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류보호회사 (167)화 (167/194)

인간

의뢰를 마친 이연우는 본사에 남을 이유가 없었고, 도망치듯 본사를 떠나 조사반 사무실로 돌아왔다.

며칠이 지나 아침이 되어 눈을 뜬 이연우는 아쉬움에 한숨을 푹 쉬었다.

“이걸 격리를 안 해주네….”

너저분한 방에 이연우의 아쉬움 가득한 목소리가 울렸다.

이불만 대충 깔려 있고, 물병이나 가스버너 따위가 널브러져 있는 좁은 방이다. 조사반 건물에 남은 방이자 이연우가 머무는 방.

느릿하게 몸을 일으킨 이연우는 머리를 긁적이며 방을 둘러보았다.

솔직히 불만이 있지는 않다. 어쨌든 먹고 사는 데는 문제가 없었고, 계약서를 쓴 반장이 땅 주인으로서 방어까지 가능했으니까.

하지만 생존본능으로 6레벨에 오르니, 욕심이 생겼다.

‘이제 마음 편하게 집 구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

무슨 사고가 찾아와도 괜찮으니, 인적 없는 곳의 아무 집이나 들어가도 문제없지 않을까? 집의 안전이나 다른 것들을 따지지 않아도 된다.

오직 사고에 휩쓸릴 사람과 자신의 취향만 따지면 되었다.

예를 들어 외딴곳의 쉘터 같은 곳. 재난이 터져도 스스로 에너지를 생산하며, 식량도 자급자족 가능한 회사의 쉘터.

‘그냥 회사에 요구해볼까? 6레벨인데 주지 않을까?’

잠시 멍하니 앉아 잡생각을 이어가던 이연우가 퍼뜩 몸을 일으켰다.

창밖에서 떠오르는 해가 희미한 빛을 비추었다. 반장이 출근하기 전에 얼른 씻고 사무실로 갈 시간이다.

주변에 던져둔 잡동사니 사이에서 세면도구를 찾은 이연우가 설렁설렁 움직였다.

그렇게 다시 하루가 시작되었다.

***

불이 켜진 사무실.

이연우가 마우스를 딸깍였다. 화면에는 인간자격증과 관련한 문서가 잔뜩 나열되어 있었다. 최신 갱신된 문서들인데 그 숫자와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거의 멱살 잡고 싸우다시피 연구원과 연구원이 다투었으며, 다른 부서 사람들도 슬쩍 의견을 내놓아 불을 키웠다.

인간자격증이 보증하는 인간은 진짜 인간인가? 이 주제 하나로 작은 불이 번졌다.

‘내가 올린 문서 때문 같은데.’

이연우가 일전에 올렸던 보고서와 제안서. 인간자격증의 오염저항 때문에 시작된 일이다.

이연우는 머쓱하게 마우스를 흔들다가, 조회수가 가장 높은 보고서를 빠르게 읽었다.

요약하면, 인간자격증이 부여한 ‘인간’이 다른 이상개체에 오염되어도 인간이도록 기능한다는 실험 결과였다.

문제는 그 인간이 진짜 인간이냐는 것이다.

온갖 반박이 달렸다.

그러면 시험을 통과한 짐승도 진짜 인간이냐, 이상개체가 부여한 인간은 인간이 아니다, 결국 존재의 변질 아니냐, ‘인간’이라는 이상개체를 만드는 것 아니냐….

거기에 멸종의 대변인이나 도덕윤리를 담당하는 부서까지 가세해 그야말로 난장판을 만들었다.

합격자도 오염자로 보아야 한다, 인간의 기준이 뭐냐, 복제인간은 인간이냐 등등.

길고 어지러운 글을 보던 이연우의 눈이 빙글빙글 돌았다.

머리에 과부하가 걸렸다.

“이게 다 무슨 소리지….”

안 그래도 연구원들이 전문적이고 어려운 용어를 늘어놓았는데, 어느 시점부터는 문장이 지나치게 늘어지며 봐도 이해하지 못하겠다.

어지러움을 느끼던 이연우가 휙 창을 닫았다. 기본 바탕 화면이 펼쳐지며 혼란이 가라앉았다.

‘그러니까, 저항 효과가 있다는 거잖아.’

그것 하나면 됐다. 어쨌든 자아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 아닌가.

이연우가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었다. 손가락 하나에 그의 이상개체를 떠올렸다.

빗물, 생존본능, 주사위, 인간자격증.

‘빗물은 잠재력이 없고. 생존본능은 6레벨이고. 주사위는 경계 앞에서 후퇴하고 있고.’

이연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생존본능이 6레벨에 오른 순간, 주사위의 오염이 천천히 감소하기 시작했다. 집중하면 느껴지던 가능성과 확률의 감각이 서서히 흐려졌다.

생존본능이 주사위의 오염을 위험으로 판단한 것이다. 자아의 상실을 막는 것이다.

애초에 위험을 겪지 않는 미래를 향해 움직이는 것일 수도 있고, 어쩌면 주사위에 오염되면 생존본능도 자아의 상실을 막지 못한다는 뜻일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인간자격증이 필요했다.

생존본능이 주사위의 오염을 위험으로 판단하지 못하도록.

왜냐면 이연우에게 사소한 욕심이 생겼으니까. 이왕이면 주사위도 6레벨로 올리고 싶다는 욕심이.

“주사위를 포기하기는 아쉬운데.”

생존은 준비고, 대비다. 다룰 수 있는 도구는 많을수록 좋았고, 주사위는 만능의 도구였다.

극한 상황에 던져지더라도 곧바로 돌아올 수 있고, 식량과 식수가 없더라도 만들 수 있다.

이연우의 생각이 깊어졌다.

‘인간자격증. 주사위의 오염에 저항할 잠재력이 있을까?’

회사는 그동안 인간자격시험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대량살상 수준의 위험을 가졌으나, 그럭저럭 막을 수 있어서.

그 부산물인 자격증은 위험하지 않아 연구된 바가 거의 없었다.

결국 이연우가 직접 실험해야 한다.

이연우는 에코백에서 인간자격증을 꺼냈다. 여권 같은 자격증의 가죽 표지를 넘기니, 이연우의 증명사진과 인간임을 증명한다는 글자가 보였다.

증명사진을 내려보던 이연우는 작게 중얼거렸다.

“수준을 높여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이연우는 생존본능을 떠올렸다. 그가 직접 경계를 넘은 힘. 그 사례를 참고하면….

‘생존본능은 위험 앞에서 자극받았지. 주사위는 혼란한 성질 때문에 혼자 오염시켰고.’

이상개체의 본질에 맞는 행동을 하면, 그 이상개체를 이해하고 하나가 될 행동을 하면 뭔가 변화가 있지 않을까?

이연우가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사람답게 행동하면 인간자격증이 강화되나?’

시도해볼 만한 아이디어다. 사람답게 행동하며 자격증을 관찰한다.

물론 ‘사람답게’의 기준이 문제지만, 이연우는 고민하지 않았다. 자신은 사람이니까, 자신답게 행동하면 끝이다.

고민을 떨친 이연우가 개운한 웃음을 지을 때였다.

덜컥, 문이 열리고 반장이 들어왔다.

“어. 연우야.”

“안녕하세요.”

이연우는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고, 반장은 불안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반장도 소식을 들었다. 이연우가 갔더니, 본사가 박살이 났다고. 아무리 무던한 반장이어도 이제는 초조했다.

한참 동안 문가에 서서 주변을 탐색하던 반장은, 이연우가 이상한 눈길을 보내자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그렇지. 지유는 휴가 내고 며칠 쉰다. 그리고 재민이 내일부터 출근할 거야.”

부모감별사 최재민. 이연우가 의아하게 물었다.

“아직 졸업 안 하지 않았습니까?”

“얘네는 저번 주에 했다더라. 얘는 연수도 딱히 필요 없고. 지유 쉬는 동안 네가 서류 업무 조금만 알려줘.”

생각보다 빨리한 모양이야. 이연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렵거나 위험한 일도 아니고.

“예.”

***

“안녕하세요! 조사원 최재민입니다!”

출근 시간보다 일찍 나온 최재민은 활기차게 인사했다. 새 옷 냄새나는 캐주얼 정장을 빼입은 최재민은 조금 어색한 기색이었다.

‘엄마가 정식 출근은 처음이니까 일찍 나가라고 해서 일찍 왔는데.’

반장도, 이연우도 한참 일찍 나온 듯 이미 잔뜩 비운 커피잔을 홀짝이고 있었다.

반장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최재민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옷 잘 샀네. 어울린다.”

“저는 안 사려고 했는데, 엄마가 꼭 사라고 해서요.”

최재민이 볼을 긁적였다. 학생 기간 동안 견습 조사원으로 일을 몇 번 따라가 봐서 안다. 조사원은 정장 따위 입지 않았다.

조사 업무에서는 편한 옷을 입었고, 현장직이라 사무실에서도 비슷했다.

반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남들 결혼식. 아니.”

이제 막 졸업한 애가 정장을 입고 누구 결혼식에 갈까 싶다. 당장 최재민이나 이연우의 얼굴에 그냥 깔끔하게 입으면 되는 거 아닌가 의문이 떠올랐다.

반장은 서둘러 단어를 고쳤다.

“장례식 가려면 정장 한 벌은 있어야지.”

“그렇죠? 엄마도 사회인 됐으면 정장 한 벌은 맞추라고 말하더라고요. …지유 누나는 없어요?”

“어, 지유는 휴가.”

그쯤에서 반장이 이연우를 향해 턱짓했다.

“며칠 동안은 연우한테 서류 업무 배워라.”

이연우가 작게 손을 들어 흔들었다. 최재민이 웃으며 유지유의 자리로 가 앉았다.

“형! 저 뭐 배우면 돼요?”

“어….”

이연우는 잠깐 허공을 보다가, 자신이 제일 먼저 썼던 문서를 떠올렸다. 이연우가 말했다.

“시말서 쓰는 법?”

보고서는 지금도 잘 못 쓰겠고 다른 문서도 어설프지만, 시말서 하나는 자신 있다. 아마 그가 썼던 공적인 문서 중 가장 잘 쓰지 않았을까?

잠깐 관심을 거두었던 반장이 황당한 얼굴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아니, 뭘 그런 것부터 가르치냐.”

“그, 보고서는 막 써도 괜찮지 않습니까.”

이연우가 눈을 돌리며 합리적인 변명을 늘어놓았다.

정식 보고서에는 조우한 이상개체의 정보만 들어 있으면 뭐라고 안 한다. 오히려 시말서가 중요하다.

이연우가 진지하게 말했다.

“살아남으려면 시말서 쓸 일을 자주 저지를 수도 있습니다.”

산에 불을 지를 수도 있고, 부서가 날아갈 수도 있고, 기밀무기를 잃어버릴 수도 있고. 그럴 때 잘 넘어가려면 시말서를 잘 써야 한다.

반장이 손을 내저었다.

“보고서 쓰는 법부터 가르쳐. 쟤 현장은 몇 번 갔는데, 보고서는 한 번도 안 써봤으니까.”

“보고서는….”

대충 막 쓰는 편인데.

이연우가 어렵게 고개를 끄덕였다.

“보고서는 대충 써도 돼. 조우한 이상개체의 정보만 다 들어가면 뭐라고 안 하더라.”

최재민은 수업받듯 노트와 연필을 꺼내 필기했다. 반장은 머리가 아파 입을 몇 번 벙긋거리다가, 푹 한숨을 내쉬며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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