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폐지? 이상자격시험? 갑자기?’
이연우가 어벙한 표정을 지었다가, 다음 순간 감정이 씻겨나간 얼굴을 했다. 필요한 자원을, 잃어버린 자원을 되찾지 못할 위기다.
여유와 감정이 사라졌다. 이연우는 냉정한 머리로 최적의 판단을 내렸다.
“…선생님! 잠깐! 돌아가지 마시고, 대화 좀 잠깐 합시다! 어차피 저는 그쪽 계속 부를 수 있는데, 여기서 마무리 짓는 게 낫지 않습니까!”
대충 앉아 있던 자세를 예의 바르게 바로 잡고, 손을 뻗어 핸드폰을 쥐었다.
핸드폰 너머에서는 작은 한숨과 노이즈가 들려왔다. 진짜 대화하기 싫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혹은 머리에 총구가 들이밀어진 듯. 말하면 듣겠다는 느낌으로 침묵이 이어졌다.
이연우는 마른 입술을 핥고는, 신중하게 말했다.
“방금은 제가 감정이 격해서 말이 거칠게 나왔습니다. 기분 상하셨다면 죄송한데, 우리 협상은 할 수 있지 않습니까?”
폐지한 인간자격시험을 다시 열 수도 있을 것이다. 6레벨 수준의 자격증은 무리여도 자격증은 받을 수 있다.
이연우가 요구조건을 대폭 낮췄다.
“그냥 자격증만 돌려주십시오. 어려운 부탁은 아니지 않습니까. 애초에 왜 취소됐는지 이유도 안 알려주셨고요. 이의 신청했다고 생각하세요.”
- 취소 사유는….
목소리가 길게 늘어졌다. 마치 솔직하게 말할 수 없어 고민하는 듯했다. 사유가 뭐든, 인간자격증에 집착하는 6레벨한테 잘못 말하면 끔찍한 미래가 펼쳐질 것이었다.
결국 스피커 너머의 목소리는 말을 얼버무렸다.
- 취소 사유는 규정에 따라 밝힐 수 없는 점 양해해주십시오. 또한 규정에 따라 취소된 자격증을 재발급할 수는 없으며, 폐지된 시험은 다시 열리지 않는다는 점 알려드립니다.
다시는 인간자격시험으로 돌아갈 수 없다. 인간자격증을 발급할 수도 없었다. 본질이 뒤틀렸다. 모기가 파리가 되는 수준의 변질이었다.
그 압박의 근원인 이연우는 답답한 표정을 지으며, 컴퓨터 사인펜으로 탁자를 투투툭 두드렸다.
순간 서늘한 안광이 스쳤다.
‘그 규정을 주사위로 바꾸면, 안 되지. 실패할 수도 있고, 성공해도 저쪽에서 다시 고치면 그만이야.’
이연우가 앓는 소리를 내었다. 진짜 어려운 상대였다. 협박? 그냥 자기 손으로 폐지했다. 주사위로 파고들 틈도 보이지 않았다.
끝내 이연우는 감정에 호소하기로 했다. 두 손으로 핸드폰을 꼭 쥐었다.
“아, 진짜. 자격증, 저한테 소중하단 말입니다. 제가 처음 겪은 이상개체고, 장수생이던 제가 회사에 입사하게 된 이유란 말입니다.”
절절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소중한 유품이나 추억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스피커 너머에서는 불편한 침묵이 이어졌고, 이연우는 말하다가 문득 깨달았다.
‘아니, 잠깐만. 내가 몸 비틀고 사는 이유가 얘 때문이잖아?’
인간자격시험만 아니었어도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멀쩡하게 살고 있었을 텐데. 물론 이상기후로 죽었을 테니 지금이 더 낫지만, 이연우는 이 점을 호소해보기로 했다.
이연우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핸드폰 마이크 부분을 입에 바짝 붙였고, 의도된 분노가 섞인 목소리를 터트렸다.
“애초에 너 때문에 내가 이 고생하고 살잖아! 네가 날 이렇게 만들었어! 내 인생을 망쳤다고!”
- 사과의 말씀 드리겠습니다.
노이즈 섞인 목소리는 즉각 대답했다.
- 인간자격시험으로 의도치 않은 불편을 드린 점, 죄송합니다. 인간자격시험의 폐지는 귀하가 겪은 사고에 대한 사죄의 일환이었습니다. 향후 새롭게 돌아올 이상자격시험은 이러한 실수를 참고하여 비슷한 불편이 생기지 않게 노력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사과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멈춤 없이 유창하게 흐른 목소리.
노이즈만 아니었으면 무슨 대국민 사과인 줄 알 정도로 흠잡을 곳이 없었다.
사과, 사죄의 행동, 예방 대책, 변명 없음.
이연우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얼굴에는 허탈한 빛이 어렸다. 트집을 잡으려면 못할 것도 없지만, 저 정도로 말하는 꼴을 보니 자격증은 절대로 주지 않을 것 같다.
‘아니, 와. 와, 진짜. 아니.’
차라리 위협에 맞서 도망치거나 싸우는 게 쉬웠다. 말로 어떻게 설득하려니 도무지 가능해 보이지 않았다.
‘말로는 진짜 못하겠다.’
이연우가 침을 꿀꺽 삼켰다. 남은 방법은 돌고 돌아 다시 협박이었다. 그는 사인펜을 단검처럼 쥐었다.
“회사의 파괴 계획. 주사위로 네가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을 판정하기. 제발 좋게 말할 때-”
- 응시생 여러분에게 공지합니다. 이상자격시험은 외부적인 이유로 인해 영구적으로 폐지될 수 있음을 공지-
“그만! 그만 말해!”
이연우가 빽 소리 지르며 사인펜을 집어던졌다. 사인펜이 힘 없이 떨어졌다.
죽일 거면 죽이라고 말하는데 뭘 더 할 수가 없다.
‘돌겠네.’
결국 이연우는 자격증을 뜯어내는 일은 포기했다. 방법이 없다. 이런 상대는 처음 겪었고, 대처할 방법이 없었다.
- ….
스피커 너머의 노이즈가 점차 잦아들었다. 슬그머니 도망가는 기색이다.
이연우가 힘없이 말했다.
“이상자격시험이라도 보게 해줘.”
그걸 탈락하면 혹시 인간자격증과 비슷한 효과를 낼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띵동댕동-
핸드폰 스피커에서 경쾌한 종소리가 들려왔다. 한숨 돌린 듯, 목소리도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
- 10분 후 시험을 시작하겠습니다.
집어던진 컴퓨터 사인펜을 이연우는 주섬주섬 주웠다. 깊은 한숨이 나왔고, 머리가 복잡했다. 그는 그저 두 손을 모아 기도했다.
‘탈락에 인간자격증 효과 있었으면 좋겠다.’
***
좁은 방에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연우는 가만히 A4 용지를 내려보았다. A4 용지에는 몇 개의 주관식 문제가 인쇄되었다.
[이상자격시험]이라고 크게 적힌 제목 아래로 늘어선 문제들.
1. 1 + 1은 몇일까요?
2. 당신은 이상異常입니까, 사람입니까?
3. 가, 나, 다, 라 다음에 나올 것은?
4. 지구는 평평한가요, 둥근가요?
이연우는 긴장감 없이 문제를 훑어봤다. 어차피 위험은 없다. 처음 인간자격시험을 겪었을 때와는 마음가짐 자체가 달랐고, 목적도 달랐다.
‘탈락하려면 낮은 점수를 받으면 되겠지.’
시험이라면 높은 점수를 받아야 합격이다.
탈락이 목적인 이연우는 성의 없이 찍찍 컴퓨터 사인펜을 놀렸다. 문제가 쉬워 오답을 노리기도 쉬웠다.
1 + 1은 3. 가나다라 다음은 므악, 지구는 삼각형이다.
순식간에 풀었다. 사람이냐 이상異常이냐는 질문에는 잠깐 고민했지만, 이상자격시험이니 사람이 오답이라 추정하고 사람을 썼다.
나는 사람이다.
그 답안을 마지막으로 작성한 이연우가 시험지를 팔랑팔랑 흔들었다.
“다 풀었어. 빨리 채점해줘.”
이번 시험은 엄정한 규칙을 적용하지 못했다. 순식간에 시험지가 사라졌고, 몇 초 뒤 허공에서 자격증이 퉤 던져졌다.
그 순간이었다.
이연우의 동공이 확장됐다. 주사위가 꿈틀거린다. 생존본능에 억눌려 오염은 꿈도 꾸지 못하던 주사위의 오염이 일어났다.
“어? 어?”
이연우가 현실을 의심하며 서둘러 자격증을 펼쳤다. 그곳에는 이연우의 증명사진과 아래로 짤막한 글귀가 쓰여 있다.
- 위 개체는 이상異常임을 증명합니다.
“아니, 왜? 다 틀렸잖아!”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다. 진짜 문제는 주사위의 오염 자체다.
안개에 침습 당했을 당시 폭주하는 주사위에 생존본능과 인간자격증이 저항했듯이, 이번에는 주사위와 이상자격증이 오염을 막는 생존본능에 저항하고 있다.
이대로 두면 주사위와 이상자격증이 힘을 합쳐 생존본능을 밀어낼 기세였다.
‘이거 이대로 두면, 자아 잃어버리겠는데?’
이연우가 벌떡 일어섰다. 한 손에 든 이상자격증을 허공에 마구 휘둘렀다.
“취소! 취소! 아니, 반납! 빨리!”
- …응시생의 요청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시험이 종료되었습니다.
피곤해 죽겠다는 목소리가 들리고, 이상자격증이 휙 사라졌다. 그리고는 말도 없이 확 연결이 끊겼다.
핸드폰 스피커에서 노이즈가 사라졌다. 말릴 사이도 없이 도망쳤다.
“갔어? 진짜? 이대로 가면 안 되지!”
이연우가 털썩 주저앉았다.
“아니, 아….”
다 틀렸다. 전부 실패했다. 잃어버린 인간자격증은 돌아오지 않았다.
적막한 방.
한동안 허무하게 앉아 있던 이연우는 잠깐 사이에 일어났던 일을 떠올리다가 문득 눈을 빛냈다.
“맞네. 내가 실수했네.”
처음부터 접근을 잘못했다. 제대로 된 질문을 던지지 못했으니, 당연히 오답을 얻을 수밖에.
생존의 길은 고독한 법. 애초에 시험 따위의 이상개체에 의존한 게 잘못이다. 필요한 자원이 있으면 스스로의 힘으로 구하고, 만든다.
이연우가 엉금엉금 기어 다니며 잡동사니를 뒤졌다. 증명사진을 주웠고, A4 용지를 꺼냈으며, 접착제를 찾고, 컴퓨터 사인펜 옆에 전부 두었다.
이연우는 신중하게 자격증을 만들었다.
‘남의 보증에 기대면 안 되지.’
오늘 겪은 것처럼 남의 마음대로 갑자기 취소될 수도 있고, 대가를 요구받을지도 모르고, 뭔가 간섭당해 위험한 일을 겪을 수도 있다.
그럴 바에는 스스로 만드는 편이 나았다.
철퍽, 접착제가 잔뜩 묻은 증명사진이 A4 용지에 삐뚜름하게 붙었다. 이연우는 그 아래로 글을 썼다.
[인간자격증]
- 성명 : 이연우
- 내가 인간임을 내가 보증하고 증명함.
- 유효기간 : 내가 죽을 때까지.
이제 마지막 준비만 남았다.
이연우는 두 손을 탁자 위에 편하게 늘어뜨리고, 눈을 감았다. 그가 중얼거린다.
“이거 이상개체로 만들어야 해. 그게 생존에 도움이 되잖아. 오염 방어도 그렇고, 주사위도 꼭 필요해. 오늘 봐. 그냥 빼앗기고 끝이잖아. 자격증으로 오염 막고 주사위 6레벨 올려야 다양한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한다고.”
생존본능이 일하도록 자극하고.
“주사위야. 너도 그래. 6레벨 돼야지. 언제까지 이렇게 살 거야. 대성공 띄우자. 저번에 밀웜 머리나 지우개 수준만 만들자.”
주사위를 설득한다.
6레벨은 만들고 싶다고 만들어지는 게 아님을 안다. 그러나 밀웜 머리처럼 6레벨에 근접한 것은 만들 수 있다.
이런 말이 효과가 있는지는 몰랐지만, 자기 암시를 걸듯 이연우는 중얼중얼 혼잣말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이게 나의 인간자격증일 가능성.”
데구르르-
주사위가 구른다. 어지럽게 흔들리는 가능성 사이로, 생존본능이 실패와 대실패가 나오는 미래를 피했다. 억눌렸던 주사위가 기지개를 켜듯 꽝을 밀어냈다.
성공과 대성공 사이에서 가능성이 꿈틀거린다.
마지막으로, 이연우는 생각 없이 주먹을 쥐는 시늉을 했고.
대성공!
결과가 나왔다.
이연우가 만든 어설픈 종잇조각은 이연우만의 인간자격증이 되었다. 그것도 자아 보호와 인간성 유지에 굉장한 힘을 발휘하는 자격증이다.
이연우가 흐뭇하게 웃었다.
‘이러면 시험이 부정하든 말든, 누가 뭐래도 아무튼 인간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