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어설픈 밀항자의 속사정(1)
“역시 배를 옮겨 타야할까? 하지만...”
고드실카 호는 기본적으로 내해 항로를 따라 다닌다.
내해는 비교적 바다도 험하지 않고 각 국의 해군이 북적거리니 해적도 거의 없다.
덕분에 큰 위험 없이 돈을 벌 수 있지만, 경쟁자가 많은 만큼 큰 수익을 내기도 어려웠다.
당연히 선원 급료도 짠 편이다. 특별히 기술이나 경험이 많이 필요한 것도 아니라서 어중이떠중이를 선원으로 모집해서 다닌다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반대로 향료 제도로 향하는 서해 항로는 거리가 거리이니 만큼 위험도도 높고 급여도 높은 편이다.
물론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확률이 매우 높아진다. 폭풍 한 번, 해적 한 번 만나지 않고 돌아온다면 신의 가호를 받았다고 할 정도니까.
조금이라도 더 편하고 안락한 삶을 살겠다고 아등바등 돈을 모으는 건데, 돈 벌겠다고 무리하다가 덜컥 죽어버리기라도 한다면 본말전도겠지...
한참을 그렇게 상념에 잠겨있는데 멀리서 조심스러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한 사람? 아니, 두 명이군. 술 취한 놈들은 아니고... 이 시간에 누가?’
부두 여기저기에 조명이 있기는 하지만 감히 어둠을 밀어낼 정도는 아니고, 그 위험 때문에 한밤중의 부두는 조용하게 마련이다.
그러니 지금 시간에 돌아다니는 사람은 일반적으로 좋은 의도를 가진 사람은 아니라는 뜻이다.
나는 슬쩍 시선을 돌려 현문 쪽을 확인했다.
현문용 널빤지는 이미 철거되어 한쪽에 곱게 눕혀져 있었지만, 성인 남자가 작정하고 뛴다면 뛰어들지 못할 만큼 부두와 선측 면이 떨어져 있지는 않았다.
아직 화물이 남아있었기에 당직자도 6명이나 되었지만 영 불안한건 어쩔 수 없었다.
일단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으니 선수, 선미, 화물 창고를 지키는 4명을 불러올 수 없어서 쉬고 있는 1명을 불러오기 위해 비상벨을 당겼다.
상대는 최소 두 명이니까 일단 머릿수라도 맞춰야 할 것 아닌가?
발자국이 정확하게 배를 향한다는 확신이 들자 나는 이미 들고 있던 석궁을 장전하고 그림자 뒤로 숨으며 외쳤다.
“정지! 더 접근하거나 정체를 밝히지 않으면 쏘겠소!”
잠시간의 침묵이 흐른 뒤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쏘지 마시오. 거래할 것이 있소.”
“이 시간에 그게 무슨... 진짜 그게 목적이라면 날이 밝은 후에 오시오!”
“아니, 지금 해야만 하는 거래요. 실례하겠소.”
말이 끝나기도 전에 빠른 발소리가 들리더니 눈앞에 무언가 어른거렸다.
깜짝 놀란 내가 석궁을 발사했지만 경쾌한 소리와 함께 볼트는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설명은 길었지만 말이 끝나고 고작 2~3초만에 급변한 상황에 당황하는 사이, 목에 서늘한 무언가가 닿았다.
“이렇게 돼서 유감이지만 당신에게 부탁이 있소.”
“...이...이건 부탁하는 태도가...”
솔직히 기가 막혔다. 무슨 놈의 부탁을 목에 칼을 들이대고 한단 말인가? 보통 이런 것은 협박이라고 부른다.
어이가 없어서 잠깐 침묵하자 남자가 다시 말했다.
“아 참, 뒤에 있는 친구, 더 움직이면 다치게 할 수 밖에 없소. 움직이지 마시오.”
비상벨을 듣고 달려오던 파트리의 움직임이 그대로 멎었고, 리안은 상대의 정체를 대충 눈치챘다.
‘기사? 엄청난 수준이야. 코앞에서 볼트를 쳐내다니, 거의 인간을 초월한 괴물이잖아... 남은 여섯 명이 다 달려들어도 한 호흡이면 전멸이다.’
기사. 강력한 중장기병이며 전투의 프로페셔널리스트, 평생 살인기술을 연마한 도살자이자 전쟁을 전공으로 공부하는 자들.
보통사람보다야 난폭하다고 해도 고작 일반인에 불과한 선원들 열 명쯤은 식후 운동꺼리로 죽일 수 있는 것이 기사였다.
하지만 그런 기사들조차 날아오는 화살이나 볼트를 쳐내는 자는 드물었으니, 승산 따위는 재볼 필요도 없었다.
“이 배에 두 명을 더 태울 수 있겠소? 아니 태워주시오. 목적지가 어디건 상관없소.”
“어, 그, 그러니까 밀항... 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소”
밀항 요청이야 드물긴 해도 종종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보통 범죄자나 도망자였지, 이런 엄청난 기사가 밀항을 요청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었다.
그리고 슬슬 머리가 돌기 시작하자 위험 경고가 번쩍이기 시작했다.
‘엄청난 기사, 밀항, 일레드 왕국 군함... 망했다. 오늘 사건의 원흉이 이쪽 같은데?’
보통의 범죄자 따위와 비할 문제가 아니었다.
그런 잔챙이들이야 밀항을 받아줬다가 걸리더라도 벌금 정도로 끝나지만, 이번에는 걸리면 선 내 인원 몰살 루트밖에 안보였다.
바티아넨이 비록 일레드 왕국보다 약소국이라고는 해도, 타국의 최정예 군함에게 입항을 허용할 정도 사건이면 얼른 생각나는 것이 반란, 쿠데타... 뭐 이정도일 테니까.
빠르게 계산을 끝낸 나는 조심스럽게 기사에게 물었다.
“저... 기사님, 이 배는 오늘 입항했습니다. 다시 출항하기까지 적어도 닷새는 걸릴 겁니다. 다른 배를 알아보시는 것이...”
“아니, 그건 당신이 신경 쓸 문제가 아니오. 당신은 그저 우리를 숨겨주고 식사만 제공하시오.”
“아니, 그걸 신경쓰지 않을 수가...”
이게 무슨 미친 소리란 말인가? 처음부터 끝까지 죄다 문제 투성이인데 어떻게 신경을 안쓰겠냐고?
그때 눈앞에 화려한 브로치가 나타났다.
“이건 선금으로 하지. 단, 이곳에서는 절대로 처분하면 곤란하오. 그리고 다른 배를 알아보라는 말, 여기 있는 사람이 다 죽어도 된다는 뜻이오?”
생을 두 번이나 살다보니 아예 대놓고 살인멸구를 입에 담는 사람도 보게 되는구나.
그래, 지금 당장 죽는 것보다는 죽을 확률이 높은 일을 하는 쪽이 낫겠지.
“후... 선창으로 가시지요.”
마지못해 한숨과 함께 승복의 말을 내뱉자, 원래 없었다는 듯이 목을 압박하던 칼날이 사라졌다.
정말 귀신같은 칼솜씨다. 심지어 칼집에 칼이 들어가는 소리도 안 들렸다.
“그보다 일행을 위해 다리를 설치할 수 있겠소?”
“다리요? 아, 현문... 그러죠. 파트리! 이리와. 현문 좀 내리자!”
그나저나 나머지 한 명은 기사는 아닌 모양이다. 뭐, 대충 귀하신 귀족 나으리 쯤 되지 않겠는가?
파트리도 대충 대화를 들었기 때문에 현문을 설치하는 것은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내게는 여전히 고민이 남아있었는데, 전장이 고작 30m도 안 되는 배 인만큼, 다른 당직자들도 분명히 무슨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 뻔했다.
지금쯤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 초 긴장상태를 유지하고 있을 그들에게 문제의 당사자로서 나는 그들에게 상황을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
현문을 다 설치하고 파트리를 시켜 당직자들에게 함미 창고 앞에 모여 있으라고 전달했다.
비록 비밀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다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대충 얼버무려서 해결될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파트리가 자리를 뜨고, 부두에 남아있던 불청객 한명이 배에 올라왔다.
로브로 얼굴까지 가리고 있었지만, 작은 키와 좁은 어깨로 여자라는 것 정도는 눈치 챌 수 있었다.
“그럼 이쪽으로 오시죠. 상품을 내리고 다시 싣기까지는 함수 창고에 계셔야 할 겁니다.”
내가 발걸음을 옮기자 뒤를 따르던 협박범이 물었다.
“흠, 그럼 자리를 옮겨야 하는가? 그냥 한 곳에 있는 것이 좋을 듯 하오만?”
“함수 창고는 화물이 아니라 도구를 보관하는 곳입니다. 좁기도 하고 항해중에는 수시로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죠.”
“...그렇군.”
함수 창고의 문을 열고 두 사람에게 적당히 숨어있을 공간을 만들어 준 뒤 나가려는데, 힘없는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 고, 고맙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로군. 말투로 봐서는 귀족 영애쯤 되는 모양이다.
“그 인사는 안전하게 내리신 후에 받도록 하죠. 그보다 최대한 다른 사람 눈에 띄지 않도록 부탁드립니다.”
상대가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귀족 영애인 듯해서 나는 최대한 정중하게 몸을 숙여 인사했다.
귀족들의 자존심이라는 것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법이니까.
다시 몸을 돌려 나가려는데 약간 다급한 듯한 목소리가 발걸음을 붙잡았다.
“그...!”
“네?”
“저... 호, 혹시... 뭔가 먹을... 것은 없느냐?”
흠, 귀족의 자존심도 배고픔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그나저나 도대체 뭘 줘야하지?
그나마 괜찮은 음식이라고 해봐야 꿍쳐놓은 고급 육포가 조금 있기는 하지만, 전생의 입맛이 아직 남아있는 내게도 결코 맛있는 음식은 아닌데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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