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류보호회사 (157)화 (157/194)

사랑

꽉 막힌 도로와 EMP에 망가진 전자기기. 거기에 곳곳에서 일어난 화재와 인도에 쓰러져 있는 부상자들.

경찰차와 소방차와 구급차가 신속하게 진입하기에는 그것들 전부가 장애물이었다.

그렇기에 멸망주의자는 기동타격대나 군부대 혹은 이상집단의 대응이 도착할 시간을 계산했고, 그 시간이 되기 전에 도망쳤다.

우웅-

푸른 문이 열렸다.

“됐다! 빨리 도망쳐!”

공포에 질린 표정을 지은 멸망주의자들이 곳곳에서 튀어나왔다. 그 수가 몇 안 됐다.

전부 납치됐다. 1명씩 공간이동 같은 것에 당해 끌려갔다. 누구도 돌아오지 못했고, 납치는 멈추지 않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적의 정체를 알 수 없는 공격. 방어도 반격도 어렵다.

우다다 달려가는 멸망주의자의 얼굴에 포탈의 푸른 빛이 드리워졌다. 동공에 맺힌 푸른 빛이 희망의 빛처럼 번쩍였다.

“됐-”

그리고, 사라졌다. 포탈을 넘어가기 직전, 이연우에게 납치됐다.

남은 멸망주의자가 안도했다.

“저놈 끌려갔으니까 우리는 무사히 도망칠 수 있겠네.”

“그럼 뭐하냐고. 지금 우리 셋밖에 안 남았는데.”

복면을 쓴 강도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하나하나 끌려가다 보니까 어느새 셋만 남았다. 손해가 훨씬 컸다.

결국 남은 멸망주의자가 작게 중얼거리면서 포탈을 넘어갔다.

“작전이라도 성공하길 바라야지.”

저기가 무슨 건물인지는 몰라도, 이렇게까지 스파이를 침투시키려는 것 보니까 상황을 뒤바꿀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예를 들어 지구 폭발 버튼 같은 거.

그렇게 세 명의 멸망주의자는 포탈을 넘어갔고, 정신없이 서성이던 전자세계의 유령을 보았다.

“EMP 때문에 현장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전자세계의 유령이 퍼뜩 고개를 돌렸다.

“왔어? …뭐야? 왜 너희만 돌아와?”

화약 냄새를 두른 멸망주의자들은 패잔병 같은 기색이었는데, 퉁명스럽게 말했다.

“누군지 모르겠는 놈이 공격해서….”

“출동한 놈들 없는데?”

전자세계의 유령은 무슨 말을 하냐며 고개를 기울였다. 여러 집단의 통신만을 전부 해킹해서, 그들이 움직이는 것을 감시하고 있었다.

테러를 확인하고 분주히 움직이긴 했지만, 현장에 도착한 전력은 없었다.

잠깐 고민하던 결국 전자세계의 유령은 실패를 직감했다.

“이연우…. 스파이가 실패했구나.”

조사반 사무실 근처에서 그딴 짓을 저지를 사람은 이연우밖에 없다. 그리고 그 뜻은 사랑에 빠지지 않았다는 뜻이고.

한편 멸망주의자들은 대충 흙바닥에 주저앉아 천천히 긴장을 풀었다. 흥분과 공포가 서서히 가라앉는다. 그러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흘려듣지 못할 말이 들렸으니까.

“이연우? 거기 이연우가 있었어?”

“어…. 이연우가 사는 건물이었는데. 말 안 했나?”

“아니, 미친.”

순간 가라앉던 흥분이 폭발했다. 그들은 일제히 총기를 꺼내 들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 하는 건데! 대장도 죽인 놈한테 우리를 왜 보내! 숙청이냐?”

“아니, 포섭하려고 작전한 건데? 그리고 너희를 왜 숙청해? 안 그래도 사람 없는데.”

“돌았어? 말이 되는 작전을 해야지!”

진짜 말이 안 된다. 걸어 다니는 멸망을 포섭해?

그나마 머리가 잘 돌아가는 멸망주의자가 바락바락 악을 썼다.

“포섭하면 어쩌려고? 포섭하면 감당할 수는 있고? 저 회사도 이연우 때문에 개 같이 고생하는데? 네가 주의하라며 보여준 자료를 넌 안 읽었냐고!”

클럽의 VIP 명단이나 블랙리스트처럼 멸망주의자가 주의할 사람 명단에 이연우가 올라갔고, 전자세계의 유령이 빼돌린 정보도 공개되었다.

위성병기만 두 번 사용되었고, 쉘터 하나가 날아갔고, 부서도 날아갔고, 최근에는 무슨 꿈 악귀를 만들었다고 하지 않나.

그 뒷수습을 하느라 회사가 투입하는 자원은 어지간한 부서 몇 개 예산은 되었다.

“가만히 두면 회사 힘 깎아 먹는 인간을 왜 건드리는 건데, 도대체!”

“….”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전자세계의 유령은 눈을 깜빡이며 그 멸망주의자를 보았다. 계속해서 불평을 쏟아내는 멸망주의자.

“그놈을 써먹으려면 차라리 주변에 이상개체를 던져! 다른 놈들을 그쪽으로 유인하거나! 그러면 알아서 다 망가트리겠지.”

전자세계의 유령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 멸망주의자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리고는 말했다.

“너, 합격! 너는 이제부터 우리 머리야!”

가진 무력은 하잘것없지만 머리가 제법 잘 돌아간다. 안경을 대신해 참모 역할을 해도 괜찮겠다.

멸망주의자의 표정이 이상해지는 그때, 문득 전자세계의 유령 또한 표정이 일그러졌다.

전자세계에서 소식이 포착되었다.

검은 연기를 뿜던 흡연자의 소식이다.

- 난 죽는다. 잘 있어라.

전자세계의 유령이 황급하게 온갖 통신망을 해킹해서 상황을 확인했다.

CCTV나 핸드폰 따위를 통해 정보가 흘러들어왔다. 흡연자의 최후.

“녹색협회….”

이 순간에도 멈추지 않는 공격이 흡연자에게 닿았다. 녹색교단의 교주한테 잡혀, 그대로 정화되고 남은 몸은 비료가 되었다.

- 나무가 되어 세상에 이바지하렴. 평소에 독가스를 뿜던 네가 나무가 되어 공기를 정화하는 거란다.

멸망주의자의 멸망이 다가왔다. 아니, 이미 멸망이나 다름없다. 이제는 집단이라고 하기에도 부족할 정도로 망가졌으니까.

하지만 전자세계의 유령은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한 명이라도 남아있으면 돼.’

재기는 언제든지 가능하다. 멸망은 광기니까. 세상이 망하길 바라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멸망주의자는 사라지지 않는다.

***

멸망주의자는 도망쳤고, 사고는 수습되었다. 도심이 바쁘게 움직였다. 불을 끄는 소방관, 환자를 이송하는 구급차, 바쁘게 돌아다니는 경찰과 군인.

충격성 기억상실을 호소하는 사람들은 그들을 치료해준 사람을 찾았지만 나타나지 않았다.

굳이 남들한테 밝힐 이유가 없었으니까.

조사반의 사무실은 회사의 임시 거점이 되었다. 온갖 사람이 오가며 사태를 수습하고, 정보를 캐냈다.

“타임 카메라 언제 오지?”

“사건 분석반은 장비 챙겨서 온다고 합니다.”

“기억 빼내는 그거도 가져오라고 해! EMP 터져서 전자기기로는 정보를 못 얻어!”

또한 본사의 마크 정도 허겁지겁 달려왔다.

“이연우 씨! 어디 안 다치셨습니까?”

“….”

이연우는 뚱한 표정으로 마크 정을 보았다. 여러모로 실망했다.

‘조사반 건물이 이상개체라 사고를 안 겪는다고? 그리고 공격 징후도 못 포착하고?’

전자야 그냥 넘어가겠지만 공격 징후를 알아차리지 못한 건 많이 불편했다. 제때 막아주지는 못해도 귀띔 정도는 해줘야지.

“본사는 이번 공격 몰랐습니까?”

“그게. 전자세계의 유령이 방해 공작하고, 그놈들은 공간이동 장비로 움직여서.”

“일단 알겠습니다.”

어찌 되었든 본사다. 고작 이런 일로 갈등을 만들기는 싫어, 이연우는 적당히 넘어갔다.

사실 지나간 일보다 중요한 게 있었다.

“그보다, 시간을 사는 지폐를 더 얻고 싶은데. 클럽 쪽에 연락해주세요. 남은 게 없어요.”

“지폐요? 그 많은 걸 다 썼다고요?”

마크 정이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중간에서 일을 처리하며 정보를 보았다. 이연우가 클럽에 받은 것.

‘그게 적은 건 절대 아니었는데?’

호의를 위해 무리하게 챙겨준 지폐였다. 현금으로 따지면 수십억은 될 거다. 클럽도 무시 못 할 금액이었단 말이다. 돈도 돈이지만, 이상개체인지라 그 이상의 가치가 있는, 막 찍어내지도 못할 자원.

“5만원 지폐 다발이 사과 상자로 몇 개나 왔는데….”

“…맞네요? 돈으로 따지면, 어. 어?”

그쯤에서 이연우가 눈을 크게 떴다.

그냥 일회용 이상개체로 여기고 물 쓰듯이 썼다. 하나도 남김없이.

그걸 돈으로 환산하면…. 갑자기 이연우의 손이 벌벌 떨리기 시작했다.

‘방금 그 짧은 시간 동안 몇십억을 태웠다고? 진짜야? 살면서 그 정도로 돈을 써 본 적이 없는데?’

집 몇 채가 타서 사라진 거나 마찬가지다. 물론 그만큼 사람을 구하긴 했지만, 둔중한 충격이 머리를 때렸다.

마크 정은 존중과 어려움이 섞인 표정을 짓고는 고개를 저었다.

“구조에 쓰신 거 같은데, 굉장히 큰 투자를 하셨습니다. 대단하십니다. 그래도 더 얻기는 힘들 겁니다. 클럽도 막 만들지는 못해서요.”

“아, 아.”

조금, 아니, 많이 아껴서 썼어야 했나? 갑자기 들이닥친 후회에 이연우는 말을 잃어버렸다.

그때 반장이 어슬렁어슬렁 다가왔다. 반장은 이연우가 아니라, 마크 정에게 말했다.

“본사 사람?”

“예. 이사 직속-”

“인사는 됐고. 사람 하나 신원만 확인해주쇼. 나랑 연우한테 접근했던 여자인데.”

이연우가 쏴 죽인 여자. 민간인인지 아닌지 확실히 하기 위한 질문.

민간인이라면 이연우의 정신에 문제가 생긴 거라 적절한 치료가 필요했다.

마침 다른 회사 직원이 요란하게 들어왔다.

“이상개체 회수했습니다!”

향수 병을 높이 들고.

“어, 그래. 저거 든 여자였는데. 이상개체라니 멸망주의자 맞네. 부탁은 됐어. 굳이 확인 안 해도 괜찮겠-”

“사랑의 묘약입니다! 멸망주의자 중 여성 스파이가 사람 빼낼 때 사용하던 이상개체입니다!”

“….”

소란스러운 사무실.

조사원과 이연우에게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들은 멍하니 향수 병을 보았다. 저게 뭐라고?

그나마 반장은 빨리 정신을 차렸다.

“다행이네. 연우가 당하지 않아서.”

“당했습니다….”

“어?”

“점심시간에 제 앞에서 향수 뿌려서, 그 냄새 맡았습니다.”

반장과 유지유는 물론 마크 정도 당황하며 이연우를 보았다. 마크 정이 격하게 반응했다.

“괜찮으십니까? 주사위로 저항하셨습니까?”

“저항은 못 했는데….”

“아, 젠장. 그 여자는 어디 있습니까? 저 묘약에 당하면 계속-”

“연우 씨가 쏴서 죽였어요.”

“예?”

마크 정이 고개를 돌렸고, 유지유는 어깨를 으쓱였다.

“보자마자 발작하듯 쏴서 죽이던데요. 연우 씨, 음. 저한테 호의를 가지진 않았죠? 좀 무서운데.”

유지유가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앞머리로 얼굴을 가렸다. 사랑에 빠졌더니, 사랑하는 사람을 쏴서 죽인 인간이다. 오싹함이 느껴졌다.

“아니.”

이연우는 진짜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멸망주의자가 헛소리할 때와는 차원이 다른 억울함이 몰려왔다.

자신을 이상하게 보는 사람도 그렇고, 상황 자체도 그랬다.

‘말도 안 돼. 말이 안 돼. 내가 사랑도 못 느끼는 인간이라고? 아니지. 이건 말도 안 되지.’

솔직히 누군가를 사랑해본 적이 없긴 하다. 워낙 감정이 옅은 편이었고, 뭔가에 열정을 가진 적도 없다. 장수생 생활을 하며 더 망가지기도 했고.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사랑과 위기감을 헷갈릴 정도는 아니지 않나?

결국 이연우의 머릿속에서 상황이 짜 맞춰졌다.

“제 본능이 뛰어나서 위기감이 더 강하게 느껴진 거 같은데요. 보니까, 저 여자가 테러까지 일부러 일으킨 거 같은데. 그 위기를 감지하고 원인을 제거한 모양입니다.”

논리적인 판단이었고, 이상하게 비틀린 상황을 다시 비틀어 그럴듯하게 만든 결론이기도 했다.

반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가끔 그럴 때가 있지. 안전한 상황인데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본능적으로 강하게 들 때가. 나중에 보면 그게 맞더라고.”

“과연.”

기겁한 표정을 짓던 마크 정도 마음을 조금 놓았다. 조사원, 생존전문가의 직감이라면.

‘사랑의 묘약보다 생존본능이 강하게 작용할 수도 있지.’

이연우가 평범한 사람은 아니지 않나.

하지만 유지유는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아닌 거 같은데….”

그때 이연우가 보였던 표정 같은 것은 위기감과 다르게 느껴졌으니까. 지금 생각하면 차라리 첫사랑에 빠진 사람의 표정 같은데.

어찌 되었든 테러가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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