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메이크
빌딩 안은 한산했다. 주변에 돌아다니는 사람도 없고, 황금빛만이 무기질적으로 반짝이고, 웅웅 낮은 기계음 같은 것이 들린다.
넓은 공간에 오직 이연우와 비서가 걷는 소리만이 인기척으로 존재했다. 이연우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분위기가 좀, 망하기 직전의 직장 느낌인데.’
직장인은 다 탈주하고, 작업장만 남은 느낌.
이연우가 온다길래 다들 긴급하게 대피시킨 것이었으나, 그 사정을 모르는 이연우는 클럽 사정이 많이 안 좋나 걱정하기 시작했다.
‘협력 못 하는 거 아니야? 세상 바꿀 힘도 없으면 어쩌지.’
이연우가 힐끔 비서를 곁눈질하며, 지나가듯 말했다.
“그, 클럽 사정이 안 좋습니까?”
순간 비서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히고, 생각이 고속으로 회전했다. 이 상황에 적절한 답.
‘가깝게 둬도 안 되고, 멀리 둬도 안 되는 인간.’
상황이 나쁘다고 말해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기도 애매하고, 상황이 좋다고 말해 다가올 빈틈을 내주기도 애매하다. 어느 쪽을 택하든 손해를 선물하는 클럽의 천적이다.
비서는 생각했다.
‘애초에 이 세상에서 영역도 안 만들고 혼자 잘만 돌아다니는 미친 자야.’
회장만이 아니라, 다른 6레벨도 영역 바깥으로 나오지 않는데 말이다.
저것과 연관된 사항은 일개 비서가 판단할 일이 아니었다. 비서가 마른침을 몰래 삼키며 고개를 흔들었다.
“죄송합니다. 저는 일개 회원이라 함부로 말할 수가 없습니다. 회장님께 여쭤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아.”
이연우는 이해한다는 듯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입단속을 했다면 어쩔 수 없다.
어차피 회장한테 물어보면 되기도 하고.
그들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최상층으로 올라갔다. 부드럽게 상승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매끄럽게 열렸다.
이연우가 눈을 크게 떴다.
엘리베이터 너머에는 벽 없이 기둥만 드문드문 서 있는 층이 넓게 펼쳐졌다. 전면유리창 앞에는 클럽 회장이 노란 햇빛을 후광처럼 두른 채 서 있고, 층의 중심에는 황금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얼굴 조각상이 있다.
클럽 회장과 황금만능주의. 그럭저럭 친구라고 해도 괜찮은 존재.
이연우가 희미하게 웃으며 엘리베이터 바깥으로 성큼 나섰다.
“얼굴을 직접 보는 건 처음인데. 안녕하십니까. 이상보호회사의 이연우입니다.”
유리창 앞에서 도시를, 세상을 내려보던 회장이 몸을 돌렸다. 회장의 얼굴에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포커페이스가 깔렸다.
찰그락-
회장이 손목을 뒤틀어 손목시계를 보았다. 째깍째깍 움직이는 초침.
“3분 드리겠습니다. 절 설득해보십시오.”
이연우가 이곳에 온 순간부터 황금의 소모량이 증가했다. 세상의 배척을 막는 것에 더해, 이연우가 자연스럽게 흩뿌리는 가능성과 이상한 운명까지 막고 있다.
바깥과 안쪽에서 동시에 공격받는 셈이었다. 최대한 빨리 내쫓아야 했다.
이연우가 중얼거렸다.
“3분은 너무 짧은데.”
세상을 바꾸자는 거대한 목표. 그것을 설명하고 설득하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지만, 회장은 단호하게 손을 내저었다.
“그 이상 머물면 공격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황금이 얼마나 소모되는지 생각하십시오. 20초 지났습니다.”
그제야 이연우는 다른 인테리어에 눈을 돌렸다.
웅웅 모터음을 내는 컨베이어 벨트가 황금을 싣고 느릿하게 돌아갔다. 입을 살짝 벌린 조각상의 앞에서, 띄엄띄엄 거리를 둔 금괴가 툭 떨어졌다.
그때, 회장이 다시 말했다.
“5초 더 지났습니다.”
“아니, 그래도 컵라면도 아니고 3분은 너무 짧지 않습니까.”
“2분 30초 남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컵라면 안 먹습니다.”
이연우는 불퉁 입술을 내밀었다가, 가까스로 회장을 이해했다.
‘컨베이어 벨트 속도가 느리긴 해도, 금괴잖아.’
단어 그대로 시간이 금이다. 1분 1초를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인지 가늠도 안 갔다. 금값을 몰랐다.
이연우가 목을 몇 번 가다듬고는 말했다.
“힘을 합쳐 이상친화적인 세상을 만듭시다. 지금 세상은 너무 불편하잖아요.”
순간, 회장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맞다. 세상은 불편하다. 6레벨이지만 감옥에 갇힌 죄인처럼 영역 안에서만 살아야 했으니까. 영역 바깥으로 나가면 매 순간이 세상과의 전쟁이었다. 전부 무의미한 지출이란 말이다.
하지만 손해 없이 자유롭게 세상을 돌아다니는 이연우가 저런 말을 하니 놀리는 것 같다.
‘네가 불편하면 나는, 다른 6레벨은 도대체 뭐-’
포커페이스가 깨지려고 한다. 무표정에 균열이 갔다. 회장은 얼른 정신을 가다듬었다.
“목적은 좋습니다. 하지만 지나치게 위험한 사업입니다.”
“위험한 느낌은 없는데….”
이연우가 불만스럽게 중얼거리자, 회장은 숙련된 진행자처럼 자연스럽게 말을 받았다.
“성공한다면 좋습니다. 하지만, 이 사업에 들어갈 황금은 그야말로 막대한 양일 겁니다. 실패로 돌아가는 순간 회수하지 못할 손해를 떠안는다는 말입니다.”
사업가가 논리정연하게 설명한다.
“클럽이 휘청이면 다행이고, 망할지도 모릅니다. 세상이 이 모양이라 황금 조달에 조금의 문제라도 생기면 치명적입니다.”
대화 능력이 떨어지는 이연우는 멍하니 앵무새가 되어 같은 말을 반복했다.
“하지만 이대로 살기는 불편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바꿔야죠. 살기 좋게, 안전하게.”
“그러니 더더욱 무모하게 도전할 필요가 없습니다.”
회장이 한 손을 뒤로 펼쳤다. 전면 유리창과 그 너머로 내려다보이는 도시.
“그동안 꾸준히 투자한 황금으로 영역을 구축했습니다. 이제 유지비용도 많이 낮아졌고, 클럽의 수익도 점차 증가하는 추세입니다.”
“아니, 그래도, 그래도.”
이연우는 말을 버벅댔다. 논리에서 밀렸다. 그렇다고 주사위로 ‘설득’하자니, 상대도 동급의 힘을 지녔다.
결국 이연우가 아쉬움 가득한 한숨을 뱉었다.
“아, 그러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예술가 협회장이나 악마숭배자를 설득하면 뭐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그 순간이었다. 회장이 기겁했다.
‘이 인간이 멋대로 움직이겠다고?’
이연우의 정보는 충분하게 확보했다. 그렇기에 안다. 이연우가 엮인 일치고 멀쩡하게 돌아간 경우가 있던가? 없다.
심지어 6레벨에 올라, 세계를 건드린다고? 무슨 사고가 어떻게 터질지 몰랐다. 그 여파는 갑자기 전쟁이 터지거나 자연재해가 몰려와 주식 시장이 엉망이 되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시계를 곁눈질한 회장이 달래듯이 말을 내뱉었다. 그 어조가 급했다.
“서두르지 않으셔도 됩니다. 살기 좋은, 안전한 세상은 시간이 흐르면 찾아옵니다.”
사실 이런 말까지 할 필요 없지만, 이연우를 멈추기 위해 회장은 자신의 비전을 꺼내놓았다. 회장이 보는 미래.
“지구에 있는 6레벨을 생각하십시오. 어디 한둘입니까? 길지 않은 시간이 지나면 결국 우리가 세상을 전부 침식할 겁니다.”
영역은 시간이 흐를수록 넓어졌고, 미래에는 6레벨의 영역이 세상을 전부 뒤덮을 것이었다.
이상보호회사 또한 그런 세상을 바랄 것이고.
이연우는 그 말에 혹했다가도 얼른 정신을 차렸다. 이건 그가 원하는 세상이 아니다.
‘이상적대적인 세상이나 다른 6레벨의 세상이나 그게 그거지. 내가 원하는 건 이상친화적인 세상이야.’
심지어 주사위의 세상도 원하지 않았다.
앞으로 걸으면 무작위 좌표로 이동하는 세상? 생물이 무생물이 될 수도 있고, 무생물이 생물이 될 수도 있는 세상? 시간과 중력이 뒤죽박죽인 세상?
‘그건 아니지.’
이연우는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그리고는 어색하게 웃었다.
어쨌든 클럽 회장이 꿈꾸는 미래와 자신이 원하는 미래가 다르다.
“일단 알겠습니다. 거절당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해서 머리가 복잡하네요. 다시 생각해봐야겠습니다.”
“현명한 판단입니다. 때로는 시간이 가장 훌륭한 자원이 되기도 하죠.”
회장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짧게 숨을 뱉고, 알게 모르게 흐트러졌던 평정을 회복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이어지는 이연우의 말에 평정이 와르르 무너졌다.
이연우가 슬며시 말했다.
“그런데 뭐 선물 없습니까? 모처럼 놀러 왔는데…. 클럽의 본진이면 유명 관광지 느낌이라, 약간 기념품 같은 거 챙겨가고 싶은데.”
“…시간 거의 다 됐습니다. 그만 가십시오.”
“진짜 뭐 없습니까?”
이연우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협력에 실패했으니, 뭐라도 하나 받아 갈 생각이다. 그 굳센 의지가 눈동자에 고스란히 표출되었다.
회장이 손끝을 벌벌 떨었다.
‘소, 손해. 손해야. 손해라고.’
하지만 이러는 동안에도 시간은 째깍째깍 지났고, 황금만능주의의 영역에 가해지는 부하가 심해지고 있다.
회장이 이를 앙다물었다. 애써 합리화했다.
‘폭탄 제거 비용이라고 생각해. 사고 예방, 더 큰 손실을 막기 위한 투자.’
결국 회장이 비서에게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시간을 사는 지폐. 사용 순서 1순위로 보관한 것 전해주십시오.”
1순위는 유효기간이 얼마 안 남은 물건이다. 이상적대적인 세상, 물품 형태의 이상개체는 음식의 유통기한처럼 유효기간이 존재했다.
유효기간이 지나면 효과가 사라지거나 망가지거나 완전히 파괴된다.
비서가 허겁지겁 핸드폰을 두드렸다. 그리고는 얼른 이연우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1층에 준비될 겁니다. 빨리 가시죠.”
“예. 그럼 가보겠습니다.”
그럭저럭 이득을 본 이연우가 활짝 웃으며 회장에게 인사했고, 회장은 마지못해 고개를 숙였다.
***
과연 1층에 내려오니 5만 원 지폐가 몇 개의 상자에 담겨 있었다. 보아하니 운송 드론이나 로봇 같은 것이 옮긴 듯하다.
이연우가 느긋하게 상자를 확인하자, 비서는 초조하게 발을 굴렀다.
“이연우 님. 최대한 빠르게 나가주셔야 합니다. 빌딩이 버티지 못합니다.”
“아. 일 하나만 하고 나가겠습니다.”
상자를 이리저리 살피던 이연우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상자가 마침 잘 타는 재질이다. 에코백으로 손이 들어간다.
비서는 무어라 입을 열려다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연우가 갑자기 휘발유가 담긴 통과 가스 토치를 꺼냈다.
“아니, 아니! 지금 뭘!”
콸콸콸!
휘발유가 상자 위로 쏟아진다. 흥건하게 바닥으로 번지는 기름 위로 이연우의 미소 띤 얼굴이 비쳤다. 그리고, 가스 토치의 푸른 불꽃이 쏘아지고.
화르륵, 붉은 불꽃이 솟구쳤다. 비서가 펄쩍 뛰었다. 경악한 목소리가 나온다.
“아! 뭐 하는 겁니까! 왜 여기서 불을-”
“이왕 받은 거 여기서 써야 효과 좋지 않습니까.”
이연우는 평온하게 말했다.
이상적대적인 세상에서 지폐를 쓰면 효율이 많이 떨어진다. 시급이 만원이면 그보다 훨씬 많은 돈을 써야 1시간짜리 노동이 완료되었다.
반면에, 황금만능주의의 영역인 이곳에서는 적은 돈으로 더 많은 시간을 살 수 있다.
이연우의 눈동자에 일렁이는 화염이 맺혔다. 그는 지폐로 무엇을 살지 정했다.
‘주사위의 오염에 드는 시간을 사자.’
지폐는 어차피 유효 기간 있는 이상개체. 지금 이 자리에서 자신의 강화에 모조리 쏟아붓는다. 왜냐면 세상이 위험하니까. 천천히 기다릴 여유는 없으니까.
순식간에 지폐가 타오르고, 이연우는 시간을 샀다.
이연우가 눈을 감고 허공에 손을 뻗었다. 손가락 끝에서 감각이 느껴진다. 가능성과 확률의 감각. 여기에 생존본능을 더하면….
‘됐다. 조금은 안전해. 세상을 바꾸기에는 조금 부족한 느낌이긴 한데. 다른 6레벨 한 명만 더 손잡으면 괜찮을 거 같아.’
그리고, 소리가 들렸다.
쩌적, 균열이 벌어지는 소리가.
생존본능의 도움까지 받아 한순간에 폭증한 주사위의 힘. 흩뿌려진 가능성.
그것은 뾰족한 송곳이 되어 황금만능주의의 영역에 조그마한 구멍을 뚫었다. 클럽의 본진인 빌딩에 뚫린 구멍이었다.
이연우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허공을 보았다.
“어?”
“아?”
비서도 멍하니 고개를 올렸다. 황금빛이 몰려들며 구멍을 막으려 하지만, 늦었다.
성난 세상이 거센 파도가 되어 몰아쳐, 황금빛을 밀어내고 균열을 키웠다. 강한 충격파가 꽝, 빌딩을 때렸다.
무슨 과자처럼 빌딩이 산산조각 난다. 크고 작은 파편이 비가 되어 쏟아진다.
잘못하면 깔려 죽게 생겼다. 이연우가 눈을 희번득거리며 손을 뻗는 순간이었다.
클럽 회장의 분노 가득한 목소리가 들렸다.
“빌딩 복구, 세상 격퇴, 영역 회복!”
온 세상이 황금빛으로 물든다. 황금빛으로 휩싸인 세상 속에서, 산산이 조각나 떨어지던 파편이 정지했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이어 시간을 거꾸로 되돌리듯 파편이 떨어졌던 궤적을 거슬러 올라갔다. 울퉁불퉁한 파편이 저절로 조립되고 빌딩의 균열이 아물었다.
하지만 밀려 들어온 세상과 황금빛은 치열하게 힘을 겨루고 있었다. 세상과 영역의 경계가 조금씩 밀고 밀린다.
이연우가 얼른 외쳤다.
“돕겠습니다!”
“됐습니다! 그냥, 빨리, 돌아가세요!”
“하지만 제가 실수해서-”
“아니, 돌아가라고! 그게 돕는 겁니다!”
진심 가득한 목소리에 이연우가 머쓱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얼른 몸을 돌려 빌딩에서 도망쳤다.
이연우의 얼굴에는 옅은 감동의 빛이 서렸다.
‘진짜 친구네. 이 정도 실수는 넘어가 주고 말이야. 나도 진짜 친구로 생각하고 더 친하게 지내야겠어.’
이연우가 떠난 자리, 1층에 홀로 남은 비서는 진저리를 치며 얼른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깊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회장님…. 애초에 저 인간하고 친해지려고 했으면 안 됐습니다.”
띵, 열린 엘리베이터 문 너머에서 회장이 금괴를 조각상에 쏟아부으며 탄식했다.
“저도 후회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엮일 때마다 손해만 보는지 모르겠다. 악의가 없다는 게 제일 끔찍했다. 그야말로 클럽의 천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