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류보호회사 (187)화 (187/194)

엔딩

회사 앞에 갈림길이 나타났다.

하나는 공멸하는 미래가 선명한 전쟁. 그 대가는 몇 안 남는 지구인과 평범한 세상.

다른 하나는 이차원으로 나아가, 평범한 세상과 새로운 문명을 건설하는 것.

이사들의 얼굴에 고민이 내려앉았다. 눈살을 찌푸리고, 턱을 쓰다듬고,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며 계산하기도 하고.

두 번째 선택지가 생각보다 괜찮다. 인류보호라는 목적에도 충실하고, 장기적인 관점이나 위험 관리 측면에서도.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어, 어떤 이사가 말했다.

- 나쁘진 않아요. 하지만 우리가 지구를 포기할 수는 없어요.

지구의 자원. 80억이라는 인간의 문명과 과학 기술. 그건 전부 회사의 기반이기도 했다. 그 모든 걸 버리고 새로 시작하는 건 너무 위험하다.

회장이 능숙하게 웃으며 손을 저었다.

“회사 보고 지구를 버리라는 말이 아닙니다. 지구는 회사와 모든 집단이 힘을 합쳐 지키자는 말입니다. 회사는 지구를 거점 삼아 이차원을 개척하고요.”

이왕이면 클럽은 이차원에서 황금도 조달하고.

조금의 욕심을 숨긴 회장이 근처의 금괴를 가볍게 주워, 황금만능주의에 바쳤다.

“이 문서들을 전송해주십시오.”

대충 중요한 사항만 적은 문서가 회의 참가자들에게 전해졌다.

- 이건 안 예뻐.

예술가 협회장은 멍하니 문자 나열을 보다가 머리를 흔들었다. 이해하기가 어렵다. 예술 작품도 아니고, 계속 보고 싶지 않았다.

반대로 악마숭배자는 다른 곳에 정신이 집중된 기색이다.

이사들이 서둘러 문서를 읽어내리는 중에, 숭배자가 고개를 돌려 이연우를 찾았다.

- 평범한 공간. 네가 만들었나?

“어, 예. 개변을 취소하기 전에 만들었습니다.”

그제야 이연우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개변 전에 만든 평범한 영역. 평범한 총탄과 평범한 방을 비롯해, 회사가 비슷하게 만들 수 있는 영역이었기에 주사위가 대실패의 힘으로 낮은 확률을 끌어올렸다.

문제는 그 영역이 만들어진 장소가, 악마숭배자의 본진인 악마자치구라는 것이다.

이연우가 눈동자를 굴렸다.

‘이거 문제 되나? 될 거 같은데?’

개변이 취소된 지금도 본진이 사라진 상태인데? 거기 있던 악마도 모조리 돌아갔을 텐데?

‘숭배자가 적이 되면 힘든데?’

지옥은 그야말로 생존본능의 카운터였다. 지옥에 들어가는 순간 그냥 꺼진다. 자신도 안 죽고 사람도 안 죽으니까. 주사위로 맞설 수는 있지만, 숭배자도 쉽게 당하는 사람이 아니다.

이연우가 다리를 달달 떨었지만, 숭배자는 눈을 감더니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복잡한 감정이 섞였다. 후련함, 안타까움, 회한.

숭배자가 종이를 들었다. 보지도 않았다.

- 난 동의한다.

“읽지도 않고 말입니까?”

회장이 눈을 살짝 찌푸렸다. 향후의 미래를 결정하는 자리인데, 너무 성의 없는 것 아닌가.

현재 악마들의 차원에 있는 숭배자는 손가락뼈로 만들어진 붓 같은 것을 들어, 걸쭉한 피를 푹 찍었다.

- 인간을 위한 조약인데 내가 거절할 리가.

무슨 인류를 말살하기 위한 회의가 아니었다. 오히려 인간을 지키는 회의다. 당연히 그 세부 조항이 무엇이든 숭배자는 찬성하였으며.

무엇보다 그의 구원을 찾았다.

- 물론 조건은 있어. 평범한 영역을 내게 양도해. 어차피 악마자치구라 내 것이긴 하지만, 너희가 그곳에 사람 사는 도시를 만들어줘.

슥슥, 붓이 지나가며 핏빛 문자를 새긴다. 그의 유일한 꿈.

- 나는 살아있는 것만으로 주변을 지옥으로 만들어. 그 저주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뭐든 상관없어.

평범한 영역 안에서라면, 숭배자도 한 명의 사람으로 평범한 인생을 살 것이다. 그가 그토록 바라왔지만 결코 이룰 수 없던 인생을.

평범한 세상은 물론 좋지만, 이상집단의 모두가 힘을 모아 지키는 세상도 그 못지않게 안전할 것이었고.

숭배자는 설득됐다. 이연우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회장도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회사가 돕는다면 손쉬운 일이고요.”

그들의 시선이 이사들을 스쳐 지나갔다. 이사들은 멍하니 이연우를 보고 있었다. 문서는 읽지도 못하고, 떨리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 평범한 영역을 만들었다고?

회사조차 우연히 만든 게 평범한 총탄이고, 셀 수 없는 자원과 시간을 투자했는데도 또한 우연으로 만들어진 것이 평범한 방이었다.

평범한 세상조차 세계 개변 장치를 동원해 겨우겨우 현실의 영역으로 끌어내렸는데.

이연우는 그냥 혼자 만들었다고? 그냥?

“어렵지 않은 일이던데요.”

이연우가 가볍게 손을 뻗었다. 손바닥을 모두에게 보이도록. 그 위로 확률의 실타래 몇 가닥이 일렁였다.

“그냥 그런 확률을 붙잡으면 됩니다. 그렇지. 이 또한 조항에 있을 겁니다. 조약의 대가로 제가 제공할 보상으로.”

- 평범한 영역을?

이사들이 눈을 불태우며 이연우를 노려보다시피 주시했다.

따로 자원을 투자하고 기술을 개발할 필요도 없는 평범한 영역? 이건, 이건, 욕심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연우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 말을 더하거나, 개인적인 보상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이번 조약에서 그의 역할을 떠올렸다.

‘나는 도구다. 나는 말단 공무원이다.’

주어진 역할만 수행한다. 괜히 업무 외의 일에 나서지 않는다. 오직 조약의 보상과 강제력으로만 존재한다.

이연우가 설명서를 읽듯 사무적으로 말했다.

“지구의 일부 지역에 제한된 범위의 영역을 만들어드리겠습니다. 물론 해당 영역 내부의 일은 이상집단의 감사를 받아야 합니다.”

- …이차원에는 얼마나 만들 수 있지?

이사가 떠보듯 질문하자, 바로 답했다.

“회사가 원하는 만큼.”

그 순간, 이사들의 마음이 확 기울었다. 평범한 영역이 보장된 이차원? 이사들의 입이 동시에 열렸다. 서로 다른 질문이 우다다 쏟아졌다.

- 그거 완전한 평범인가? 다른 이상개체가 절대로 간섭하지 못하는?

- 지속 기간은? 유지에 필요한 자원은 없나요?

- 얼마나 넓게 만들 수 있나?

묻고 답하는 시간이 이어진다. 이연우는 어떤 것은 바로 대답하고, 어떤 것은 확률을 헤아린 후 말하기도 했고, 어떤 것에는 고개를 젓기도 했다.

한동안 이연우의 능력을 확인한 이사들이 긍정적으로 고개를 내렸다.

-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군.

평범한 공간을 제공받는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전쟁을 포기할 수 있다. 평범한 공간 하나하나가 최후의 쉘터로 기능할 테니까.

평범한 세상도 이차원에 건설하면 되고.

이미 마음이 넘어간 이사들이 마지막으로 문서를 확인했다. 여러 사람이 머리를 쥐어짜서 만든 조약들.

인류보호조약.

- 회사와 모든 집단이 인류를 보호한다. 사소한 문제는 회사 몫이군.

멸망 위기 같은 것이 찾아오면, 이연우를 비롯해 회장과 숭배자와 협회장이 나서기로 했다. 6레벨의 협공이다.

단지 그들 집단에는 전 지구에 걸친 자잘한 사고를 모두 커버할 능력은 없어, 회사가 여전히 나서기로 하고. 정보 자원은 회사가 압도적이니까.

- 지구보호조약은, 우리를 노린 거고.

다른 것은 지구보호조약. 개변이나 평범한 세상 같은 것을 막기 위해 지구를 지금 상태로 두기로 한 조약.

그 세세한 사항을 보면, 회사의 세계 개변 장치 같은 것을 견제하는 조항이었다. 물론 다른 집단의 멸망 수준의 공격, 이를테면 협회장의 전 지구적 테러, 지옥의 확장, 황금만능주의의 거대한 소원도 포함된다.

- 회사의 기밀정보와 연구 공개, 황금의 유동성 확인, 협회장의 방송 제약, 숭배자의 거주지 제약….

그 외에도 여러 문서에 평범한 무기 생산 방지, 감사, 정보 공개 등등이 있다. 회사와 이상집단 양쪽 모두에 사슬을 채우고, 그들 모두가 사슬 끝을 쥐는 형태였다.

슥슥, 문서를 넘기던 이사들이 어느 문서 앞에서 멈췄다.

그곳에는 낯선 단어가 있었다.

- 생존기구? 이건 무슨 집단이지? 감사 권한도 많이 가지고 있는데?

- 인류보호조약, 지구보호조약에도 참가했던데. 처음 듣는 집단인데 언제 누가 만들었나요?

이연우가 잠깐 멍하니 허공을 보며 딴생각을 하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가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등을 쭉 폈다.

“제가 만들 집단입니다.”

- …그대가?

이사들의 눈에 그럼 그렇지 하는 기색이 스쳤다. 집단 이름에 생존이 들어갔는데.

이사들은 대충 넘어가려고 했다. 어쨌든 6레벨이다. 6레벨이 있으면 정상급 집단이다. 생존기구에 대해 뭘 더 물어볼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이연우가 조금 흥분하여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이연우의 얼굴이 화상회의 화면에 확대되었다.

“생존기구는 오직 생존이 목적인 집단입니다.”

- 자네 하나의 생존?

이사 하나가 마지못해 대꾸하자, 이연우가 고개를 저었다.

“인류와 이상異常 모두의 생존.”

인류는 당연히 지킨다. 인류 영역에 닿은 생존본능이 있었고, 그 자신조차 이왕이면 모두의 생존을 바랐다. 가족이나 지인이 인간이니까. 사회는 멀쩡해야 좋았고.

또한 자신이 이상개체가 되어버렸기에, 당연히 이상異常의 생존은 필수였다. 평범한 세상은 절대 안 된다. 죽음의 가능성이 너무 많다.

이연우 담당 이사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들어 이연우를 보았다.

- 그건 회사와 집단 모두한테 적의를 사는 짓 아닌가?

조약은 조약이고, 회의는 회의다. 한순간에 그들이 손잡고 하하 웃으며 하나가 될 수는 없으며, 앞으로도 알게 모르게 다툼이 발생할 것이었다.

그 상황에서 이상개체를 보호하면 회사의 견제를 받을 것이고, 인류를 보호하면 이상집단의 견제를 받을 것이었다.

대놓고 싸우지는 않겠지만, 정보공작이나 정치적인 견제 같은 것이 따라올 텐데.

이연우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도 그게 제 역할입니다. 어느 쪽이든 선 넘지 못하게 막는 것.”

회사와 이상집단의 균형추. 조약의 강제력.

이들 중 한쪽이 선을 넘는 순간 또다시 전쟁이 일어나니까. 한번 보았지만, 그건 진짜 아니었다.

이연우가 몸을 뒤로 빼며 두 손을 들었다. 화상회의에 두 손이 보이도록. 그는 두 손을 위아래로 엇갈리게 움직였다.

“이상집단이 선 넘으면 평범한 영역을 흩뿌릴 겁니다. 회사가 선 넘으면 반대로 할 거고요.”

인류와 이상異常 둘 모두를 지켜야 하는 자가 말했다. 한 손에는 확률의 실타래를 들고, 다른 손에는 생존본능을 집중시킨 채.

그것을 제일 먼저 알아차린 것은 예술가 협회장이다. 심심해 죽으려고 하던 협회장이 눈을 반짝이며 이연우를 보았다.

- 6레벨 둘?

“인류의 생존본능과 전능한 주사위입니다. 이만하면 제가 왜 둘 모두를 지키겠다고 말했는지 이해하실 겁니다.”

협회장이 손을 뻗었다. 주사위는 솔직히 안 예쁘다. 지렁이나 기생충이 공처럼 뭉쳐 꿈틀거리는 것 같아서. 하지만 생존본능은 기이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걸 잡아 쥐려는 손과 움직이는 세상.

이연우가 대충 실타래를 잡아 거부한 뒤,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런 건 좀-”

- 보여주면 조약에 찬성할게.

이연우의 입이 꾹 다물렸다. 저 예술가 협회장의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가 없다.

예술가 협회장은 아이같이 순진했지만 그만큼 맑은 광기를 가졌다. 그녀는 계속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작품도 아닌 사람들이 죽든 말든 알게 뭐람. 아름다운 내가 굳이 지키고 싶지 않아.’

하지만 그렇기에 아이 수준의 협상이 통했다. 원하는 건 작품 하나뿐. 인류의 생존본능이란 위대한 작품을 볼 수 있다면 좋다. 장난감 하나를 얻기 위해 열심히 심부름하고 공부하는 아이 같은 생각이다.

이연우가 피곤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럼 예술가 협회에는 얼굴 비추는 것으로 보상하겠습니다.”

- 좋아! 찬성할게.

“대신 지금 말고 조약 맺은 다음부터 합시다.”

그 광경을 보던 이사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 멸종방어장치….

6레벨 수준의 이상異常이 둘이라서 그렇게 부르는 게 아니다. 오직 인류의 생존본능이 이상異常으로 존재해서 그렇다.

동시에 이 조약의 의미가 새롭게 받아들여졌다.

진실로 인류의 멸종을 막기 위한 조약. 이 조약이 없다면 멸망이 다가온다는 소리 아닌가. 몇몇 이사가 멍하니 혼잣말을 했다.

- 우리가 인류의 멸종을 가져오려 했는가.

“비슷합니다. 개변을 취소하기 전에는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 전쟁은….”

- 아니야. 말 안 해도 돼. 우리도 백업한 자료를 봐서 얼추 알아.

이사들이 슬슬 문서를 정리했다. 대충 넘기고, 흩어놨던 문서를 착착 모았다.

- 조약을 맺는 건 바로 할 일이 아니지. 일단 찬성하지만, 자세한 사항은 천천히 점검하고 수정하지.

“좋습니다!”

회장이 손뼉을 짝 친 후, 흐뭇하게 웃었다. 이만하면 잘 됐다. 조항 하나하나를 두고 기나긴 말싸움이 이어지겠지만, 괜히 손해만 보는 전쟁을 할 필요는 없지 않나.

“새로운 세상이니만큼 우리 모두 생각이 필요하겠죠. 급하지 않으니 천천히 고민합시다.”

그 말을 끝으로 화상회의가 끝났다.

새로운 세상과 질서가 성큼 다가왔다. 이연우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혼자서 마구잡이로 나대는 것보다 훨씬 좋은 결과다.

그가 회장에게 고개를 살짝 숙였다.

“도움 주신 덕분에 잘됐습니다.”

“이 대가는 비싸게 받을 겁니다. 아, 조약에 대한 보상도 챙겨주셔야 합니다.”

회장이 손을 싹싹 비볐다.

비서진을 동원한 대가. 거기에 이연우는 회사와 숭배자에게는 평범한 공간을, 협회장에게는 관람권을 주었으니, 클럽도 뭘 받아야 한다.

이연우는 슬쩍 웃었다. 알게 모르게 클럽한테 받은 선물이 많다. 당연히 챙겨줄 것이었다.

“그럼요. 제가 꼭 신경 써서 드리겠습니다.”

그 말이 협박처럼 들리는 건 왜일까. 회장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아니, 잠깐만. 저 인간이 엮이면, 아니.’

그가 다급하게 외쳤다.

“선물은 됐-”

그러나 이연우는 이미 공간을 이동한 상태다. 이연우는 여유를 가지고 조사반 사무실로 돌아갔다. 조약이 수정되는 동안 일상을 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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