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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4화 (4/420)

<4화> 어설픈 밀항자의 속사정(3)

“크으~ 이 맛이지!”

“맞아! 역시 필라비스하면 쉐리주지!”

은행도 다녀오고, 머리도 좀 자르고, 새 옷도 한 벌 장만한 나는, 항구에서 볼 일을 마치고 우르타, 네이선과 주점에 앉아 신나게 술을 퍼 마시는 중이었다.

전생보다 현생이 좋은 것이 몇 가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술이었다.

전생에게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외국물 한번 마셔보지 못한 내게 술은 소주 또는 막걸리였다.

물론 가끔은 맥주도 마시고, 위스키니, 럼이니, 진이니 하는 소위 양주도 몇 번 마셔보기야 했지만 그건 말 그대로 손가락에 꼽을 정도.

그에 반해 현생은 맥주도 각 지역마다 맛과 향이 다채로웠고, 지역의 특산 술들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심지어 대부분 가격도 저렴하고 몇 곳은 놀라울 정도로 술맛이 좋았는데, 필라비스도 그런 곳중에 하나였다.

아무리 미래를 위해 구두쇠처럼 돈을 모으고 있다지만, 지금 당장의 고생한 나를 위해 이정도 선물은 줘도 되는거잖아?

“그 이야기 들었어?”

“무슨 이야기?”

주점에 가장 먼저 도착했던 우르타가 말문을 열었다.

“이번에 난리였잖아, 그 뭐야? 일레드 왕국 군함들...”

“아, 엘베도라?”

나를 통해 그 정체를 알고 있었던 네이선이 어깨를 으쓱하며 아는 척을 했다.

“어! 그래, 맞아! 그게 왜 난리를 쳤는지 알아냈어.”

“뭐, 일레드 왕국에서 반란이라도 일어났어?”

“엇?! 리안도 들었어? 그런데 잘못 알고 있네? 반란이 일어난 곳은 프레티아 왕국이야.”

가장 늦게 도착한 내가 대충 찍어서 말하자 우르타가 놀란 눈빛으로 나를 보며 정정해줬다.

그나저나 일레드 왕국도 아니고 프레티아가 갑자기 왜 튀어나와?

심지어 일레드와 프레티아는 동맹관계는커녕 오히려 잠재적 적국이라고 규정할 정도로 긴장도가 높은 국가들이다.

주점에서 혼자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은 우르타의 말에 의하면, 얼마 전에 프레티아 국왕이 사망하면서 후계 결정을 두고 왕실에서 소요가 발생했다고 한다.

원래대로라면 순리대로 1왕자 프레드가 다음 국왕에 즉위해야 했는데, 2왕자 에논이 제 형과 동생들을 살해하고 수도를 점령했다고 한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왕실 사람 두 사람이 탈출하면서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탈출한 사람은 4왕자 데이먼과 왕녀 엘리안.

대외적으로 2왕자는 1왕자와 그를 따르는 동생들이 전대 국왕을 살해했다고 했지만, 말 그대로 눈 가리고 아웅하는 꼴이다.

누가 봐도 반란이잖아?

그래서 자기의 계승권을 위협할 수 있는 4왕자와 왕녀를 잡기 위해 각지로 추적대를 보내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 추적대중 하나가 일레드 왕국의 엘베도라급 2척이고.

이정도 되면 사이즈가 딱 나온다.

2왕자라는 놈은 적국이라고 할 수 있는 일레드를 끌어들여 왕좌를 탈취한 것이다.

도의적으로도 문제가 되고 정통성이나 당위성도 떨어지지만, 문제는 국제 사회라는 것이 그런 이상적인 부분을 딱히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

타국들 입장에서는 이유야 어쨌건 간에 현재 프레티아를 쥔 건 2왕자 에논이고, 자기들에게 이득이 되거나 불이익을 받는 것이 아니라면 별로 신경 쓰지 않을게 뻔했다.

그래서 나름 프레티아와 우호관계였던 바티아넨도 별다른 잡음 없이 엘베도라의 입항과 수색을 허용한 것이고.

아, 물론 프레티아의 국력이 일레드에게 뻣뻣하게 나가기 어려울 정도로 차이가 나는 부분도 없지는 않겠다.

평소라면 전쟁 소식이 아닌 이상 권력자도 뭣도 아닌 우리에게는 그저 시간 죽이기 용 잡담거리에 불과했겠지만, 이번만큼은 아니었다.

“저... 리안. 설마 아니겠지?”

“조용해! 여기에서 떠들 이야기는 아니니까.”

“하지만 진짜 위험하다고. 신고라도...”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보는 두 사람.

그들도 바보천치가 아닌 이상 어젯밤에 우리 배에 침입한 불청객들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을 터였다.

하지만 역시 신고는 무리다.

다행히 소문이 퍼질 대로 퍼져서 신고 후 우리가 살아남을 확률이 조금 생기기는 했지만, 역시나 반란 같은 왕실의 치부와 관련된 문제와 얽혀서는 곱게 살아나오지 못할 확률이 높다.

사정없이 흔들리는 네이선의 눈동자를 보며 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래, 나랑 같이 있는 네이선조차 이 모양인데, 다른 놈들은 어떻겠어?

“안되겠다. 너희는 지금 당장 어제 당직 섰던 놈들 다 불러와. 한 놈이라도 실수하면 다 죽는 거야!”

평소라면 이런 저런 불평부터 내 뱉을 녀석들이 두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움직여야지. 선원 놈들이 갈만한 곳이라고 해봐야 뻔하다.

* * * * *

“다들 모였지?”

2인실이라서 방이 좀 크기는 하지만 역시나 건장한 남자 여섯이 모이니 비좁게 느껴진다.

어휴, 땀 냄새, 발 냄새, 술 냄새, 여자 냄새... 그렇다고 창문이나 방문을 열수도 없으니 미치겠군.

“아아, 갑자기 무슨 일이야, 리안? 내가 그 여자랑 자려고 돈을 얼마나...”

“닥쳐, 피케! 죽고 싶어?”

언제부터 술을 퍼마셨는지 술이 눈까지 가득 찬 눈치 없는 피케가 지껄이는 것을 살기어린 눈빛으로 제압한 뒤 작은 목소리로 현재 상황을 설명했다.

설명이 끝나자 두 명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한 표정을 지었고, 술이 떡이 되어있던 피케도 머리를 세차게 흔들더니 불안한 눈빛을 한 채 거의 속삭이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어쩌지? 정말 신고하면 죽을까?”

“아닐 수도 있지만... 난 내 목숨을 걸고 도박하기는 싫어.”

그러자 우르타가 주저하며 말을 받았다.

“하지만 리안. 걸린다면 무조건 다 죽는다고. 그쪽이 더 위험하지 않아?”

“네 말도 맞아, 우르타. 하지만 안 걸리면 확실히 다 살지.”

“...그것도 아니지. 솔직히 우리가 다른 항구에서 내려줄 때 그 무서운 인간이 우리를 다 죽이지 않을 거라는 보장도 없잖아.”

가만히 고민하던 파트리가 반론을 제기했다.

그러나 나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만약 우리 생각대로 밀항자들이 왕녀 일행이라면 그들은 행적을 숨겨야해. 하지만 바다 위에서 우리를 죽일 수는 없지. 항구에서 우리를 다 죽인다? 항구에서 그 정도 사건이 나면 조사를 안 할 것 같아? 차라리 우리가 나중에 어디서 떠들건, 배에서 내린 다음에 빨리 몸을 피하는 게 낫다고 생각할거야.”

다행스럽게도 왕녀로 추정되는 여자는 생각보다 머리가 잘 돌아가는 것 같았고, 함께 있는 남자도 성격이 꽤나 진중한 것 같았다. 그러니까 앞뒤 재보지도 않고 일단 살인멸구! 이런 식으로 나올 확률은 극히 적었다.

우리가 방문하는 소위 무역항들은 대부분 도로가 잘 발달되어있다.

선박이라는 것이 운송 효율은 좋지만 그렇다고 내륙까지 일일이 상품을 배송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밀항자들이 일단 항구에 발을 디디고 나면, 그들을 추적하는 일은 굉장히 난감해진다.

그나마 이번에는 왕녀라는 정체 때문에 목적지나 뭐 그런 곳을 예측하더라도 어떤 길을 선택할지는 모르는 일이 되어버리니까.

심지어 왕녀 옆에 붙어있는 기사는 보통 실력자가 아니다.

고작 검문검색이나 소규모 추적대로는 오히려 역으로 당하고 말거다.

그럼 결국 일레드나 프레티아는 제3국에 대규모 병력을 파견하거나 엄청난 실력자를 보내야 하는데, 그건 아무래도 정치적으로 힘들다.

“그러니까 내 말대로 하자. 솔직히 머리 쓰는 건 내가 제일 낫잖아?”

그러자 다들 불안한 눈빛을 하면서도 슬며시 고개를 끄덕인다.

참고로 이 그룹에서 글을 읽고 쓰거나 고급 수학(서민들에게는 곱셈, 나눗셈, 방정식만 해도 고급 수학이다)을 할 줄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정말 무사히 끝낼 수 있을까?”

“높으신 분들이 해상 검문을 아무리 빡세게 하라고 해도, 결국 검사하는 놈은 전에 있던 그 놈이야. 그놈들이 무슨 영광을 보겠다고 구석구석 다 털어보겠냐? 안걸릴테니까 걱정 마.”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솔직히 나도 걱정이 된다.

다른 것도 아니고 내 목숨이 걸려있는데 걱정이 안되면 사람이겠어?

아무리 전생에 비해 현생의 삶이 고달프다지만, 그래도 죽는 것보다는 사는 것이 낫다.

“그, 확실한 거지?”

“확실하니까 다들 입조심하고, 오늘은 술 쳐 마시지 말고 일찍 자. 내일 복귀하면 함수 창고에 신경 쓰지 마! 아니 그냥 쳐다보지도 마! 해산!”

어기적어기적 일어서는 녀석들이 나가려고 문고리를 잡는데 갑자기 좋은 생각이 들었다.

“잠깐!”

“왜 또 그래? 불안하게?”

“이번 일 끝나면 각자 10,000 로스다.”

“헉! 지... 진짜?”

“그래, 너희는 그냥 입만 다물고 있어. 진짜 밀항자가 왕녀라면, 귀걸이 하나만 받아도 그 정도는 챙길 수 있을 거야.”

“어... 혹시 왕녀가 아니라면?”

“야! 그럼 위험할 일이 없으니까 더 좋은 거지!”

“아하? 그렇구나?!”

사람을 다룰 때 당근과 채찍은 기본 아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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