 괴롭히는 거냐!"
"...예?"
"지우개 든 대장이 널 공격했다고 이러나? 그 대장은 네가 죽였으니까 원한은 거기서 끝내야지! 왜 우리 전부한테-!"
고함이 고막을 강하게 때린다. 이연우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고, 반장과 유지유는 이연우를 슬쩍 살폈다.
반장이 어렵게 말했다.
"연우가, 음, 명성이 있네."
"연우 씨 보는 멸망주의자마다 다 저러네."
"아니, 아니."
이미 앞서 실수로 데려온 멸망주의자를 상대하면서 똑같이 들었던 소리다.
이연우는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변명하듯 반장과 유지유에게 말했다.
"아니, 전 딱히 뭐 안 했습니다. 진짜 살려고 발버둥 친 게 끝인데. 다 사고였는데."
"개, 개, 개!"
말도 제대로 안 나온다. 멸망주의자는 억울해서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이념이 어떻든 조직을 박살 낸 놈이 저런 소리를 해?
이연우는 자신이 가해자가 된 느낌에 불편한 표정을 짓다가, 새삼 상황을 깨달았다. 눈앞에 있는 것은 멸망주의자다. 그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멸망주의자는 멸망하는 게 맞는데?"
지구를 파괴하고 사람을 죽이려는 집단은 없는 게 좋은데?
그 당연한 진리를 내뱉자, 순간 멸망주의자의 이마에 핏대가 솟는가 싶더니 그대로 눈을 까뒤집으며 뒤로 쓰러졌다. 기절한 것이다.
"땅문서는 안 써도 되겠구만."
반장이 발끝으로 멸망주의자를 툭툭 밀었다. 한 명 한 명 따로 끌려와 각개격파 당한 멸망주의자 몇이 구석에 모였다. 하나 같이 얼굴 색이 이상하거나 게거품 같은 것이 묻어 있다.
유지유가 중얼거렸다.
“멸망주의자는 머리가 이상한 사람들인가 봐요. 자기들은 그렇게 살고 싶어 하면서, 남들을 죽이고. 이해할 수가 없네.”
"그건 다 똑같다. 예술가는 예술하겠다고, 클럽은 돈 벌겠다고, 회사는 보호하겠다고. 됐다. 연우야, 건물에 자리 많다. 사람 더 구하자."
이연우는 말없이 다시 한번 지폐를 태워 사람을 끌고 왔다.
이번에는 민간인이 잡혀왔다. 피를 많이 흘려 창백한 얼굴을 한 민간인은 몽롱한 표정을 지었다.
“꿈인가?”
“잠자고 일어나면 다 끝났을 거요. 그러니까 푹 자라고.”
건물주의 강제력이 민간인을 잠에 빠뜨렸다.
유지유가 재빠르게 움직였다. 탈취제 통에 담은 기억소거제를 민간인의 입 안에 칙칙 두 번 뿌리고, 가위로 옷을 잘라 상처를 드러내고, 붕대나 거즈 따위를 쓰고.
서서히 테러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