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사
‘미친 소리. 싸우긴 뭘 싸워.’
말 그대로 박살 난 주차장이다. 얼핏 봐도 공간이니 규칙이니 하는 것이 다 부서졌다. 그 파괴를 일으킨 무인은 최소한 지우개를 들었던 그 멸망주의자 수준의 위험인물이었다.
저런 거랑 싸우라고? 본사가 자신을 어떻게 볼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이연우는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주사위. 내가 조사반 사무실에 있을 가능성.’
집처럼 사는 곳이어서 그런지, 그의 일터여서 그런지, 이 가능성이 가장 성공확률이 높다. 힘을 조금 더하면 확정으로 뽑을 수 있을 정도로.
이연우가 확 공기를 잡아채는 시늉을 했다.
데구르르-
주사위가 구른다. 실타래 같은 확률이 한 곳에 뭉쳐서 꿈틀거린다. 다가오는 미래가 혼란스럽게 흔들렸다.
무인 또한 그 실타래를 느꼈다. 무인의 표정이 단번에 일그러졌다.
‘윽. 저게 뭐야. 징그러워.’
얇고 긴 실타래가 뭉쳐서 흔들리는 모양새가 마치 지렁이나 기생충이 엉켜서 몸부림치는 것 같다. 그야말로 혐오스럽다.
세상을 흔드는 힘을 보아하니 강하긴 하지만, 외형이 영 아니었다.
무인이 손바닥을 펼쳤다. 모기나 날벌레를 때려잡는 느낌으로.
“저리 치워!”
손바닥이 가볍게 휘둘러진다. 그 가벼운 몸짓에 폭풍이 불었다.
와장창!
손바닥이 지나가는 궤적을 따라 공간이 짓눌리다 못해 깨졌다. 세상이 버티지 못했다. 또한 주사위가 불러낸 확률의 실타래 또한 버티지 못했다.
뭉쳐 있던 실타래가 펑 터지더니, 충격파에 실려 날아간다.
그리고, 이연우가 손을 뻗었다.
‘안 돼!’
후폭풍이 몰아치며 머리카락이 날린다. 매서운 바람에 눈이 따갑다. 부릅뜬 눈에 눈물이 맺혔으나, 이연우는 필사적으로 눈을 움직여 흩날리는 가능성을 보았다.
‘성공 가져와!’
그 시선을 따라 손이 움직여, 가능성을 쥐었다.
이연우가 조사반 사무실에 위치할 가능성.
그 가능성이 구현되는 순간.
무인이 다시 한번 손을 휘둘렀다. 저게 뭔지는 모르지만, 적의 행동이니까 막는다.
쾅-!
바퀴벌레를 찾아 내리치듯 휘두른 손바닥이 구현되는 가능성을 깨부쉈다. 주사위가 멈췄다. 아무런 결과도 내지 못했다.
지우개 이후로 처음 겪는 근본적인 차단이다.
“….”
“….”
무인과 이연우 사이에 잠깐 침묵이 내려앉았다. 서로 다른 생각을 했다.
무인은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뭐랄까, 투지가 사라진다.
‘저런 거랑 싸우는 건 멋이 없어.’
세상과 싸워 이기고 가장 강한 존재임을 증명하는 이유가 뭔가. 그게 멋있으니까. 그게 낭만이니까.
하지만 저…. 벌레 같은 거랑 싸우는 장면은 조금 지저분할 것 같다. 지우개와 이연우가 싸우는 장면이 머릿속에서 상상되었다.
‘저게 징그러운 실타래를 흩뿌리고, 대장은 실타래를 지우고, 결국 못 지운 실타래에 당해 죽었나?’
무인이 질겁하며 한 걸음 물러섰다. 무인이 원하는 싸움과는 다른 맥락이었다.
무엇보다 코앞에서 본 이연우가 자신보다 약했다. 기껏해야 세상을 흔드는 정도? 약한 자와 싸워 이기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약하고 징그러운 놈. 피하자. 본사에 다른 강적이 많을 텐데 굳이 이딴 놈하고 싸울 이유가 없어.’
그때였다.
한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던 이연우가 머리를 들었다. 눈동자에 광기 같은 것이 번들거린다. 가능성을 상징하는, 촉수 같은 실타래가 스물스물 풀려나오며 이연우의 주변에서 일렁였다.
이연우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본사. 보고 있습니까? 제가 세계 평화를 위해 이 멸망주의자를 처리하겠습니다. 그러니 제가 친 사고는 정상 참작해주십시오.”
퇴로가 막혔다. 지우개를 상대할 때와 같다.
‘내가 살려면 이 위험을 없애야지.’
목숨을 위협하는 적. 죽인다.
적당히 자신의 사고를 덮을 공도 세울 겸.
이연우가 확률의 실타래를 감고 무인에게 달려들었다.
***
머리가 쌩쌩 돈다. 고속으로 회전하는 사고가 최적의 전투법을 세웠다.
‘근본은 지우개를 상대할 때와 같아.’
주사위를 계속 굴린다. 미친 듯이 공격해, 적이 자신을 타격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다.
데구르르-
주사위가 굴렀다. 심장이 멈출 가능성, 무인이 이상異常이 아닐 가능성, 무인이 목적을 잃을 가능성. 그뿐만이 아니다.
주사위가 가지는 혼란한 성질을 끌어냈다. 온갖 가능성의 실타래가 마구잡이로 풀려났다.
무인은 단순하게 대응했다.
연격. 주먹을 재빠르게 연달아 내질러 징그러운 실타래를 전부 때린다. 그가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의미 없다!”
꿈틀대는 가능성이 모조리 얻어맞고 사라졌다.
하지만 이연우는 충실한 회사원이 되어 포기하지 않고 사명감을 담아 외쳤다.
“인류를 위협하는 멸망주의자! 죽어라!”
탕-!
어느새 꺼낸 권총이 총탄을 내쏘았다. 이연우의 외침과 총성이 주차장에 메아리쳤다.
무인은 진저리를 치며 다리를 뻗었다. 곡선을 그리는 궤적이 총탄을 걷어내고, 나아가 이연우의 목에 걸렸다.
이연우의 눈이 번쩍였다. 감각이 곤두섰다. 주사위의 감각이 아니다. 생존본능이다.
‘생존!’
위험을 피하고 살길이 느껴진다.
반응속도가 한계를 초월했다. 순식간에 이연우의 몸이 기괴하게 꺾였다. 상체와 머리가 옆으로 기울며, 무인의 발끝이 귓가를 스치고 지나간다.
쐐애애액!
다리가 스쳤는데, 무슨 칼날이 공기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한 번이 아니었다. 무인은 공세로 전환할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죽어!’
습관처럼 일정한 호흡을 유지하기 위해 입은 꾹 다문다. 무인이 춤추듯이 다리를 놀렸다. 두 발이 폭풍이 되어 몰아쳤다.
수평으로, 수직으로, 곡선으로, 사선으로, 끊임없이 뻗어나가는 칼날 같은 다리. 공간에 예리한 상처가 남는다.
이연우는 전부 피했다. 주저앉고, 옆으로 구르고, 펄쩍 뛰어오르고, 몸을 꺾고. 그 반응은 평범하지 않았다.
‘왜 안 죽지? 어떻게 이걸 다 피하지?’
발을 내지르는 무인은 기이한 표정을 지었다. 이를 악문 채, 눈살을 찌푸렸다.
이연우는 마치 미래를 보는 듯했다. 숙련된 파이터가 자세나 근육의 움직임만 느끼고 공격을 예측하듯, 공격이 뻗어나가기 전에 이미 회피하고 있다.
그 자세가 우스꽝스러워도, 무인은 이연우를 때리지 못했다. 결국 무인이 입을 열었다.
“이 바퀴벌레 같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자는 내가 용납하지 않는다!”
말하는 찰나의 빈틈. 이연우가 치고 들어온다.
주사위가 구르고, 총탄이 쏟아진다. 엎어진 밀웜 통에서 밀웜이 쏟아지듯, 꿈틀대는 실타래가 우르르 쏟아졌다.
가는 실타래가 몸을 뒤틀며 빽빽하게 공간을 채웠다. 마치 벌레의 무리가 닥쳐오는 듯한 기세.
“돌겠네!”
총탄은 문제가 아니었다. 맞아봤자 긁히지도 않는다.
아무리 때려 없애도 계속 새로 만들어지며 몰려오는 실타래가 문제였다. 그렇다고 실타래의 근원인 이연우를 공격하자니, 기가 막히게 회피하고 있었다. 주먹이나 발의 정타는 물론, 깨지는 공간의 여파마저 수월하게 피했다.
거기에 신경을 긁는 이연우의 목소리까지.
“내가 쓰러지지 않는 이상 본사를 무너뜨리지는 못한다, 멸망주의자!”
연기 못하는 사람이 억지로 연기하듯 과장되고 어색한 목소리.
무인이 이를 뿌득 갈았다. 머릿속에서 이연우의 인상이 변했다. 약하고 징그러운 놈에서, 약하면서 끈질기고 징그러운 놈으로.
‘이딴 놈은 피해야지. 싸워 이겨도 기분이 찝찝할 거야.’
진짜 머리 한 번 쎄게 쥐어패고 싶지만, 그럴 가치가 없다.
그가 원하는 건 강적과의 사생결단이지, 이딴 하찮고 지저분한 전투가 아니었다.
“빌어먹을! 좋아, 내가-”
“회사원은 멸망주의자의 말을 듣지 않는다!”
“개새끼!”
결국 무인이 욕설을 내뱉고는 주먹을 강하게 휘둘렀다. 몰려오던 실타래가 흩어진다. 그 찰나를 무인은 놓치지 않았다.
말아쥔 주먹을 허리춤으로 당기고 하늘을, 주차장 천장을 향해 뻗는다. 전력을 다한 일격이 본사를 때렸다.
끼이이익-!
본사가 비명을 질렀다. 공간이며 세상이 부서졌고, 천장에 둥근 구멍이 뚫렸다. 하나가 아니었다. 레이저가 지나간 듯, 주차장부터 한참 위의 층까지 관통되었다.
그리고, 툭, 툭, 비가 내렸다.
밀웜 머리의 비가.
이미 증식할 대로 증식한 밀웜의 머리가 무인이 뚫어놓은 통로를 타고 흘러내렸다.
뛰어오르려던 무인이 멍하니 허공을 보다가 얼굴로 손을 가져갔다. 얼굴에 붙은 밀웜 머리가 손에 잡혔다.
“이건.”
손가락 사이에서 증식하는 밀웜의 머리. 자세히 보니, 살아 있지도 않다. 그냥, 시체가 된 밀웜의 머리가 분열하고 있다.
흐리멍텅한 눈으로 보던 무인은 손에 힘을 주었다. 으직, 증식하던 밀웜의 머리가 으깨졌다. 대신하듯 쏟아지는 밀웜의 머리를 올려보며, 무인이 절규했다.
“본사! 내가 원하는 싸움은 해주지 않겠다는 거냐!”
드디어 본사의 속셈을 알았다.
기껏 본사로 쳐들어왔는데 사람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던 이유. 무인이 원하는 결연한 결전이 아니라, 무인이 싫어하는 의미 없고 하찮은 진흙탕을 준비하기 위해서다.
바퀴벌레 같은 이연우와 의지도 없이 분열하는 밀웜 머리의 파도로 무인을 막기 위해.
‘이딴 건 싸움도 아니란 말이다!’
쏴아아-
밀웜의 머리가 소나기 소리를 내며 무인을 덮쳤다. 갈색의 폭포가 주차장으로 쏟아졌다. 무인도, 이연우도 밀웜 머리의 폭포에 휩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