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딩
모든 사고는 찰나에 일어난다. 하지만 한번 사고를 겪은 사람들은 능숙하게 대처했다.
회사의 개변이라는 희대의 사고를 겪은 회사는 평범한 방에 전쟁의 진행과 6레벨의 위험성 같은 중요한 자료를 미리미리 백업해두었고.
“지금의 기억을 보존해주십시오!”
코앞에서 이연우가 세계를 개변하는 것을 본 회장은 자신을 보호했으며.
“이제는 나한테 상처 주지 않겠다고? 드디어 돌아가는구나!”
“개변? 내가 이곳에 있으면 세상이 지옥이 되는데. 아니, 일단 이상異常이 없는 영역으로! 전쟁이 계속되면 다시 나온다!”
자의적으로 방관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
그리하여 다시 쓰이는 세상.
이연우는 가만히 하늘을 올려봤다. 확률이 0만 아니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세계 개변 장치를 복구할 확률은 굉장히 낮았으나 어쨌든 존재했고, 그건 그가 세계를 개변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연우가 눈을 감았다.
한순간에, 세상이 바뀌었다. 전쟁도 일어나지 않았고, 세상은 이상異常을 허용하며, 회사가 인류보호회사로 존재하는 세상으로.
장치가 일으켰던 개변이 일어나기 직전의 세상이 돌아왔다.
***
눈을 한번 깜빡였을 뿐인데, 세상이 바뀌었다. 확률의 실타래를 가면처럼 쓴 이연우는 가만히 클럽의 빌딩을 보았다.
클럽의 본진은 평범한 고층 빌딩으로 존재했다. 황금으로 도배하지도 않았고, 영역을 만들지도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는 세상이니까.
그저 이전에 소모했던 황금이 소모된 채로 존재할 뿐이었다. 그건 거래로 사용된 것이라 절대적으로 소모됐다.
빌딩에서 비서가 나왔다. 그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이연우의 얼굴을 살피다가 손짓했다.
“이연우 님? 회장님께서 올라오라고 하십니다.”
“갑시다.”
이연우가 침착하게 비서를 따라갔다. 이제 첫걸음을 떼었다. 문제는 여전히 잔뜩 남았다. 평범한 세상을 꿈꾸는 인류보호회사, 회사와 싸울 수밖에 없는 이상집단.
생존본능이 속삭이는 듯했다.
- 전쟁은 멸망이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게 막아야 한다.
이연우는 속으로 대답했다.
‘알아. 미래의 나랑 같은 실수는 하지 않아.’
이왕이면 모두가 함께 사는 것이 최선이다. 상실과 고통을 받아들이느니, 애초에 겪지 않는 편이 낫다.
물론 목숨의 위기가 찾아오면 또 혼자 살겠다고 날뛰겠지만, 이제는 그럴 이유가 없었다.
자신의 목숨만이 아니라 모두의 목숨을 구할 힘이 있었으니까. 여유가 있었다.
‘할 수 있는데 안 할 이유는 없어. 어렵긴 하지만, 불가능하지도 않을 거야.’
스윽-
이연우가 문득 손을 쥐었다. 얼굴을 감싼 확률의 실타래. 그의 두뇌와 얼굴 일부를 대체한 그것이 사람의 형상으로 보일 가능성을 구현했다.
그 가능성의 실타래를 약지에 반지처럼 묶을 때였다. 머릿속 확률의 실타래와 주사위가 충동을 더했다.
-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 회사, 이상집단, 6레벨을 설득할 수 있어? 못하잖아. 그냥 힘으로 짓누르자.
어느새 빌딩으로 들어와 엘리베이터에 탄 이연우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거울을 슬쩍 보았다.
이전과 같은 얼굴. 눈동자에는 주사위가 비쳤다. 단순한 생각으로 막 움직여 혼란을 일으키는 충동.
‘평범한 세상을 포기하라고 이사들 소집해서 협박하고, 다른 6레벨도 전쟁하지 말라고 협박하고?’
이연우가 중얼거렸다.
“그건 아니지.”
냉정하게 충동을 밀어낸다. 주사위와 한 몸이 되었기 때문일까. 오염이 아니라 융합에 가까운 느낌이라, 충동과 감정을 조절하기 쉬웠다.
비서는 힐긋힐긋 이연우를 훔쳐보다가, 혼자 침을 삼켰다.
그쯤에서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비서가 말했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회장님께서 둘이 이야기를 나누자고 하셨습니다.”
“예.”
이연우가 엘리베이터 바깥으로 나갔다. 본래의 세상답게 최상층에는 컨베이어 벨트 따위는 없었고, 회장과 황금만능주의와 테이블과 소파 같은 가구가 있었다.
피곤해 죽겠다는 표정을 지은 회장이 소파에 앉은 채, 이연우를 노려보았다.
“아주 잘하셨습니다. 황금만 소모하고, 이제 회사가 이상말살을 위해 움직여도 못 막겠습니다. 그래, 당신은 완전한 이상개체인데 이제 회사는 어쩔 겁니까?”
최악의 상황이다. 클럽은 황금만 잔뜩 소모했고, 회사는 인류보호회사로 돌아왔다.
지금 상황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모두가 죽을 것이었다.
이연우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천천히 건너편 의자에 앉았다. 그 입이 쉽게 열리지 않았다.
회장이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평범한 총탄 모릅니까? 그거 맞으면 당신도 죽습니다. 그렇다고 당신이 저 숭배자처럼 인류를 사랑할 리도 없고. 대책이 있으니까, 이딴 일을 벌인 거잖아.”
“…대책 없습니다.”
이연우가 짧게 말했다.
정말 없었다. 자신은 정책이니 전략이니 하는 거대한 것을 다룰 능력이 없었다. 개변된 세상에서 움직이며 뼈저리게 경험했다. 직접 손을 대면 혼란만 찾아왔지 않나.
회장이 금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뭐라 말을 하고 싶은데, 욕설이 나올 것 같다.
‘대책 없이, 생각 없이, 저딴, 저딴.’
하지만 이연우는 천천히 말했다.
“생각을 해봤는데, 저는 이익 관계를 조율하고, 집단끼리 외교적으로 어떻게 하는 방법을 몰라요. 그러니까.”
그가 허공을 보다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시선은 회장을 보았으나, 그의 정신은 더 많은 사람을 떠올렸다.
골드버그 클럽, 예술가 협회, 악마숭배자, 인류보호회사.
서로 다른 집단에서 전문가를 모아 해결책을 만든다.
“모든 집단에서 사람들 모아서 회의합시다. 지금처럼 다 같이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 방법을.”
“그게 된다고 생각합니까?”
“예.”
회장이 돌아버리려고 했다. 평범한 총탄을 양산하고, 평범한 세계를 만들 능력이 있는 회사가 그걸 받아들일까?
차라리 싹 다 몰살시키려고 하겠지.
클럽의 회장인 자신도 망하기 전에 회사를 죽이고 싶었고, 협회장이나 숭배자도 극단적으로 나아갈 것이었다.
회장이 답답하다는 듯 손목시계를 풀었다. 손목시계가 대충 소파 구석으로 던져졌다.
“회사가 그걸 받아들일 이유가 없습니다. 결국 전쟁만 남습니다. 다시 말해, 이대로는 당신의 개변에 아무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연우가 잠깐 시계를 보다가 눈을 빛냈다.
“아뇨.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지는 않았다. 왜냐면, 회사의 힘이 압도적이지 않으니까. 시간이 지나면 회사를 막을 수 없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연우가 말했다.
“평범한 총탄은 치명적인 위험이 아닙니다.”
방탄 장비로 막을 수 있다. 황금만능주의로 총기 고장 영역을 만들 수도 있고, 주변의 총기가 격발되지 않을 가능성을 쥘 수도 있다. 협회장은 애초에 총기가 스스로 고장 날 테고.
“전력이 비슷한 지금이니까, 차라리 협상을 하자?”
회장은 등을 소파에 기대며 잠깐 허공을 보았다. 이런저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방법이 없지는 않습니다. 회사만 협조하면 말입니다. 조약을 맺을 수도 있죠.”
이연우가 잘 모르겠다며 눈을 깜빡이자, 회장이 설명했다.
“회사가 평범한 세상과 평범한 무기를 만들지 못하게 하고, 관련 정보를 공개하고, 이상집단은 감사할 권리를 가진다거나. 대신 이상집단도 인류보호를 의무로 가지고 행동하고.”
“좋네요!”
이연우가 박수를 짝짝 쳤다. 확실히 일단 들이대는 것보다는 나은 방법 같았다.
하지만 회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문제는 결국 하나입니다. 회사가 이걸 받아들일 이유.”
“저는 협박만 떠올라서. 아무래도 사람들 모아서 생각을 들어야 하는데….”
이연우는 단호하게 말했다.
“클럽의 인력만 빌려주십시오. 추가로 제가 아는 사람들을 부르겠습니다.”
회장은 마지못해 요구를 들어주었고, 그렇게 회의가 소집되었다.
클럽의 두뇌와 클럽이 친분을 유지하는 악마숭배자 몇과 예술가 몇, 거기에 한때 이상기후를 막기 위해 조직되었던 시계수리공의 몇.
회의가 긴 시간 동안 이어졌고.
그럭저럭 갈피가 잡혔다. 이연우는 희망으로 눈을 빛냈고, 회장도 가능성을 보고 주먹을 쥐었다.
남은 것은 정상회의뿐이다. 회장이 말했다.
“협회장, 숭배자, 이사회, 회장인 나와 당신. 이렇게 모으겠습니다.”
황금빛이 번쩍이며 허공에 화상회의 화면이 만들어졌다. 열 명가량의 사람이 저마다 이상한 표정을 지은 채 상황을 파악했다.
거기에 이연우가 말했다.
“우리 조약 맺읍시다.”
***
- 무슨 조약?
개변이 취소되며 되살아난 이사 중 하나가 떨떠름하게 물었다. 이미 개변과 개변 취소를 알아채고 그 대책을 상의하던 중이었다.
“제가 말하겠습니다.”
회장이 나서서 조리 있게 설명했다.
지구에서 평범한 세상을 포기할 조약. 정보 공개와 감사 권리. 또한 이상집단의 인류보호 의무.
“어차피 세계 개변 장치는 의미 없습니다. 두 번의 개변을 겪은 이상, 대책은 준비했습니다. 회사는 평범한 세계를 만들 수 없습니다.”
어차피 당장 못 이룰 목표이니 적당히 협상하자는 말이다.
어떤 이사가 말했다.
- 우리가 승낙해야 할 이유가 없군. 그래, 다 들켰으니 솔직히 말하지. 이상異常이 없는 세상, 평범한 세상은 포기 못 할 사명이야.
어떤 것은 타협하지 못한다. 단단한 목소리만큼이나 이사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었다.
- 전쟁이 일어나겠지. 그래도 미래를 위해서라면 그 또한 감수할 희생이야.
그쯤에서 이연우가 나섰다.
“그래서 제가 제안하고 싶습니다. 인류보호회사. 이상말살이 아니라 인류의 보호에 그 목적이 있지 않습니까. 전쟁으로 인간을 희생시키느니, 사람을 구하십시오.”
이사들의 시선이 이연우에게 돌아갔다.
배신자를 보는 시선이 아니라, 일어날 일이 일어났다는 표정이었다. 6레벨 이상개체가, 그것도 생존주의자가 평범한 세상을 원할 리가.
이연우 담당 이사가 말했다.
- 우리가 끝까지 함께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 자네가 살기 위해 그런 말을 하는 거라면, 이해는 해. 하지만.
“그 말이 아닙니다.”
이연우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는 기억했다. 거인들의 세상. 애완인간으로 비참하게 살아가는 인간들.
“지구가 아니라 이차원의 인간을 구하라는 말입니다. 지구는 모든 집단이 힘을 합쳐 지키고, 회사는 바깥으로 나아가십시오.”
지구는 그대로 두고, 회사는 이차원에 평범한 세상을 건설한다. 그 세상은 그 자체로 방주이자, 인류의 쉘터가 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