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류보호회사 (179)화 (179/194)

리메이크

‘생각해, 생각해, 생각해.’

이연우의 손발이 벌벌 떨린다. 든든한 안전장치인 생존본능이 꺼졌다. 로프 없이 번지점프 하는 느낌이 들었다. 아찔한 현기증.

잠시 휘청이던 이연우가 입술을 꽉 깨물고, 한 걸음을 내디뎌 아바돈을 따라갔다.

‘일단 난 손님으로 찾아왔고, 위험할 일은 없어. 그리고…. 애초에 여기서는 안 죽잖아?’

어차피 안 죽는데, 이렇게 불안을 느낄 일인가? 어떻게 보면 이곳이야말로 생존에 최적화된 땅인데? 굶어도 살고, 자연사도 없고, 사고가 터져도 괜찮고.

이연우가 천천히 냉정을 되찾았다. 얼굴에 편안함과 자신감이 돌아왔다.

‘그리고, 뭐. 위험 생겨도 주사위랑 내 장비는 멀쩡하게 있잖아.’

6레벨 생존본능이 없어도, 어떻게든 몸 비틀면 된다. 회사원 생활을 처음 할 당시와는 경험과 능력 자체가 다르다.

기분이 달라지니, 보이는 환경도 달라졌다.

근처에서 혼자 타오르는 지옥불은 황야에서 피어난 꽃 한 송이처럼 보였으며, 하늘을 소용돌이치는 먹구름은 공기 맑은 가을 하늘 같다.

유황 냄새 나는 공기를 듬뿍 들이마신 이연우가 쾌활하게 말했다.

“날씨 좋네요.”

“…날씨가?”

아바돈이 힐끔 하늘을 올려보고는, 다시 이연우를 살폈다.

‘뭐 하는 놈이지?’

이딴 날씨가 좋을 리가. 햇볕 쨍쨍하고, 공기 맑고, 농작물이 풍성하게 자라나는 바깥의 환경이 훨씬 좋은데.

물론 몇몇 악마들은 지옥을 좋아하겠지만….

“혹시 악마신가?”

“예? 아니, 사람입니다.”

두 존재는 멀뚱멀뚱 서로를 마주 보다가, 다시 걸음을 서둘렀다.

***

악마자치구의 안에는 온갖 악마와 숭배자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 모습은 평범한 인간 세상의 거리와도 비슷했으나, 자세히 보면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아바돈과 이연우가 걸음을 멈췄다. 어떤 악마가 바리케이드를 밀고 와 앞을 막았다.

“넌 못 지나간다!”

“길 막지 말고 비켜, 이놈아!”

“넌 못 지나간다!”

몸집이 큰 악마가 헤드랜턴을 딸깍 켰다. 신호등 같은 붉은빛이 켜졌다. 아바돈과 이연우의 발이 굳었다.

악마가 말했다.

“나는 빨간불과 교통정체의 악마! 너희는 한 걸음도 못-”

“우리 주사위 놀이할까요?”

이연우가 가볍게 손을 뻗었다. 교통정체의 악마가 눈을 깜빡였다. 그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빨간불과 교통정체를 관장하는 악마로서 감각이 있다.

‘으아악! 미친놈이다!’

신호를 무시하고, 길이 막히면 탱크처럼 밀고 나가는 미친놈. 그의 권능 바깥에 있는 무언가다.

딸깍! 드르륵-!

순식간에 헤드랜턴을 끈 악마는 바퀴 달린 바리케이드를 쭉 끌고 내달렸다. 악마가 뒷모습을 보인 채 외쳤다.

“살펴 가십시오!”

“저주하지 마! …어휴. 진짜 여기는 사람 살 곳이 아니다.”

아바돈이 버럭 외치고는 지친 기색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연우가 고개를 기울였다.

“저 악마가 저주를 내릴 수도 있습니까?”

“그렇지. 바깥에서 돌아다닐 때마다 무조건 빨간불부터 만나게 하거나, 길이 막히는 저주인데.”

진짜 소소한 저주다. 이연우는 오히려 재밌다는 생각도 들었다. 주사위도 이 환경이 마음에 드는지 꿈틀거리는 기색이었다.

이연우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여기 마음에 드네요.”

죽을 위험이 없어서 그런지, 난장판이 즐거운 장난처럼 느껴진다. 어디 놀이공원이나 테마파크에 놀러 온 느낌?

아바돈이 대충 손을 흔들었다. 손에 잡힌 메뚜기의 눈동자가 빙글빙글 돌았다.

“며칠만 살아보면 지긋지긋할 걸.”

과연 비슷했다.

길지 않은 거리를 걷는 동안, 이연우는 여러 악마한테 붙잡혔다.

도박을 해서 이겨야 보내주겠다는 악마, 신발 너머로도 고통을 선물하는 레고를 도로에 흩뿌리는 악마, 길 잃음과 조난의 악마 따위가 장애물이 되어 길을 막는다.

결국 아바돈이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손을 치켜들었다.

“미친놈들아! 좀, 길 좀 제발!”

성벽 너머에서 검은 폭풍이 몰려온다. 메뚜기 떼였다. 윙윙, 요란하게 날갯짓하며 날아드는 메뚜기 무리가 거리를 휩쓴다.

주변의 악마숭배자들은 허겁지겁 건물 안으로 대피하고, 악마들은 낄낄 웃으며 아바돈을 손가락질했다.

“쟤 화낸다!”

“화났어? 화났어?”

“아아악!”

아바돈의 짜증 가득한 고함을 따라, 메뚜기 폭풍이 주변 악마들을 멀리 날려 보냈다. 길이 텅 비었다.

씩씩대던 아바돈이 얼른 내달렸다.

“저놈들 다시 붙기 전에 빨리 가!”

“…예.”

이연우도 잔뜩 피곤한 기색을 드러내며, 아바돈을 쫓아 부지런히 뛴다. 눈가에 다크서클이 짙게 드리웠다.

‘피곤해 죽겠네. 여기는 좀 아니네. 정신이 지쳐.’

***

방해꾼이 없어져서 그런지, 두 사람은 금방 도시 중앙의 높은 탑에 도착했다. 검은 벽돌로 지어진 탑은 문이 열려 있었다.

아바돈은 거침없이 문으로 들어갔고, 이연우는 침을 꿀꺽 삼키며 계단을 타고 올랐다.

‘악마숭배자. 성격 더럽지는 않겠지?’

지금까지 만난 6레벨들은 그럭저럭 사람다웠다. 머리 이상한 사람을 만날 때도 된 것 같아, 이연우가 속으로 경계할 때였다.

아바돈이 노크도 없이 나무 문을 덜컥 열었다.

“숭배자. 내 메뚜기 좀 어떻게 해줘. 저기 칠죄종 영역 들어갔다가 정신 나갔어.”

“귀찮다.”

어딘가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린다. 문 너머에 서 있던 이연우가 빼꼼 머리를 내밀었다.

탑 최상층에는 원룸 같은 방이 있었는데, 신경질적인 인상의 남자가 신문을 뒤적였다. 음울한 눈으로 신문을 훑는 남자는 아바돈의 부탁은 들은 척도 안 했다.

아바돈이 메뚜기처럼 펄쩍 뛰었다.

“아니, 지옥의 왕이 그게 할 말이야? 네 땅에 사는 백성인 악마가 불편을 호소하면 들어줘야지!”

“나는 숭배자, 평범한 인간이야. 아무것도 안 할 거야.”

“아, 제발. 내가 어떻게 번식시킨 애들인데. 이번 한 번만-”

그쯤에서 숭배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귀찮아 죽겠다는 감정이 얼굴에 비친다.

아바돈이 기대하는 순간, 숭배자가 말했다.

“아바돈. 영역을 제물로 바친 대가로 돌아갈 것을 요구한다. 가!”

진명을 이용해 거래한 계약. 영역은 대여 형식이었고, 가장 기본적인 악마 계약의 강제력이 아바돈을 한순간에 쫓아냈다.

그리고 숭배자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의문의 손님인 이연우를 향해.

이연우는 어색하게 웃었다.

“안녕하십니까. 6레벨 이연우입니다. 중요하게 할 이야기가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회사? 미리 들은 게 없는데.”

“아뇨. 개인적인, 아니, 어, 우리 같은 6레벨끼리 나눌 이야기입니다.”

숭배자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어쨌든 6레벨이니, 악마처럼 막 쫓아낼 수 없었다.

“대충 편한 데 앉아. 물이나 차는 없어. 지옥에는 그런 게 없거든.”

진짜로 탁자에 놓인 찻잔에는 구정물이 담겨 있었다.

이연우는 얼른 탁자 옆의 의자에 앉았다. 그러고는 바로 말했다.

“세상도 바꾸고, 회사도 터트립시다.”

“…그, 정신 멀쩡한가? 나 때문에 머리 이상해진 거 같은데.”

“멀쩡합니다. 사실부터 알려드리겠습니다. 우리 세상은 개변됐습니다. 본래는 이상異常을 허용하는 세상이었지만, 인류보호회사가 세상을 다시 썼습니다.”

이연우가 차근차근 정보를 털어놓았다. 본래의 세상과 회사.

그리고 회사가 새로 설정할 목표와 그 앞에서 이상개체인 자신들이 겪을 위기.

숭배자는 진지하게 들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음울한 눈동자에 희망의 빛이 슬그머니 솟았다.

“망상이 아닙니다. 회사 이사들은 이미 개변 전의 회사로 돌아갔으니, 곧 공격이-”

“잘 됐어. 좋은 일이야. 좋은 일.”

“…예?”

이연우가 우뚝 멈췄다. 뭔가 이상하다. 예상한 반응이 아니다. 숭배자가 웃고 있었다.

“이상異常 같은 건 세상에 없는 편이 좋지.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 수 있잖아.”

그 뜻이 명확했다. 회사의 아군. 이연우의 적.

입이 바짝 말랐다. 이연우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말을 이었다. 설득을 위해.

“회사가 원하는 미래에는 당신도 없을 겁니다. 죽는다는 말입니다.”

목숨의 위협. 하지만 그 근원적인 위협도 악마숭배자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숭배자가 구정물이 담긴 찻잔을 내려보았다.

“나는 존재만으로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어.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지. 숭배자가 되기 전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나 때문에 고통을 받았는지 아나?”

이연우가 슬그머니 일어섰다. 상황이 이상하게 뒤틀렸다. 도망이라도 쳐야 한다.

숭배자가 혼잣말을 계속했다.

“아마 개변되기 전의 세상에서는, 나는 악마들의 차원에 갔겠지. 사람을 해치기는 싫으니까. 지금이야 날 도운 숭배자와 악마를 위해서 악마자치구를 지키고 있지만.”

“…당신을 도운 그 숭배자와 악마도 회사 손에 말살될 겁니다.”

이연우가 희미한 희망을 붙잡아 말하자, 숭배자가 고개를 들었다.

우울과 절망으로 늘어졌던 어깨가 펴졌다. 밝게 빛나는 눈이 이연우를 보았다.

“작은 희생이야. 그들한테도, 나한테도, 사람을 위한 세상을 막을 가치는 없어. 그러니까.”

지옥이 꿈틀거린다. 자그마한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 멋대로 흐르던 먹구름이 숭배자를 중심으로 소용돌이친다.

멋대로 놀던 악마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숭배자와 계약한 대가를 치를 시간이 다가온다.

“인류보호회사는 내가 도와야겠어. 너는 여기서 나갈 수 없다.”

지옥에 폭풍 전의 고요가 내려앉았다. 오직 숭배자의 뜻에 따라서. 그리고, 그 고요가 폭발하려는 순간.

“잠깐!”

이연우가 두 손을 번쩍 들었다. 절도 있게 펼쳐진 두 손이 하늘을 향했다. 항복 자세다.

“절 어떻게 할 겁니까? 죽일 겁니까?”

“못 죽이지. 너도 6레벨이기도 하고, 여기에는 죽음도 없으니까.”

끝없는 싸움으로 발을 묶겠다는 말이다.

“그럼 항복하겠습니다. 포로로 정당하게 대우해주십시오.”

이연우가 곧장 항복했다.

‘생존본능도 자는데 왜 남의 본진에서 싸워.’

솔직히 숭배자 하나나 악마 몇이면 몰라도, 그들 모두로부터 도망치기는 무리다. 괜히 싸우다 다치면 아프기만 하지 않나.

숭배자는 그런 이연우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보다가, 휙 손을 휘둘렀다.

“…이상한 짓 하지 말고 얌전히 있어.”

차르륵-

바닥에서 쇠사슬이 뻗어 나와 이연우의 손목과 발목을 묶었다. 이어, 내리치는 숭배자의 손짓을 따라 바닥이 와르르 무너졌다.

바닥 너머는 횃불이 타오르는 지하감옥이다. 이연우가 수감실로 쿵 떨어졌다.

“아야.”

엉덩방아를 찧은 이연우가 괜히 아픈 자리를 쓰다듬다가, 철푸덕 주저앉았다. 그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니까, 지금 상황이.”

숭배자도 자신도 봉인 상태. 숭배자는 자신을 감시하느라 딴짓은 못 한다. 기껏해야 회사의 이사한테 접촉해 정보를 공유하겠지.

가만히 있으면 회사가 행동해 이상異常 없는 세상을 만들든, 숭배자와 손잡아 암살하든, 어쨌든 위험하겠지만.

이연우가 슬그머니 수감실 천장을 올려봤다.

‘예술가 협회장이랑 클럽 회장이 가만히 있지는 않겠지. 구출하러 올 수도 있고, 내가 숭배자를 묶어두는 동안 두 사람이 회사를 상대할 수도 있어.’

회사와의 전쟁은 이미 시작됐다고 보면 된다. 뜻밖에도 숭배자가 회사 편에 섰지만, 최악의 상황은 아니다.

“상황 봐서 행동하면 되겠어.”

어쨌든 당분간 죽을 위기는 없다.

이연우는 시간을 보낼 겸 핸드폰을 꺼냈다가, 통신이 차단된 상태인 것을 보고, 지루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터벅터벅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횃불을 든 악마가 느릿하게 다가왔다.

“감옥 영역에 사는 악마입니다. 숭배자가 당신 잘 감시하라고 해서, 당분간 제가 옆에 있을 겁니다.”

“무슨 악마십니까?”

이연우의 호기심 섞인 질문에 군인 같은 인상의 악마가 답했다.

“속박, 거주 이전 자유 제한, 감옥 같은 개념을 관장합니다”

“아, 그렇구나.”

잠깐 침묵이 이어졌다. 악마는 무뚝뚝하게 서서 이연우를 지켜봤고, 이연우는 심심함에 눈을 굴렸다.

감옥은 정말로 고요해, 횃불이 화르륵 타오르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다. 횃불 바깥으로는 무거운 어둠이 깔렸고.

문득 이연우가 손을 뻗었다.

“우리 주사위 놀이나 합시다.”

할 것도 없는데, 심심풀이로 신나게 주사위나 굴린다. 대실패가 나오든 대성공이 나오든, 죽지 않는데 참을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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