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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3화 (3/420)

<3화> 어설픈 밀항자의 속사정(2)

음식을 요구하는 그들에게 숨겨둔 육포와 물을 건네준 뒤, 화물창고에 모인 당직자들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그래서 지금 선수 창고에 있어. 잊지마, 이거 아는 사람이 많으면 엿 될 확률이 높고, 그럼 우리 다 죽는거야, 알았지?”

“리안, 그냥 죽...”

“헛소리 하지마! 코 앞에서 볼트를 칼로 쳐내는 인간이야. 우리가 상대가 될 것 같아?”

“그럼 신고라도 하자. 어차피 우리 내일이면 다 외박이잖아?”

나라고 신고를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게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라면 글쎄, 보상은커녕 죄다 죽여서 입막음을 하려고 하지 않을까?

그걸 아니까 저들도 저렇게 창고에 얌전히 틀어박혀 있는 것이겠지.

저번 생과 다르게 이번 생에서 평민이란 언제 어떻게 죽어나가도 이상할 것이 없는 세상이라 만사에 조심해야 한다.

“아니, 잘못하면 우리가 입막음 당할 수도 있어.”

“설마 그렇게까지...?”

“하아아... 생각을 해봐라. 저 사람들이 우릴 뭘 믿고 그냥 냅두겠냐? 신고 못할 걸 아는거야.”

“그럼 어떻게 해?”

“일단 너희는 내가 시킨대로 입단속이나 잘해. 나머지는 내가 해결할테니.”

다들 불안한 표정은 여전했지만 내가 그나마 자기들보다 머리를 잘 쓴다는 것을 알기 때문인지 군소리 없이 자기 자리로 되돌아갔다.

아, 파트리 녀석만 빼고.

“넌 안가? 너 당직 교대 여기 아니잖아?”

“리안, 정말 괜찮을까?”

“나라고 괜찮겠냐? 그래도 어쩌겠어? 지금 당장 죽는 것은 피했으니 최대한 괜찮게 만들어야지.”

그나저나 조금 의문이기는 하다. 그들은 왜 내가 신고를 안 할 거라고 생각했을까?

방금 본 것처럼 선원이라는 것들은 무식하기 그지없다.

보통은 나처럼 상황의 앞뒤를 파악해서 행동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솔직히 내가 사건 당사자가 아니었다면 이미 다 죽었거나, 내일 신고한답시고 항구관리인에게 갔다가 가드들한테 죽임을 당했을 거다.

그게 아니면 출항하자마자 해상경비대나 해군에게 쥐도 새도 모르게 바다에 매장 당했겠지.

여튼 신고를 한다면 우리도 높은 확률로 죽겠지만, 그들도 죽음을 피하기 힘들다.

그런데 내게 신고를 하지 말라는 경고조차 안했다. 도대체 무슨 배짱인거야?

* * * * *

정신없는 밤이 지나고 아침이 되자 선장님과 갑판장이 상회 사람들과 몰려와 화물을 내리기 시작했다.

선장님 얼굴이 활짝 핀 것을 보니 꽤 값을 좋게 받은 모양이다.

하긴 일레드 왕국의 군함이 들어와서 난장을 피워댔으니, 온갖 물자들의 가격이 어느 정도 오르기는 했을 거다.

혹시 몰라서 함수 창고 앞을 서성이며 눈치를 보고 있는데, 갑판장이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다가왔다.

“어이, 리안! 계속 빈둥거릴거야?!”

“갑판장님, 저 어제 당직자라구요.”

“그럼 방해되지 않게 얼쩡거리지 말고 선실에서 잠이나 자던가!”

“아, 거기 냄새나서 싫어요! 아시면서. 그럼 저 좀 먼저 내려도 되요?”

“무슨 헛소리야?! 다른 놈들 들어오면 나가!”

내가 워낙 평소에 선실이 냄새난다고 투덜거려 놔서 갑판장은 별다른 의심 없이 못마땅한 혓소리를 내며 다시 멀어졌다.

모두의 관심이 멀어지자 나는 슬쩍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괜찮으면 나와 보시죠.”

“무슨 일이시오?”

“저는 점심쯤에 배를 떠나서 내일 들어올겁니다. 혹시 필요하신게 있으십니까?”

“흐음, 음식이 필요할 것 같소. 솔직히 어제 준 것은... 내 일행이 먹기에는 조금...”

전생의 음식을 잊지못한 혀와 위장을 위해 큰맘 먹고 구입한 나름 고급 육포였는데, 그조차도 아가씨 입맛에는 별로였던 모양이다.

그런데 솔직히 그보다 더 좋은 음식을 선원이 산다면 그것도 이상하긴 하다.

그냥 의심해달라고 소리 지르는 것과 뭐가 다르겠어?

그때 아가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경, 그만두세요.”

“하지만!”

“그대가 고급 요리를 산다면 의심을 피하기 어려울 터. 그대가 생각하기 의심받지 않을 정도의 음식이면 족하다.”

“네, 아가씨.”

호오? 생각보다 정신머리가 똑바로 박힌 아가씨다.

솔직히 귀족들이나 드시는 들어보지도 못한 음식을 요구할 줄 알았는데...

내가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녀가 숨어있는 쪽을 보고 있자 단호한 말이 들려왔다.

“단! 어제 받은 브로치는 절대로 이곳에서 남에게 보여서는 안된다. 우리뿐만이 아니라 이 배의 누구도 살아남지 못할테니까.”

그녀의 말이 끝나자 살기어린 남자의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어제 미처 말을 못했지만 신고는 하지 않는게 좋을거요. 우리와 마주쳤다는 것만으로도 당신과 이 배의 사람들이 죽기에는 충분한 이유가 될테니.”

역시나 위험한 것들이다. 심지어 뻔뻔하다.

원래 악당은 그렇긴 하지만... 하아, 인생 2회차가 왜 이렇게 힘든 거야?

필요한 것을 물어보러 가서 협박을 듣고 창고를 나온 나는 화물을 다 내리고 창고를 둘러보는 갑판장에게 다가갔다.

선장은 상회 사람들과 함께 간 모양인지 보이지 않았다.

아마 다음에 선적할 상품에 대해 이야기 하러 갔을 거다.

...아니면 좋은데서 술 마시러 갔겠지.

전생이나 현생이나 있는 놈과 없는 놈의 삶은 모든 곳에서 차이가 난다.

“다 내렸네요?”

“하! 실컷 농땡이 부리다가 일 다 끝나니까 오는 게냐?”

“아니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정리 도와드리러 온 거 아닙니까?”

“크흠, 그래? 그럼 맡겨도 되지? 내가 좀 피곤해서.”

헛기침을 하는 갑판장을 자세히 보니 눈은 불그스름하고 입에서는 고약한 술 냄새가 슬쩍 맡아진다.

이 인간도 어제 술 진탕 마셨구만. 아니 오늘 화물 내리는 거 감독할 사람이 술을 이렇게 마시면 어떡해?

그런데 그 와중에도 사고 없이 일을 끝낸걸 보면 참 대단하긴 하다.

“그럼요, 쉬십쇼~, 이런건 또 제가 잘하잖아요?”

“그나마 리안 네가 제일 낫기는 하지, 그래서 선장님이... 큼! 그럼 난 간다!”

“네? 선장님이 뭐요?”

항해사도 그렇고 이거 뭔가 있는데?

나는 급하게 멀어지는 갑판장을 쫓아 내달렸다.

“아, 선장님이 뭔데요?!”

“에이, 선장님이 널 좋게 보고 계신다~ 뭐 그런말이지.”

“진짜 이상하네? 아까 항해사님한테도 물어본건데, 선장님이 절 어떻게 아냐는거죠!”

“...나 피곤하다! 잔다! 들어오지마!”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부선장실(부선장이 없어서 항해사보다 연장자인 갑판장이 쓰고 있다)의 문을 재빨리 닫고 사라지는 갑판장이었다.

“찝찝하기는 한데, 지금 그게 중요한건 아니지.”

나는 재빨리 창고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지금 미리 상품이 들어올 자리를 교묘하게 만들어 놔야, 나중에 밀항자들을 태우기 편하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당연히 해봤으니까 알지.

밀항자 수송은 나 같은 선원들에게는 꽤나 괜찮은 부수입원이다.

물론 걸리면 벌금이다 뭐다, 옴팡 뒤집어쓰지만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은 기본 아니겠나?

하여간 자리를 제대로 만들어놓지 못한 상태로 해상 검문이라도 벌어지면 까딱 잘못하면 걸리기 십상이다.

심지어 이번에는 해상 검문은 거의 확정적이다.

이 사달이 났는데 나가는 배를 검사 안하겠어?

* * * * *

“자네가 이런 걸 왜...”

주로 선원들을 상대로 하는 제법 큰 잡화점에서 주인이 미심쩍은 눈빛으로 날 바라본다.

딱 봐도 그냥 일반 선원인데 각종 고급 식료품을 사니까 의심스러운 모양이지.

눈알이 튀어나올 만큼 비싼 약간의 과일과 견과류, 사탕보다 약간 단단해서 무기로는 못 쓰는 고급 건빵, 향신료를 눈곱만큼 첨가한 고급 육포...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솔직히 우리 선장님도 배 위에서 매일 이렇게는 못 먹는다.

“선장님 심부름이죠. 그래서 말인데, 이거랑, 이거는 티 안나게 다른 주머니에 좀 싸주실래요?”

“큭, 자네 선장님이 꽤나 믿는 모양인데 그래도 되나?”

“쬐끔만 해먹으니까 저한테 시키시는거죠. 아마 선장님도 대충 아실걸요?”

“오호? 제법 똑똑한 친구로군. 알겠네, 내가 조금 덜어주지.”

계산을 마치고 잡화점을 나오는데,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짐이 깃털처럼 가볍게 느껴질 정도로 산건 얼마 없는데 무려 이번에 받은 급여의 절반 가까이가 날아갔다.

그나마 둘이서 아껴 먹는다면 닷새 정도 버틸 분량밖에 못 샀다.

아무리 선장 정도 되더라도 특식이나 간식으로나 먹는 것들인데, 열흘 치 이상을 한 번에 사면 누가 봐도 이상하지 않겠어?

진짜 함수 창고의 나만 아는 장소에 숨겨둔 브로치가 아니었다면 절대로 할 수 없었을 지출이다.

그래, 딱 봐도 비싸 보이는 그 브로치가 선금이니까, 살아만 남으면 대박인거다.

운이 좀 따라주면, 독립... 은 아직 무리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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