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어설픈 밀항자의 속사정(4)
- 필라비스 총독 관저 -
초조한 표정으로 손톱을 깨물던 총독은 정중한 노크와 함께 들어오는 바르시아 보좌관을 보며 반색했다.
“어때? 좀 성과는 있는가?”
“아직은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제기랄! 자네 말대로라면 지금쯤이면 소식이 들어와야 하는 것 아닌가?!”
“걱정 마십시오. 왕녀가 돈을 구하는 방법은 가지고 있는 패물을 파는 수밖에 없습니다. 근위기사가 하나 붙어있다고 하니 그자의 돈으로 아직 버티는 모양입니다만, 이제 거의 한계일겁니다.”
“만약 이곳을 통해 밀항이라도 해서 그게 밝혀지면 본국이 굉장히 난처해지네. 알고 있겠지?”
사실 총독의 입장에서야 억울한 감이 있었다.
본인이 엘리안 왕녀와 접점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녀가 필라비스로 도망치는 바람에 괜한 덤터기를 쓰게 생긴 셈이니까.
며칠 전, 처음 보는 크기의 거함 두 척이 항구에 접근하자 난리가 났다.
해안포대에서 보내는 정선 신호를 무시하고 우격다짐으로 밀고 들어오는 바람에 발포 직전까지 갔지만, 다행히 급히 파견한 보좌관이 일레드의 국기를 확인하고 발포를 아슬아슬하게 막았다.
만약 포를 쏘기라도 했다면 아마 끔찍한 일이 벌어졌으리라.
운이 좋다면 이번에 방문한 두 척은 격퇴할 수 있었을지 몰라도, 그 이후에는 일레드 왕국과의 전쟁이었을 테니 말이다.
안 그래도 호시탐탐 필라비스를 노리고 있는 일레드 왕국인 만큼, 오히려 좋다고 손뼉을 치면서 침공해 왔을 것이 분명했다.
타국의 군함이 사전 협의도 없이 항구에 들어온 것도 문제인데, 그 뒤에 벌어진 일에 비하면 약과였다.
뻔뻔하게도 동맹국인 프레티아 왕국의 반역자 수색을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해병대를 상륙시켜 항구와 입항한 선박들을 들쑤시고 다니는 것은 물론, 심지어 모든 선박의 입항과 출항까지 막았다.
물리적 충돌만 없을 뿐이지 전쟁 상황만큼 험악한 관계였던 프레티아와 일레드가 언제 동맹국으로 변신했다는 것일까?
그거야 그렇다 치고, 진짜 문제는 그런 사소한 사실관계 따위가 아니었다.
사실상 필라비스는 봉쇄되었고 도시의 분위기는 최악으로 치달았으며, 상단과 선주, 선장들의 민원과 항의가 빗발쳤다.
그 등쌀에 버티지 못한 총독이 퇴거를 요구하자, 함대 사령관 자이렌 백작이 싸늘한 경고를 날렸다.
만약 반역자인 엘리안 왕녀가 필라비스에서 밀항이라도 한다면 필라비스, 아니 바티아넨 왕국이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마음 같아서야 그게 왜 우리 책임이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그걸 말로 내뱉는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너무 생생하게 그려져서 감히 실행할 용기는 없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결국 봉쇄 3일 만에 겨우 일레드의 군함들을 퇴거시킬 수 있었다.
정박중인 모든 선박을 검사하고 항구를 탈탈 털다시피 수색했음에도 왕녀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자, 자이렌 백작은 마지막 경고를 날리고 떠났다.
“총독, 엘리안 왕녀가 이곳에 들어왔다는 정보는 확실하고, 우리가 수색하지 못한 곳은 총독관저 뿐이오. 무슨 말인지 아시겠소?”
말도 안되는 협박이었지만, 시대가 그런 시대였다.
일레드라는 강국을 등에 업은 백작이 아무리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지껄여도 국력이 현저하게 밀리는 바티아넨 왕국의 일개 총독은 반항 할 수 없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그의 보좌관 바르시아가 굉장히 유능하다는 것이었다.
상황을 알게 된 바르시아는 즉시 도시의 범죄조직, 장물아비, 암시장 관리자등 어둠에 기생하는 자들에게 ‘특별한’ 장신구가 들어오면 바로 알리라고 전파했다.
왕녀나 근위기사의 체면에 도둑질은 하지 않을 테고, 왕녀라면 입맛도 까다로울테니 돈도 많이 필요할거다.
하지만 급하게 도망치면서 여비를 넉넉하게 챙기지는 않았을 테니, 결국 왕녀의 장신구를 팔게 되겠지.
현실적으로 그 장신구를 처분할 수 있는 곳은 암흑가밖에 없었으니, 누군가의 손에 들어가는 순간 바로 연락이 올 터였다.
어린 왕녀가 불쌍하기는 하지만,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어나가고 나라가 망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심지어 그 왕녀가 아는 사람도 아니고, 자국의 왕녀도 아니니 말이다.
* * * * *
원래 사람이라는 것이 그렇다.
마음이 불안하면 좋은 잠자리(건초더미 위에 두꺼운 천을 올린 정도지만 흔들리는 해먹보다는 낫다)에 누워도 잠이 안 오고, 맛있는 음식(둔기로 써도 되는 쉽비스킷이나 꼬랑내가 나는 육포보다 낫다는 뜻이다)도 맛이 없게 느껴진다.
그래서 평소보다 조금 빠르게 배에 복귀하자, 한참 상품이 선적되는 것을 관리하던 갑판장이 의문부호가 가득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뭐야? 무슨 일 났냐? 왜 이렇게 일찍 와? 안 그래도 부르려고 했지만.”
“아니 뭐, 어제 술을 좀 과하게 마셨더니 돈도 빨리 떨어지고 해서...”
“그러니까 그 저금인가 뭔가 적당히 하라니까 쯧.”
“아, 전 갑판장님처럼 흰머리 되도록 배타기 싫거든요?”
“이자식이 오냐오냐 했더니!”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거대한 근육으로 가득 찬 팔을 들어 보이는 갑판장을 피해 얼른 물러섰다.
내가 알기로 내일모래 60인 노인네인데 팔 근육이 무슨 보디빌더 수준이다.
참고로 현생의 평균 수명은 전생의 중세 정도라고 보면 될 것 같다.
60세를 넘기기가 힘들다는 말이다.
물론 전생과 다르게 예외의 존재들이 있기는 하다.
기사, 마법사, 신관 뭐 이런 자들... 이런 자들은 엄청난 수준에 오르면 상당히 오래 산다고 하는데,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다.
나 같은 서민이 그런 대단한 인간들을 볼 일이 있어야지.
갑판장의 관심이 나에서 다시 화물로 옮겨가자 은근슬쩍 접근해서 말을 걸었다.
화물이 뭐냐에 따라서 밀항자를 숨기기 위한 여러 준비가 필요하니까.
“뭡니까? 면직물?”
“그래, 아무래도 다음 기항지는 로제항인 것 같다. 그쪽에 얼마 후면 축제잖냐?”
“그럼 금방 도착하겠네요?”
“이맘때면 바람도 좋으니까. 아마 사흘이면 도착하겠지.”
“잠깐, 그런데 왜 화물을 벌써 싣는거죠?
“오늘 오후에 출항할거야.”
열흘이 넘는 항해를 하면 3일 정도 쉬는 것이 일반적이니 출항이 약간 빨랐다.
“뭐야? 너무 빠른데? 왜요?”
“뭐긴 뭐야, 너도 어제 들었을 것 아냐, 여기 분위기.”
“아 그 왕녀...”
“쉿! 입 함부로 놀리지 마라. 너 오기 바로 전에도 경비대에 항구관리관에... 난리도 아니었다.”
“......”
음, 확실히 갑판장에게는 걸리면 안되겠다.
만약 왕녀로 추정되는 밀항자를 태웠다는 걸 알게 되면... 끔찍한 결말이 예상되는군.
화물 이야기로 돌아가서, 축제라면 뭐 식료품, 주류 이런 종류가 잘 팔릴 것 같지만 우리 같은 소상인은 언감생심 꿈도 못꾼다.
그런 주요 품목들은 대규모 상단에서 계약을 받아서 처리하기 때문에 우리는 식료품이나 주류를 사들고 가봐야 사겠다는 사람도 안나온다.
심지어 식료품 같은 것은 대부분 보존기간도 짧아서 재수 없으면 전액손실이라는 최악의 상황이 나올 수도 있으니까 안전하게 곁다리 상품을 취급하는게 보통이었다.
그런 면에서 축제라면 그래도 새 옷을 장만하는 사람이 꽤 있을 테니까 면직물은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그리고 내게도 중요한 사실은 하루 빨리 출항한다는 것과 다음 기항지가 고작 3일거리라는 것은 기꺼운 일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목숨을 위협하고 있는 저 밀항자들을 하루라도 빨리 내보낼 수 있다는 뜻이니까.
나와 함께 복귀한 우르타, 네이선 외에도 함께 당직을 섰던 3명까지 원래 시간보다 빠르게 복귀하자 갑판장은 괴상한 표정을 지었다.
보통 복귀 시간이 지나도 창관에서 뒹굴고 있거나, 술이 떡이 되서 길바닥에 널부러져 있는게 일반적인 일이었으니까 이상해 보이기는 했을 것이다.
하여튼 어차피 불러올 녀석들이었으니 상관없다는 식으로 넘어가기는 했지만, 식은땀이 절로 나는 상황이었다.
나도 불안해서 일찍 오기는 했지만 예외 없이 몽땅 일찍 올 건 또 뭐야?
원래 오늘 당직으로 예정되어 입항 후 이틀 내내 놀기만 한 세 사람이 잡혀 들어오고, 배는 출항 준비에 들어갔다.
당연히 누구는 당직을 서고 누구는 안 섰다며 선원들의 불평불만이 쏟아졌지만, 선장님의 추가 수당 지급 발언에 모조리 쏙 들어갔다.
...어느 세상이나 돈이 최고다. 물질만능주의 만세!
출항 준비에 바빠서 모두가 정신없는 사이에, 함수 창고에서 밀항자들과 접선(?)에 성공한 나는 거금을 들여서 사온 음식과 물을 건네 주었다.
“최근 항구가 어수선해서 오늘 바로 출항하기로 했습니다.”
“그거 다행이군.”
“그리고 다음 기항지는 로제 항구입니다. 혹시 아십니까?”
“케이라 왕국의 항구 아니오?”
“네. 잘 아시는군요. 그곳까지만 가시면 되겠습니까?”
“흐음... 그 정도면 충분할 것 같소.”
하루사이에 꽤나 초췌한 모습으로 변해버린 남자는 약간 안심이 된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화를 마무리 하려고 했다.
“저, 그보다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만...”
“음?”
“항구에서 프레티아 왕국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혹시... 왕녀님 일행, 헉!?”
진짜 진심으로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말을 하고 있는데 새파랗게 빛나는 칼날이 목 아래에서 냉기를 뿜고 있으면 누구나 그렇지 않겠어?
심지어 이번에도 역시 움직이는 모습이 보이기는커녕 칼이 뽑히는 소리도 안 들렸다.
“후, 알렌 경. 그만두세요.”
모습도 드러내지 않고 숨어있던 왕녀가 나직하게 말하자 알렌 경이라는 남자는 살기가 뚝뚝 떨어지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라도 왕녀님의 이야기를 흘린 것은 아니겠지?”
이 사람은 남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말하는게 취미인가? 왜 매번 이러는 거야?
그나저나 여기서 삐끗하면 죽게 생겼군.
하지만 할 말은 해야겠다.
재수 없게도 확실히 왕녀 일행은 맞는 모양이니 우리 모두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서 몇 가지 추가 조치가 필요할 것 같은데, 이 밀항자들의 협조가 반드시 필요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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