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사
본사가 마비됐을 경우를 대비해 준비한 예비 거점. 새로 지은 건물의 안에서 이사가 입을 벌렸다.
“아니, 저게, 뭔.”
CCTV가 보여주는 본사에 난리가 났다.
갑자기 공간이 깨지더니 주먹 쥔 무인이 걸어들어오고, 평범한 연구소에서는 밀웜이 분열하고, 분열한 밀웜은 폭포가 되어 이연우가 뚫어놓은 통로로 쏟아지고, 이연우는 비상 격리를 다 깨부수며 도망치고 있고.
예상을 아득히 벗어난 사고.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심하지 않나?
“6레벨에 오른 멸망주의자, 멸망 시나리오 수준의 이상개체, 정예요원의 발작….”
이사가 황당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솔직히 사고가 터질 것은 예상했다. 하지만 그 사고가 이렇게 몰려오다니. 이건 전쟁이나 다름없는데?
‘혹시 몰라 중요자원은 대피시켜놓길 잘했군.’
이사는 위가 쓰린 것을 느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만약을 대비해, 이연우의 방문이 예정된 순간 본사 이전 계획을 실행했다. 신의 한 수였다.
회사의 최고책임자를 비롯한 핵심 인물과 중요 데이터, 중요 자원을 옮겨놓았으니까.
“이 기회에 본사를 새로 지어야겠어.”
이사가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안 그래도 주차장에 뭐에 공간이 부족하지 않았나. 본사를 새로 짓자는 말이 나오던 차였다.
차라리 이 기회에 본사를 아예 새로 짓는 것도 괜찮았다. 솔직히 너무 오래 쓰긴 했다. 어쩌면 이 사고를 기회로 삼을 수 있을지도 모르고.
저 사고에 어찌 대응할지 고민하던 이사가 말했다.
“이연우가 실험했던 데이터, 보존했나?”
“예. 평범한 프로젝트의 다른 연구원이 짧게 확인했는데, 충분히 재현할 수 있다고, 최종목적도 꿈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래?”
그렇다면 대응 방식은 하나다.
지금의 본사는 포기하고 사고를 이용한다. 회사가 평범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움직이는 동안 다른 집단의 눈을 가리기 위해.
“본사에 남은 직원과 병력에 지침 내리게. 교전하지 말고 당장 후퇴하라고. 그리고 다른 집단에 자연스럽게 정보 뿌려. 본사 터졌다고. 공식적으로도 공문 보내고. 회사가 세상을 보호할 힘이 부족하니, 너희들도 협조해서 세상 지키라고 말이야.”
비서가 얼른 다른 곳으로 전화를 걸었다.
이사는 차가운 빛으로 동공을 채우며 생각했다.
‘이왕이면 다른 놈들도 저 사고에 엮어 피해를 봤으면 좋겠는데.’
폭탄이 터졌다. 그 폭발의 피해는 모두가 나눠야 마땅하다.
그때 다른 비서가 다가와, 침을 꿀꺽 삼켰다. 그 비서는 이연우를 보았다. 멸망을 일으킬 수 있는 이상개체를 만들고, 이제는 본사의 격리도 다 망가뜨리며 도망가는 이연우.
“저 이상개체는 어떻게 합니까? 잠재적인 위험이 너무 큽니다.”
이상異常을 만드는 이상異常이다.
어느 날 돌이킬 수 없이 오염되거나, 정신이 돌아버리거나, 정신 지배 당했을 때 무슨 위험을 불러올지 알 수 없었다.
확률의 이름 아래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고는 다른 집단의 6레벨보다 훨씬 흉악하다.
“골드버그 클럽도 세상을 멸망시키지 못합니다. 그럴 황금이 없으니까요. 기껏해야 여러 나라의 핵 미사일이나 발사하는 수준입니다. 하지만, 저것은….”
가만히 두면 세상을 멸망시킬 이상개체를 만들었다. 운만 좋다면 양산도 가능하다.
하지만 이사는 힐끔 이연우를 보고는, 평온하게 말했다.
“이상개체 아니고, 아직은 사람이야. 그리고 자기도 위험해질 일을 하지도 않을 테고.”
지금이야 발작하듯 도망치고 있지만, 그건 평범한 방에 들어갔다가 기겁해서 뭘 잘못 판단한 모양이고.
그리고 무엇보다, 평범한 세상이 희미한 희망이 아니라 현실적인 목표로 내려왔다. 그 업적의 가장 큰 기여자가 이연우였다.
또한 당분간은 회사의 무기로서 필요하기도 했고.
그쯤에서 이사는 그 비서에게 일을 시켰다.
“자네는 본사 이전 계획부터 점검하게. 나는 나대로 일이 바쁘군.”
본사는 공간일 뿐이다. 예비 거점도 많으며, 본사라는 공간이 날아가도 인류보호회사는 멀쩡하게 돌아간다.
***
“나 간다.”
어두운 토굴에서 무인이 일어났다. 그는 평온한 분위기를 둘렀으며, 목소리도 편안했다.
그 옆에 있던 전자세계의 유령이 고개를 확 쳐들었다.
“어딜 가? 잘못하면 공격받는데.”
“본사로. 본사와 싸울 거야.”
“너, 미쳤어?”
“아니.”
무인은 허공을 보다가 문득 주먹을 쥐었다. 결의를 다진 날부터 느껴졌다. 손에 잡히는 세상이, 세상을 깨부술 힘이.
“이렇게 쥐새끼처럼 숨어 살면, 살 수는 있겠지. 회사와 싸울 필요도 없이 연명할 수는 있겠지. 그런데 그래서?”
무인이 고개를 내려 전자세계의 유령을 보았다. 그 눈에 불길이 타올랐다.
“도망치고, 숨죽이고, 피하고. 그래서 세상과 싸워 이길 수 있나?”
전자세계의 유령은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흡연자도 죽어 우두머리라고는 자신과 저놈뿐인데.
“본사랑 싸우면 죽어, 멍청아! 살아야지 멸망을 일으키지!”
“멸망은 내 목표가 아니야. 세상과 싸워, 세상을 죽여, 내가 더 강한 걸 증명하려던 거지. 그런데, 적이 강하다고 다음을 기약하고 도망치는 게 강한 사람인가?”
무인의 주변으로 공간이 일그러진다. 무인의 말이 이어질수록 기세가 높아졌다.
전자세계의 유령은 멍하니 무인을 보았다.
“6레벨? 아니, 그러면-”
“아무리 적이 강해도 들이박고, 끝내 이겨내는 게 강한 거지.”
그러니, 가장 강대한 적인 회사와 싸운다. 설사 죽음이 찾아오더라도 피하지 않는다. 다가오는 죽음마저 싸워 이기리라.
무인이 주먹을 당겼다. 그 주먹에 힘이 담겼다. 세상을 때리는 힘.
무인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난 멸망주의자 그만둔다. 이제 네가 멸망주의자의 유일한 우두머리야.”
그 말을 끝으로 무인이 주먹을 뻗었다. 회사가 준비한 규칙, 불청객은 오지 못한다는 규칙이 그 주먹에 맞아 깨졌다.
이어 공간이 깨져나가며 본사의 어딘가가 그 앞에 나타난다. 무인은 꼿꼿하게 등을 세우고 흔들리는 공간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전자세계의 유령은 그 뒷모습을 가만히 보았다. 깨졌던 공간이 복구되며 돌풍이 들이닥쳤고, 머리카락이 마구잡이로 휘날렸다.
“6레벨 올랐으면 같이 있지….”
결국 전자세계의 유령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퍼뜩 고개를 들고 핸드폰을 쥐었다.
유령의 눈에 초록빛이 맺혔다.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 저놈이 정말 죽을 것 같으면 구해와야지. 그래, 사고를 키우자. 혼란이 커져야 구할 기회도 생길 거야.’
오직 전투에 집중된 6레벨이다. 아무리 본사여도 쉽게 막지는 못한다.
그 난장판은 다른 집단에게도 먹음직스러울 것이다. 골드버그 클럽은 회사를 지원하겠다는 명분으로 진입해 정보나 자원을 빼돌릴 것이고, 예술가나 악마는 영감과 즐거움을 위해 나설 것이다.
치직-
전자세계의 유령은 잠깐 문자열로 흩어지더니, 곧 온갖 사람에게 정보를 흩뿌렸다.
본사를 약탈하기 딱 좋은 기회라는 정보를.
***
‘망했다, 망했다, 망했다!’
애초에 본사의 의뢰를 받아들이면 안 됐다.
이연우는 허겁지겁 길을 내달렸다. 뒤에서는 밀웜 머리의 홍수가 들이닥쳤다. 쏴아, 물소리 같은 것을 내면서.
이미 불을 질러서 해결할 수준을 지났다. 불이 태우는 속도보다 저게 증식하는 속도가 빠르다.
이연우는 달리면서도 머리를 마구 헝클였다. 엉킨 머리처럼 상황이 지독하게 꼬였다.
“아니, 아니!”
이상異常을 만드는 실험을 왜 했지? 바보인가? 실험이 잘못되면 회사도 기겁할 텐데? 멸망을 양산하는 짓이 가능한 인간을 내버려 둘 리가 없는데?
처음부터, 위기감이 느껴졌을 때부터 다 버리고 도망쳤어야 했다.
‘이게 수습은 가능한가? 아니, 그 전에 어떻게 도망치지?’
비상 사이렌이 귀가 아플 정도로 울린다. 뒤에서는 밀웜 머리가 쫓아오고, 어딘가에서는 6레벨의 무인이 난장을 피우고 있을 것이다. 본사라는 잠재적인 위험도 있다.
그야말로 전쟁터에 떨어진 듯한 위기.
이연우의 감각이 극한까지 깨어났다. 지치지 않는 활력이 솟구쳤으며, 보이지 않는 것을 느꼈고, 생각이 고속으로 흘렀다.
‘도주가 1순위야! 엘리베이터는 못 써!’
어느새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한 이연우는 그대로 스쳐 지나갔다. 주차장이나 출구의 좌표를 몰라서. 애초에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시간도 없었다.
밀웜의 머리가 벽이 되어 밀려왔다.
“주사위로 이동도 힘든데!”
이연우가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격리 조치인지 뭔지, 공간 이동은 성공 확률이 극히 낮다는 것이 느껴진다. 차라리 조금 뛰어, 성공 확률이 높은 장소를 찾는 편이 빠르다.
그는 휙 몸을 꺾어 구석의 벽을 향해 내달렸다.
감각이 최고조로 일어났다. 온갖 확률과 가능성이 손에 잡힐 듯이 감지되었다.
‘여긴 아니야. 더 움직여야 해.’
이연우의 눈동자에 언뜻 주사위의 형상이 비쳤다. 그 주사위가 구르기 시작했다. 쉬지 않고, 계속해서.
벽에 구멍이 뚫릴 가능성, 한 걸음이 열 걸음일 가능성, 문의 잠금장치가 고장 나서 비상 격리되지 않았을 가능성.
신들린 사람처럼 성공이 연달아 나온다. 이연우는 거침없이 달렸다.
직원들이 이미 대피했는지 텅 빈 옆의 사무실이나 복도나 공원이나, 본사를 가로지른다. 뚫려버린 격리의 빈틈을 따라 밀웜 머리의 파도가 쫓아왔다.
“여기도 아니고, 여기도 아니고. 여긴, 이동? 단거리 이동은 가능한가?”
그건 조금 노력하면 될 것 같다. 이연우가 휙 손을 휘둘렀다. 이동을 억누르는 힘을 뿌리쳤다.
본사 안에서 공간 이동 확률이 가장 높은 장소에 자신이 있을 가능성.
데구르르-
성공!
그리고, 이연우의 시야가 바뀌었다.
주차장이다. 박살이 난 차와 공간이 널려 있고, 회사의 격리 조치나 규칙마저 부서졌다. 공간 이동을 억제하던 힘도 안 느껴진다.
“됐다! 이제 이동을-”
이연우가 활짝 웃을 때였다.
“드디어 본사 사람을 보는군. 기껏 왔는데 본사 사람이라고는 안 보여서 지루했는데.”
뒤에서 즐거운 목소리가 들렸다. 이글거리는 투지가 일렁이는 목소리.
이연우가 휙 몸을 돌렸다. 그곳에는 무인이 있었다.
“아, 이연우? 지우개를 죽인 정예요원. 널 이기면 내가 대장보다 강하단 거겠지. 좋아, 싸우자.”
무인이 자세를 잡고.
“싫은데?”
이연우는 주사위를 불렀다. 공간 이동 판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