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리안, 일어나!”
아, 싫다... 두 번째 삶인데 어떻게 첫 번째 삶보다 더 팍팍할 수가 있지? 원래 인생 2회차면 좀 편해야 하는거 아니야?
어기적거리며 해먹에서 벗어나니 피곤한 표정을 한 우르타의 얼굴이 보인다.
“웬 일이야? 견시대에서 내려오고?”
우르타 녀석, 이 배에 탄 미친놈들 중에서 그나마 정상에 가까운 녀석이지만 광적으로 높은 곳을 좋아한다. 시야가 확 트여서 기분이 좋다나? 지가 무슨 고양이야 뭐야?
“나 입항당직 첫 번이래서 좀 자려구... 오늘 안에 입항할 것 같대.”
“그럼 견시대는?”
“바얀이 올라갔어. 그럼 난 잔다?”
아... 바얀 녀석은 워낙 덜렁대서 좀 그런데? 하긴 항구 근처면 별로 상관없겠지만.
옆에 벗어둔 셔츠를 집어서 입는 사이에 우르타는 내가 내려온 해먹에 올라가서 뒤척이며 자리를 잡는다.
다른 사람이랑, 특히 동성이랑 같이 잠자리를 같이 쓰는것이 퍽 달갑지는 않지만 그래도 우르타 정도면 양호하다.
다른 놈들은 냄새가 어휴... 열흘을 넘게 땀 삐질삐질 흘리고 안씻으면 어떤 냄새가 날거같은가? 거짓말 조금 보태면 쓰레기 냄새가 향기로울 지경이다.
정신이 들자 선실에 가득 찬 코를 찌르는 지독한 땀 냄새에 고개를 절래절래 흔드는데 반쯤 잠이 든 우르타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 리안, 바닥에 뭐가 떨어졌는데? 되게 귀엽게 생긴 단검? 아니 손칼인가? 네 거 아냐?”
해먹 밑을 보자 낯선 과도가 보였다. 그렇다 과도. 전생에서는 집집마다 하나씩은 있지만 현생에서는 처음 보는 그것. 손잡이가 플라스틱이 아니라 나무이긴 했지만 확실히 이 곳에서는 보기 힘든 형태이다.
“고마워, 우르타. 어서 자.”
과도를 집어 들고 갑판으로 나오자 상쾌한, 아니 솔직하게 상쾌하지는 않다.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란 하늘, 그리고 그보다 더 푸른 바다. 그 옆에도 바다, 그리고 옆에도... 웅장한 광경은 개뿔, 이 경치도 5년쯤 매일같이 보면 아주 신물이 난다.
더불어 소금기 가득 머금은 바람 따위, 전혀 상쾌하지 않다. 그저 코가 썩을 것 같은 선실의 공기보다 낫다는게 위안일 뿐. 공기청정기와 에어컨에서 나오는 인공적인 바람이 그립다...
그렇다, 나는 환생했다. 산업시대를 넘어서 정보지식사회로 진입한 2018년의 지구에서 고작해야 15~16세기 유럽 정도의 문명을 가진 이곳으로.
환생자 버프인지 가끔 자고 일어나면 이런 전생에서 쓰던 물건이 하나씩 주어지기는 한다.
이유도 원리도 모른다. 단지 주어지는 것이 대부분 쓸모가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왠지 500년, 600년 후의 물건은 뭐든 엄청 날 것 같지만 그게 젓가락, 사탕, 밥주걱, 나무블록 쯤 되면 돈도 안 되고 쓸모도 없다.
솔직히 사탕은 맛있게 먹기는 했는데, 여기는 설탕도 소금도 지구의 중세보다는 훨씬 흔하다.
그나마 오늘 얻은 과도는 실생활에서 쓸만하기야 하겠지만 이 세상의 제련기술도 상당한 만큼, 형태가 생소할 뿐 그렇게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래도 전생의 지식을 지녔으니 뭐라도 될 줄 알았다. 하지만 거기나 여기나 현실의 벽은 높았다. 하루하루 생존에 치이다 보면 이렇게 되는거다.
“리안! 뭐하는거냐! 입항하기 전에 할 일이 태산이야!”
“네, 네, 항해사님. 지금 갑니다요~”
올해 나이 24세. 내해 무역선인 고드실카호의 5년차 선원. 그게 지금의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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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이세계의 흙수저가 살아남는 방법
“아이 참, 항해사님 요즘 제가 첫 당직에 너무 자주 걸리는 거 아닙니까?”
“흠, 흠. 왜 자꾸 나한테 그래? 선장님이 시키셨다니까?”
“아니, 그러니까 선장님이 왜 하고 많은 선원 중에 절 콕 찍어서 그러냐구요!”
“그거야... 나도 모르지?”
말은 모른다면서 눈을 살살 돌리는 것을 보니 찔리는 것이 있는 모양이다.
“아, 솔직히 말해 봐요. 뭔데요? 애초에 선장님이 일개 선원을 아는 것부터 이상하잖아요!”
“뭐, 네가 능력 있고 믿음직하니까 그렇겠지?”
“능려억? 믿음직? 그게 있고 없고를 떠나서 선장님이 그걸 어떻게 아는데요?!”
“몰라, 몰라! 나 지금 바빠!”
고개를 내젓던 항해사 라비르는 재빨리 해도실로 내뺐다.
하, 늦어도 내일이면 필라비스에 입항할 텐데 뭐 그리 할 일이 많다고...
“리안~! 무슨일이야?”
고개를 들어 마스트 위쪽을 보니 견시대에서 빼꼼히 내밀어진 머리통이 하나 보인다.
아, 보기만 해도 사타구니가 움찔거리는군. 저런 곳을 도대체 어떻게 올라가는거야?
“별일 아냐. 입항 당직 때문에...”
“하하하, 또 첫 당직이야? 오늘 밤에 고생하겠네?”
“오늘 밤은 왜? 밤에 무슨 일 있냐?”
“당직 서야지! 벌써 보이는데 그 필라비스?”
“거짓말 하지마. 내일은 되야 보일... 음?”
그러고 보니 우르타가 오늘 도착한다고 했지? 이번 항해는 신기할 정도로 바람이 좋더니 좀 빨리 도착한 모양이다.
이런 제기랄, 필라비스 항에 입항하자마자 명물 셰리주인 리바예트에 빠져 죽어버리겠다는 원대한 계획은 결국 하루쯤 미뤄야 할 것 같다.
하긴, 이 배의 온갖 멍청이들이 미쳐있는 첫날보다 둘째 날... 에는 다른 배의 멍청이와 미친놈들이 모여 있겠지. 후...
“필라비스까지 얼마나 걸리겠어?”
“아마 해지기 전에 도착할걸?”
“그래? 선미 창고나 정리해야겠네. 다들 어디에 짱박혀 있는거야?”
리안은 배의 구석구석에 숨어서 게으름을 피우던 선원 몇 명을 모아서 선미 창고를 정리했다.
만재배수량이 고작 100톤 남짓한 레프나급 꼬맹이 화물선 주제에 숨을 곳은 더럽게도 많고, 할 일은 끊임없이 생긴다.
그리고 선원들은 게으르고 멍청하지.
입항하기 전에 정리를 좀 해 둬야 화물을 내릴 때 갑판장에게 욕을 덜 먹는다는 것을 알 때가 된 것 같은데, 여전히 마지못해 정리를 하면서도 입이 댓 발 튀어나와 있다.
그나마 리안이 선임 대접을 받기에 망정이지, 다른 녀석들이 시켰다면 대번에 싸움부터 났을게 분명했다.
선원들을 윽박지르고 얼러서 대충 창고 정리가 끝날 때 쯤, 열어놓은 해치로 머리가 하나 튀어나오며 말했다.
“리안, 대충 끝났으면 밥먹어!”
“뭐야, 곧 입항하는 것 아냐?”
“항구 쪽에 문제가 있나봐, 항구 입구에 배가 바글바글해.”
필라비스는 큰 항구다. 얼마나 크냐하면 대륙 전체에서도 다섯 번째로 큰 항구로 꼽힐 정도였다.
그러니까 웬만큼 큰 문제가 아니고서는 항구에 못 들어가는 배들이 바글바글 할 일이 없다는 뜻이다.
아, 작은 문제는 항상 있기 때문에 늘 북적거리기는 한다.
다행히 저녁식사는 나쁘지 않았다.
입항을 못하니 배는 멈춰서 흔들림이 적었고, 조리사 벨이 이번 항해의 마지막 식사라고 생각했는지 아껴둔 말린 야채와 햄을 풀었다.
덕분에 보통 사람보다 미각이 섬세한 리안도 수프 정도는 입에 넣을 수 있었다.
오늘 아침 같은 ‘개도 안 먹을’ 식사였다면 리안은 굶어 죽더라도 결코 먹지 않았을 거다.
다들 오늘 저녁이면 필라비스에 있을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식사를 마치고 나니 할 일이 없었다.
대부분의 선원들은 그대로 선실로 가서 해먹에 몸을 던졌지만, 리안은 갑판으로 나와 항구와 노을을 구경했다.
좋게 표현해서 구경이고 실제로는 냄새나는 선실에 들어가기 싫어서 그냥 멍을 때리는 수준이었다.
“우와, 저기, 저기 봐! 리안! 엄청난 놈이잖아?!”
어느새 옆에 와 있던 네이선이 호돌갑을 떨며 한 쪽을 가리켰다. 무심결에 그 쪽으로 눈을 돌리니 북적북적한 항구 입구의 배들을 밀어내며 우격다짐으로 나오고 있는 거대한 두 척의 선박이 보였다. 순간 리안의 눈이 몽롱해지며 감탄 같은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설마..? 일레드 왕국 신예함 엘베도라?”
“아! 저게 그거야? 신형 중포를 40문이나 달고 있다는 해상요새인가 뭔가 그거?”
“그래, 평범한 소국의 1년 예산이 들어갔다는 괴물이지. 뒤에는 2번함인가?”
“아마도? 그런데 저 녀석들이 왜 여기 있지?”
“글쎄, 문제의 원인이 저것들 이었나보지.”
필라비스는 바티아넨 왕국의 항구였고, 일반적인 경우라면 일레드 왕국의 군함인 엘베도라가 입항할 일이 없었다.
예상대로 엘베도라가 문제의 원인이었는지, 그들이 떠나자 곧 배들이 항구에 속속 입항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리안의 고드실카 호도 밤하늘에 별이 총총 뜰 때쯤에 겨우 항구에 접안할 수 있었다.
어두운 밤중에 이루어지는 입항 과정 중에 고성이 오가는 소소한 문제가 있었지만, 항구를 눈앞에 두고 바다 위에서 밤을 새는 것에 비하면 정말 소소한 문제였을 뿐이었다.
“그럼 리안, 우르타, 배 잘 지키고 있으라고.”
“우르타 너도 친구 잘못 둬서 고생이 많다, 크크큭.”
입항을 마치기 무섭게 배를 내리면서 당직자인 리안과 우르타를 놀리는 선원들에게 리안은 귀찮다는 듯 손을 내 저었다.
저 바보들은 어차피 당직이라는 것이 공평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모르는 걸까?
어차피 선내 총원이 얼마 되지도 않지만, 높으신 분들인 선장, 항해사, 갑판장과 당직자 여섯 명을 빼고 나니 꼴랑 열두 명이라 내리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아마 다 같이, 혹은 따로 술집으로 몰려가서 밤새도록 술을 퍼마실거다.
그리고는 항구의 창녀들에게 오늘 받은 돈을 다 털리고 오겠지.
오늘 남은 당직자들도 날짜가 내일로 밀릴 뿐 하는 짓은 비슷할 거다.
리안은 품속에서 오늘 받은 십여개의 베덴 은화를 만지작거렸다.
8일간 항해에 대한 삯인데, 환전하면 대충 5,000로스쯤 될거다.
술값과 숙박비만 남기고 내일 나가자마자 은행에 넣을 테지만... 그렇게 무려 5년을 죽어라고 모은 돈이라고 해봐야 19만 로스 남짓이다.
이래서야 이번 생에 조막만한 어선이라도 살 수 있을지 모르겠다.
작다고 툴툴거리지만 지금 타고 있는 고드실카 호와 동급인 레프나 급 상선도 120만 로스를 호가한다.
낡아빠진 중고선을 산다고 해도 70만 로스는 줘야 할거다.
“10년을 모아도 힘들겠지... 그냥 바르사 급으로 살까...”
답답한 마음에 중얼거려 보았지만 진짜로 바르사 급을 살 생각 따위는 없었다.
화물도 얼마 못 싣지만, 더 큰 문제는 속도도 느리고, 먼 바다로 나가기엔 너무 위험했다.
근처 항구로 배달이나 할 수 있을까, 흔히 말하는 무역을 하기에는 무리였다.
그래서야 지금이랑 별로 다를 것도 없다.
“이대로는 답이 안 나오는데... 뭔가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해.”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리안의 머리 위로 별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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