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완결
1.
생존기구의 대표로서 할 일이 많다. 이연우는 이차원을 돌아다니며 평범한 공간을 만들기도 했고, 때때로 불시감사를 나가기도 했으며, 때로는 회사로 쳐들어가 자료를 뜯어내기도 했다.
세계 개변 장치같이, 지구나 세상에 거시적인 변화를 가져올 물건을 확인하기 위해.
그날도 이연우가 본사로 넘어가 멸종방어장치 따위를 조사하던 날이었다.
산처럼 쌓인 서류를 피곤한 눈으로 뒤지던 이연우가 멈칫, 어느 서류를 보았다.
“…이게 뭐지?”
원래라면 대충 읽는 척만 하고 넘어가려고 했다. 사실 이연우는 자리만 지키고, 다른 조사원이 머리 굴려 가며 확인하면 되었으니까.
하지만 그냥 넘어갈 수 없는 글자들이 있었다. 이연우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서류 뭉치를 한 움큼 쥐었다.
그 위에는 ‘멸종방어장치 : 작가’가 쓰여 있었고, 눈에 익은 이름들이 주르륵 나열되었다. 이연우가 그 이름을 소리 내 읊조렸다.
“잠정 명단. 조사반 반장, 최재민, 유지유, 해수대응중대 중대장, 끼인 남자, 김갑동, 악마사냥꾼, 시계수리공, 부조리의 악마, 강열, 이서연, 박상준….”
이연우가 겪었던 사고와 만나보았던 사람과 이상개체의 이름들.
그리고.
“이연우. …나잖아?”
뭔가, 뭔가 이상하다. 여기에 왜 자신의 이름이나 아는 사람들의 이름이 있다는 말인가. 피부 위로 소름이 오싹 돋았다. 기이한 불쾌함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옆에서 감사원들을 노려보던 회사원이 다가왔다. 본사 소속의 직원이라는데, 회사가 조사를 받는 지금 상황 자체를 불편해하는 기색이다.
이연우가 공격적으로 문서를 치켜들었다. 곱지 않은 어조로 말이 나왔다.
“이거 뭡니까? 왜 제 이름이 여기 있습니까?”
“그거야 이연우 씨도 멸종방어장치 신분을 얻었으니까-”
회사원이 지레짐작하고 말하다가 멈췄다.
인류의 생존본능을 확인한 회사가 이연우에게 멸종방어장치의 신분을 주었고, 이연우도 그것을 안다. 괜히 시비 거는 것이라고 봤는데, 아니었다.
그도 알지 못하는 장치와 문서다.
“어…. 저도 모르겠습니다.”
당황한 듯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연우는 그것을 가만히 관찰했다. 마치 목숨을 위협하는 적을 분석하듯.
그 유리구슬 같은 무기질적인 시선에, 직원이 주춤 물러났다. 변명이 쏟아졌다.
“진짜 모릅니다. 멸종방어장치 같은 건 이사만 알거나, 이사도 모릅니다. 독자적으로 돌아가는 독립부서라고 보면 됩니다.”
“확실합니까?”
이연우가 주먹을 쥐었다. 실타래가 잡혔다.
진실만 말할 가능성.
회사원이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놈들이 회사 뒤지는데 회사가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 대충 옆에 서 있으라고 던져놓은 직원이었다.
“정말로 아는 게 없습니다. 이사님께 연락해보십시오.”
“일단 알겠습니다.”
이연우가 한걸음 물러섰다. 지금 이 사람한테 따져 물을 것이 아니다. 멸종방어장치라면 6레벨 비슷한 것. 회사가 숨겨둔 전력이라면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이연우가 다시 집중하여 그 서류뭉치를 읽기 시작했다.
‘세계 개변 장치처럼 뭔가 간섭하는 물건이면, 반드시 확인해야지. 내 이름까지 쓰여 있는데.’
오랜만의 긴장이다. 신경이 팽팽히 당겨지고, 감각이 곤두섰다. 머리에서 생각이 번개처럼 번쩍이며 흘렀다.
자료 창고에 긴장된 침묵이 내려앉았다. 사람들은 이연우의 눈치를 살피며, 종이 넘기는 소리는 물론이고 침 삼키는 소리조차 조심하였다.
오직 이연우가 다 읽은 종이를 거칠게 집어던지는 소리만 난다. 점점 이연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2.
문서만 봐서는 정확한 정보를 알 수 없다. 진짜 비밀부서, 독립부서인지 성의 없이 쓰였다.
멸종방어장치 작가가 무엇인지, 명단은 어떤 사람을 고른 건지, 해당 부서의 이름이나 위치는 어디인지, 자세한 정보가 하나도 없었다. 마치 존재가 지워진 듯했다.
기껏해야 놀리듯이 쓰인, 벽 너머에 있다는 위치가 유일한 단서였다.
한참 동안 서류를 뒤진 이연우가 웃었다.
“재밌네. 오랜만에.”
안전하고 평화로운 일상만 누리느라 조금 지루하던 차였다. 그런데 이런 은근한 위협이 찾아왔다.
6레벨 수준의 멸종방어장치가 자신을 표적 삼았다? 황금만능주의나 숭배자와 투닥거리는 느낌으로 몸을 풀고 놀면 된다.
간만에 활기가 뿜어졌다. 이연우가 기운차게 일어났다.
“이거 담당하는 이사가 누구입니까?”
“바로 확인하겠습니다.”
회사원이 즉각 핸드폰을 들고 연락을 돌렸다. 하지만 조금의 시간이 지나자, 고개를 저었다.
“다들 모른다고 하십니다. 일부러 모른 척하는 게 아니라, 아는 바가 하나도 없다고….”
이연우가 그럴 줄 알았다며 턱을 매만졌다. 문서를 보아하니 완성된 멸종방어장치였다. 미완성의 세계 개변 장치 따위가 아니라, 미래의 자신도 찾지 못했던 방주 수준이라고 봐야 한다.
턱을 매만지던 손가락이 문득 입가를 쓸었다. 이연우가 깨달았다. 자기가 웃고 있다고. 입꼬리가 휘어 미소를 그렸다.
“꼭꼭 숨어라…. 진짜 숨바꼭질인가.”
괜히 콧노래를 흥얼거린 이연우가 눈을 감았다. 얼굴의 실타래가 풀려나오며, 촉수처럼 허공을 더듬는다. 생존본능 또한 달래서 감각을 칼날처럼 세웠다.
‘뭔지 몰라도 핵폭탄 같은 거잖아. 저거 알아둬야 인류 생존의 위협도 대응하지. 그리고 내 이름도 쓰여 있었고. 내가 위험해지면 인류도 위험해지는 거야.’
감각이, 컨디션이 최상의 상태로 올라간다.
쿵쿵, 기분 좋은 심장박동을 들으며 이연우가 손을 펼쳤다. 하지만 그 손 위로 떠오르는 가능성의 실타래가 없다.
“….”
이연우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텅 빈 손바닥을 가만히 내려보았다.
저것의 위치를 자신이 알 가능성, 저것에 대한 자세한 보고서가 자신의 앞에 나타날 가능성 등, 정보를 획득할 가능성부터 찾았으나, 그런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았다.
0퍼센트.
존재하지 않는 것을 구현할 수는 없다.
‘평범함? 아냐. 평범한 장치는 불가능해. 순수한 과학기술로 멸종방어장치를 만들 수는 없어.’
6레벨 수준의 정보 방어다. 주사위로 어떻게 할 수 없으며, 세상을 엉망으로 만들어도 이연우가 간섭할 수 없는 무언가다.
가벼웠던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더 이상 장난이 아니었다.
“이건 아니지.”
갑자기 회사가 발작해 사고라도 치면 대응할 방법이 제한된다는 말 아닌가.
혼자 중얼중얼거리는 이연우를 주변 사람들이 겁에 질린 눈으로 보았으나, 이연우는 무시하고 눈을 감았다.
목숨이 걸린 일이면 존재하지 않는 가능성을 창조하겠지만, 지금이 그 정도는 아니다. 그렇다면 허점을 찾아 우회한다.
‘주사위는 전능의 힘이지. 그 힘을 쓰는 게 나라서 문제야.’
전능이 있으면 뭐 하나. 그걸 가진 게 나약하고 한계 많은 인간인데. 상상의 한계가 곧 전능의 한계였으며, 인식과 감각의 한계가 전능의 족쇄였다.
이연우가 상상의 나래를 활짝 펼쳤다.
‘정보 방어. 멸종방어장치 작가의 정보는 직접 얻을 수 없어. 그렇다면.’
벽 너머라는 단서를 이용한다. 단순한 벽을 말하는 것을 아닐 테니, 벽은 어떤 비유나 은어일 터. 그것만 감지하면 끝이다.
이연우가 가능성을 쥐었다.
인식의 한계를 초월해 벽을 감지할 가능성.
감각이 확장된다. 뻗어나간 실타래가 본래 인식하지 못하던 무언가를 감지했다.
이연우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허공을 보았다. 그 입에 미소가 걸렸다. 경쾌한 목소리가 나왔다.
“거기 있구나.”
그가 성큼 한 걸음 걸었다. 벽을 넘었다.
3.
이름 없는 부서. 멸종방어장치 작가가 설치된 벽 너머의 교차점, 액자.
타자 치는 소리만 들려오는 공간에 비명이 울렸다. 박사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펄쩍펄쩍 뛰어다녔다.
“막아! 어떻게든 막아! 저 바퀴벌레가 찾아오지 못하게!”
메타 동력을 에너지 삼아, 멸종 위기가 오면 세계를 조작할 인류 최후의 보루가 이곳이다. 관계자가 아닌 누구도 침입해서는 안 되는, 아니, 애초에 침입할 수도 없는 장소인데-
그 순간이었다.
박사가 공포에 질린 눈으로 벽을 보았다. 벽에서 손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허공을 허우적거리는 손 너머, 검은 벽에 번쩍이는 두 눈이 떠올랐다.
“찾았다.”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인영이 벽을 넘어 비틀비틀 걸어온다.
박사가 눈을 감았다. 늦었다. 다 망했다. 저 미친 생존주의자가 자신에게 간섭하는 무언가를 내버려 둘 리가 없다.
“여기가 그 멸종방어장치 작가가 있는 그곳 맞습니까?”
뚜둑뚜둑, 관절을 꺾어가며 다가온 이연우가 박사와 거대한 키보드를 두들기는 기계인형을 보았다. 그 눈에 은은한 경계가 서렸다.
‘6레벨?’
황금만능주의나 주사위 같은 전능의 힘이 느껴진다.
다 포기한 박사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 맞아.”
박사는 괜히 바닥을 걷어차며, 질투심과 공포와 짜증 따위가 뒤섞인 눈으로 이연우를 보았다.
저 미친 바퀴벌레. 주인공.
이연우는 일단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실타래부터 쥐었다. 상대가 진실만을 말할 가능성을 구현했다.
“저건 뭐 하는 장치입니까?”
“우리 세상을 이야기 형태로 가공해 메타 차원에 제공하는 장치. 그렇기에 이야기를 마음대로 쓰는 권능을 가진 기계인형.”
그 말은 이해하기 난해했기에, 이연우는 그걸 자기 마음대로 받아들였다.
“이야기…. 소설? 주인공?”
연수 때 보았던 감독이 떠오른다. 영화 촬영 현장처럼 현실을 조작하던 예술가.
대충 비슷한 거 아닐까. 소설이라면 주인공은 죽지 않고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하니, 멸망 위기가 오면 주인공을 만들어 문제를 해결하는 느낌으로.
하지만 그 말이 박사의 어디를 건드렸나 보다. 박사가 갑자기 발작했다.
“그래! 주인공! 너! 미친 바퀴벌레! 너는 주인공이 아니야!”
바깥 차원을 원하던 박사는 주인공을 향해 선명한 질투를 드러냈다.
“본래 이름 없는 부서의 목표는 이런 이야기가 아니었어! 옴니버스! 단편 모음! 우리 세상의 이야기를, 서로 다른 주인공으로 표현하려고 했지!”
그 갑작스러운 발작에 이연우가 주춤 물러났다. 박사는 아예 손가락을 치켜들고 이연우를 삿대질했다.
“그런데 너! 너! 네가 주인공 자리를 강탈했어! 네가 이야기에 간섭해 아예 장르를 바꿨다고!”
원래 계획대로라면 이연우는 인간자격시험을 끝으로 퇴장할 인물이다. 그런데 이연우는 바퀴벌레 같은 생명력으로 자신을 주인공으로 바꾸었다.
물러서던 이연우의 등이 벽에 부딪혔다. 이연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내가 주인공이라고?’
떨리는 목소리가 나온다.
“그러면 내 고향에서 사람이 많이 죽던 이유가.”
“아니. 그건 네 고향이 이상한 건데.”
“…그러면 내가 사고 앞에서도 살아남았던 이유가-”
“그것도 네가 이상한 건데.”
박사가 냉정하게 답했다. 그는, 작가는, 이름 없는 부서는 정말로 하지 않았다. 그냥 이연우가 살아남은 거다.
오히려 그들은 이연우를 죽이려고 했다.
“우리 세상 사람들이 사는 이야기를 쓰려고 했지. 그런데 네가 멋대로 주인공 자리를 빼앗고 이야기가 탈선해서, 우리는 너를 죽이려고 했어.”
연수 중 감독의 난입, 조사원 첫 업무부터 만난 이상개체, 이어지는 멸망주의자의 NPC를 이용한 테러.
그런데 이연우는 살아남았다. 이연우를 죽이고 다른 사람을 주인공 삼아 이야기를 진행하려고 했던 모든 시도가 실패했다.
그쯤에서 이연우가 눈치챘다.
“그러면 내가 사고를 많이 겪던 이유가.”
“맞아. 우리가 그랬어.”
당당한 박사 앞에서 이연우의 눈이 돌아갔다. 평온한 삶을 방해하는 적! 위험한 사고를 몰고 오고 목숨의 위협하는 불안요소!
그나마 이연우가 성장했기에 이연우는 자제했다. 질문이 나왔다.
“저거 작가? 죽이면 문제 생깁니까?”
“아니. 창문이 닫힌다고 집이나 바깥이 사라지나? 눈을 감는다고 세상이 사라지나?”
작가는 그들의 세상을 메타 차원에 이야기 형태로 제공할 뿐이다. 메타 동력으로 세상을 조작하고.
박사가 말했다.
“전화가 끊어지는 것뿐이야. 전화가 끊어져도 사람은 있지. 전화기 너머에서 뭘 하는지 모를 뿐. 이걸 하나하나 설명해야 하나?”
“아하.”
이연우가 눈동자를 희번득거리며 확률의 실타래를 길게 뽑아냈다. 검은 실타래가 채찍처럼 잡혔다.
“그러면 죽어야지.”
손이 뒤로 당겨진다. 이연우가 이를 아드득 갈았다. 작가?
“내 인생에 사고만 가져오는 건 죽어야지.”
“안 돼!”
박사가 정신을 차렸다. 그가 손을 길게 내뻗으며 다급하게 몸을 던졌지만 늦었다.
쐐액-!
이연우의 손이 휘둘러졌다. 실타래가 허공을 가르며 맹렬하게 나아가, 기계인형의 목을 쳤다. 기계인형, 작가가 파괴될 가능성은 깔끔하게 기계인형의 목을 날렸다.
쿵-!
거대한 머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연우는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사고를 겪지 않아도 된다. 드디어 평온한 삶이 찾아왔다.
이연우가 몸을 돌렸다. 그는 벽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세계로. 닫혔지만 열린 세계로.
박사가 비명을 지르고, 목이 떨어진 작가의 몸이 끼긱거리며 느릿하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