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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종방어장치 : 세계 개변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에 그 목적이 임시 이름으로 지어진 장치는 세계를 다시 쓰기 위한 것이었다.
멸종하는 위기가 온다면 그런 위기는 없었다고, 지구는 사실 평평하다고, 이상기후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현실을 개변하기 위한 장치.
하지만 미완성의 장치인데도 억지로 가동한 결과가 지금이었다.
펑-!
장치가 터졌다. 비밀리에 지어진 부서의 건물에는 붉은 불이 들어오고, 사이렌이 요란하게 울렸다.
에에에에엥-!
“아니, 그러니까 천천히 하자니까! 실험은 시작도 못 하고 장치만 날려 먹었잖아!”
참관을 위해 찾아온 이사 셋이 허겁지겁 내달리고 있었다.
기껏 이상한 세상을 만들 기회를 만들었건만, 무리한 진행으로 장치만 터졌다.
함께 달리던 다른 이사가 훅훅 숨을 몰아쉬다가, 힘겹게 소리를 질렀다. 힘겨운 목소리가 비명처럼 터졌다.
“아니, 평행세계 다 뒤져도 이상異常을 보호하려는 곳은 우리밖에 없는데! 무리를 안 하게 생겼나!”
“무리해서 터졌잖아! 저거 다시 만들려면 얼마나 힘든데!”
그들은 숨 가쁘게 달리면서도 서로 삿대질하면 싸우기 시작했다. 기본적으로 서로를 견제하는 조직이 이사회였다. 사적인 감정이 좋을 리가 없다.
“난 분명히 반대했어!”
“아니, 이 사람이 진짜!”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이사들이 진짜 싸우려고 들자, 다른 이사가 빼액 소리를 내질렀다.
“일단 도주, 아니, 전략적 후퇴부터 먼저 합시다. 지금 이사회 대기 중일 텐데 거기부터 참석해야지!”
회사의 두뇌와 같은 이사다. 말랑말랑하고 연약한 것까지 똑같았다. 평범한 사람들이라 사고의 파편에만 스쳐도 위험하다.
이곳의 이사 셋이 단번에 무력화되면 회사의 상당 부분이 마비됐다.
이상보호라는 사명을 떠올린 그들이 비장한 얼굴로 도망쳤다.
얼른 부서를 벗어나, 인근의 안전가옥으로 들어가, 잠깐 숨을 돌리다가 얼른 화상회의에 접속했다.
각자 다른 방에서 컴퓨터 앞에 앉았다. 마이크가 먼저 연결되었고, 참관했던 이사가 침울하게 말했다.
“실험은 시작도 못 했어. 장치가 터졌지 뭐야.”
그 말을 끝으로 이사는 눈을 질끈 감았다. 가장 강력하게 찬성하던 사람으로서 할 말이 없다. 아마 책임을 씌우고 물어뜯으려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는 소리가 없다. 아니, 헛웃음, 끅끅대는 소리, 절망하는 신음 따위만 희미하게 흐른다.
참관했던 이사들이 의아하게 화면을 보았다.
“다들 몰골이 왜 그래? 실패했어도, 나쁜 상황은 아닌데.”
“내가 반대하긴 했는데. 찬성하신 분들이 그렇게, 음, 실망할 사고는 아니요.”
화면에는 머리가 엉망이 된 이사, 안경이 금 간 이사, 눈이 탁하게 풀린 이사, 손톱이 엉망인 이사가 있었는데, 다들 상태가 엉망이다.
그중 어떤 이사가 실실 웃으며 말했다.
“실험?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실패했습니다. 하하. 우리가, 우리가 누군지 잊어버렸네요? 우리 사명을 우리 손으로 잃어버렸네요?”
“그게 무슨….”
참관했던 이사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
이상보호회사. 세상이 적대하는 이상異常을 보호하는 회사. 수많은 평행세계 중에서도 유일하게 이상異常을 보호하는 회사.
오직 그들만이 이상異常을 보호한다는 숭고한 사명을 지녔다.
그때였다. 실실 웃던 이사가 손짓했다.
“실험 시작 전에 백업했던 자료입니다. 평범한 방이랑 다른 차원에 보관했던 실험 계획서와 만약을 대비한 문서를 보세요. 우리가 원래 무엇이었는지.”
자료가 전송되었다. 가장 높은 보안으로 보호되는 자료는 느리게 열렸다.
참관했던 이사들은 느릿하게 차오르는 로딩 창을 보며 불안을 느꼈다. 뭔가 잘못됐다. 입이 바짝 마르고, 손이 떨린다.
그리고, 문서가 열렸다.
실험계획서.
평범한 세상을 만들기 전 세계 개변 장치를 시험 운용한다. 목적은 안전조치 001의 현상화. 이상異常을 억누르는 힘이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세계로 만든다.
기록문서.
우리의 사명. 이상異常으로부터 인류를 보호하라. 우리는 인류보호회사다.
“이게, 이게.”
“…확실합니까? 뭔가 잘못된 거 아닙니까?”
충격이 머리를 때린다. 온갖 감정이 본능적으로 솟았다.
“말이 안 되잖아. 내 기억이, 세상에 남은 기록이 이렇게 명확한데! 우리는 이상異常을 보호하는 사람들이야!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는 저 불쌍한 이상개체를!”
부정.
“이 자료에 뭔가 문제가 있지는 않습니까?”
의심.
“…인류보호회사였다고 쳐도, 이 세상에서는 굳이 인류를 보호할 필요는 없습니다. 차라리 지금처럼 이상異常을 보호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습니다.”
타협.
다른 이사들이 이미 지나쳐왔던 과정이었고, 그 이사들이 그렇듯 빠르게 현실을 수용했다.
탄식이 흘러나왔다.
“망했군. 우리조차 개변된 거야. 회사조차.”
회사조차 다시 쓰였다. 그들의 가장 소중한 사명이 반대로 뒤집혔다.
이사들은 그 현실을 받아들였다. 가슴속에서 타오르는 이상보호라는 사명을, 냉정한 정신으로 억눌렀다. 인류보호라는 목적을 억지로 머리에 되새겼다.
문득 누군가가 의문을 품었다.
“왜 이렇게 된 겁니까? 이상異常을 적대하는 세계는 장치가 폭주해서 과도한 결과가 나왔다고 칩시다. 그런데 우리는 왜 개변됐습니까?”
“모르지요. 가능성이야 많으니까요.”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가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었다.
“세계 개변 장치가 뜻밖의 결과를 냈을 가능성. 황금만능주의와 충돌했을 가능성. 협회장이 세계를 움직였을 가능성. 숭배자는.”
“숭배자는 아닙니다. 그가 간섭했으면 지구가 지옥이 되었을 겁니다.”
그 반박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세상을 지옥으로 만드는 자가 세계 개변에 손을 썼다면, 지금처럼 온건한 세계가 만들어질 수가 없다.
지금 당장 악마자치구를 지키겠다며 나와 있는 악마숭배자의 주변만 해도….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뒤늦게 말을 이었다.
“…이연우는 어떤가요? 6레벨에 오른 주사위라면 간섭할 수 있을 텐데요?”
“그것도 좀.”
주사위가 간섭했다면 또 다른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그들은 이연우가 주사위로 6레벨에 올랐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정확한 사태를 파악하지 못했다.
본래라면 이번 사고로 이상異常을 말살하는 세상이 되었겠지만 황금만능주의가 개변을 약화했고, 생존본능과 주사위가 힘을 합쳐 회사를 뒤바꿨다.
생존본능이 인류보호회사를 이상보호회사로 만든 이유가 천천히 흘러나왔다.
“…어쨌든 실험 결과는 긍정적입니다. 이제 미래를 생각합시다.”
이상異常을 적대하는 세상이다. 애초에 이상異常이 존재하지 않는 평범한 세상은 아니더라도, 인류 보호라는 목적에는 유리하다.
예를 들어, 힘으로 이상개체 배제하기.
“이런 세상이라면 인류의 무력만으로 충분히 다른 이상異常을 전부 파괴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피해는 있겠지만, 몰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사들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 말을 꺼냈던 이사조차 바로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하군요. 회사원들이 말을 들을 리가요.”
이상보호라는 사명감을 가진 회사원들이 이사의 명령을 순순히 들을 리가 없다. 오히려 이사들의 정신이 돌아버린 줄 알고, 새로운 이사회로 대체하려고 할 것이다.
B라는 사람의 몸에 A의 두뇌가 심어진 것이다. 이사라는 두뇌의 명령을 몸이 따를 리가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본래 세상보다는 약해졌겠지만, 그들은 여전히 6레벨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6레벨의 기준. 세상에 대적하는 자. 세상의 압박을 이겨낸 그들은 이상세계의 왕으로 군림하며 성채를 쌓았다.
혼자 나돌아다니는 이연우든, 성채를 쌓은 왕이든 핵무기만큼이나 위험한 것은 사실이다.
“회사만 멀쩡했어도 한번 싸울 만한데….”
아쉬움 가득한 한숨이 곳곳에서 흘러나왔다. 최상의 컨디션으로 싸워야 할 강적, 엉망인 몸 상태.
그때였다.
이연우를 담당하는 이사가 어떤 연락을 받더니, 눈꼬리를 파르르 떨었다.
“문제가 생겼군.”
“개변보다 큰 문제인가? 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도 못 떠올리고 있는데?”
“어떻게 보면.”
잠깐 침묵하여 다른 이사의 시선을 끈 그가 말했다.
“이연우가 다른 집단에 접촉한다는데. 정보부가 얻은 정보에 따르면, 그냥, 이 세상이 살기 불편해서 손을 잡고 뜯어고치겠다고.”
“…어떤 세상으로 만들려고 하는데?”
불안한 질문에 이사가 답했다.
“이상친화적인 세상.”
왜냐면 이 세상은 이연우에게 불편하고 조금 위험하니까.
이연우를 담당한 이사의 머릿속에 불길한 상상이 떠올랐다.
‘이연우. 우리와 함께할 수 있을까?’
평범한 세상이라는, 지금의 그들에게는 낯선 그 목표를 같이 꿈꿀 수 있을까? 어쩌면, 세상을 등에 업은 지금 제거해야 하지 않을까?
***
이연우는 도시 한복판에 위치한 고층 빌딩 앞에서 멍하니 입을 벌렸다. 빌딩이 번쩍번쩍 빛났다. 돈이 남아도는지, 외벽을 황금으로 도배했다.
아니, 단순한 황금이 아니다.
“오염? 아니, 와. 세상을 물들인다고?”
황금만능주의가 침식하고 오염시킨 세상이다. 클럽의 본진이자, 그들이 황금으로 쌓은 왕성. 세상에 대적하는 황금만능주의가 일군 땅.
다시 쓰인 세상에 맞게 6레벨은 자신의 존재를 유지했다.
이연우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호흡이 편했다. 이곳의 세상에는 적대적인 성질이 없었다.
‘이런 방법이 있구나.’
세상과 싸워 자신의 영역을 만드는 방법에 이연우가 감탄했다. 생존본능으로는 따라 할 수 없지만, 주사위가 6레벨에 오르면 비슷하게 영역을 형성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때 빌딩 정문이 열리며 어두운 안색의 비서가 다가왔다.
“최상층에서 회장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연우가 활짝 웃었다.
역시 친구다. 세상을 바꾸는 일로 대화를 나누자니까, 곧바로 만나주지 않나.
“빨리 갑시다.”
이연우가 비서를 따라 빌딩 안으로 걸어 들어갔고, 빌딩이 찬란한 황금빛으로 발광하기 시작했다. 마치 경고등이 켜진 듯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