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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6화 (6/420)

<6화> 어설픈 밀항자의 속사정(5)

나는 단 몇 mm만 움직여도 피를 봐야 할 만큼 목젖 바로 아래에 딱 붙어있는 칼날을 곁눈질로 보며,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불안한 마음은 알겠지만 일단 진정하시고 칼 좀 치워주시죠.”

어우, 다시 생각해도 무슨 배짱이었는지 모르겠다...

속마음이야 어쨌건 내가 평온한 모습으로 대답하자, 남자는 약간 주저하더니 결국 칼을 회수했다.

“일단 두 분의 이야기는 이미 항구에 파다합니다.”

“......우리는 반역자가 아니오.”

“기사님,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두 분뿐만이 아니라 이 배에 탄 모두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는 것이 중요하죠.”

“음... 보상이라면 충분하게...”

답답한 인간이네. 당장 죽게 생겼는데 보상이 무슨 소용이야?

“보상은 살아남은 다음에 따질 문제겠죠.”

“그러면 어쩌라는 것이오?”

“방금 말씀드렸다시피 오늘 출항을 할테니 밤이 깊어지면 저와 함께 자리를 옮기셔야 합니다.”

“알겠소.”

“그리고 검문을 피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제가 몇 가지 준비를 해 놓겠습니다. 혹시라도 상황이 나쁘게 돌아가면 꼭 제 말대로 해주셔야 합니다.”

나는 내가 준비할 내용과 그들이 해야 할 행동을 완전히 숙지시킨 후 사람들이 많이 들락거릴 테니 단단히 숨어있으라고 당부한 뒤 몸을 돌렸다.

문을 나서기 직전, 그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왕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대는 누구지?”

“네? 무슨 말씀이신지...”

“예법에 맞지는 않으나 조리 있는 말과 행동, 냉정하게 상황을 분석하고 행동을 계획하며 그에 맞게 대비책을 강구하는 모습까지. 보통 선원이 그러할 리가 없다. 그대는 누구인가?”

진짜 의외의 왕녀님이시군. 제대로 본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끽해봐야 십대 후반, 전생이라면 고작 고등학생정도의 나이일텐데 놀라울 정도로 예리하다.

귀족 아가씨라는 분들을 직접 만나본적은 없지만 세간에 들리는 소문이나 전생의 유럽 중세 귀족 영애에 대한 편견 같은 것으로 상당히 무시하고 있었는데, 평가를 좀 바꿔야겠다.

“제가 누구인지는 상관이 없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전 신고를 하지 않았고, 두 분이 무사히 이 배를 탈출해야만 저희도 살아남는다는 것이죠.”

“하지만 그대를 신뢰하기는 힘들군. 솔직히 지금이라도 그대를 죽이고 이 배를 탈출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하긴 내가 만약 밀항을 하는데 일개 선원이 나처럼 행동하면 의심이 무럭무럭 피어오를 것 같기는 하다.

자주 말하는 것 같은데, 보통 선원이라고 하는 작자들은 대부분 무식하거든.

“지금은 낮이고, 이 배는 지금 출항 준비 중이라 부산스럽습니다. 지금 탈출하신다면 아마 반드시 발각될 것 같은데요.”

“그렇다 하더라도 이렇게 비좁은 곳에서 숨어 있다가 잡히는 것보다는 낫겠지.”

“그건 안심하셔도 됩니다. 상식적으로 신고를 했다면 어제 했을 테고, 그게 아니더라도 굳이 제가 이곳을 다시 방문하지도 않았을테니 말이죠. 그리고 그 음식, 솔직히 저한테는 엄청난 지출입니다.”

“숨기는 것이 있다는 말로 들리는군.”

“숨길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전 그냥... 이 배의 선원입니다. 다만 보통 선원들보다 조금 똑똑할 뿐이죠.”

* * * * *

비록 협박에 의해서라지만 어리둥절할 정도로 자신들에게 전폭적인 협조를 하고 있는 선원이 사라진 문을 잠시 노려보던 알렌이 나지막하게 물었다.

“왕녀님, 어떻게 할까요? 정말 의심스러우시다면 지금이라도...”

잠깐 동안 생각을 정리하며 입술을 깨물던 엘리안 왕녀는 표정을 풀며 말했다.

“아니예요, 경. 그의 말이 옳아요. 지금은 그를 믿어보는 수밖에요. 하지만 귀족도, 학자도, 상인도 아닌 자가 어떻게...”

“도망자라거나, 어떤 사연이 있지 않겠습니까? 제가 보기에도 평범한 자는 아니긴 합니다만.”

“어찌되었건 그자의 말대로라면 밀항에 성공할 확률이 꽤 높아진 것 같네요.”

“네, 솔직히 밀항이라는 것을 생각도 안 해봐서 제일 불안했습니다만... 일단 로제 항구 근처에 안전하게 도착만 할 수 있다면 어느 정도 안심해도 될 것 같습니다.”

뱃일에 문외한인 그녀가 보기에도 안 쓰는 물건들을 쌓아놓은 듯한 박스들 뒤로 교묘하게 숨겨진 은신처로 기어들어가며 엘리안은 왈칵 치밀어 오르는 눈물을 애써 참았다.

평소에 자신을 딸처럼 아껴주던 알렌 경의 도움으로 어떻게 여기까지 오기는 했지만, 상황은 답답하기만 했다.

로제 항구라고? 그곳에 무사히 도착한다 한들 무슨 뾰족한 수가 있을까?

착하기만 하던 큰 오빠는 죽었고, 나라는 둘째 오빠에 의해 완전히 넘어간 것 같다.

아직 어린 동생들도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도리가 없다.

반역자라는 누명을 벗고 복권을 바라는 것은 현실적으로 무리였다.

왕족이라고는 하지만 남자도 아니고 여자인 자신을 받아 줄 곳이나 있을까?

알렌은 돌아가신 모후의 본가인 벨로키나 왕국의 스코타 후작령을 목적지로 잡고 있지만, 솔직히 그녀는 좀 회의적이었다.

자신이 두 살 무렵에 병으로 돌아가셨다는 모후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그나마 큰 오빠인 프레드는 어렸을 적 기억이라도 있어서 가끔 그리워하기도 했지만, 자신은 그런 그리움조차 없었다.

프레티아와 벨로키나 왕국은 제법 우호적인 관계였기 때문에 사신이 자주 오갔음에도, 그 사신들은 1왕자인 프레드에만 관심을 기울일 뿐이었다.

차기 왕좌에 가장 가까운 1왕자가 있는데, 정략혼으로 왕실을 떠날 것이 분명한 공주 따위, 친해질 가치조차 없었던 것이겠지.

직설적으로 말해서, 피가 이어져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생판 모르는 남이나 마찬가지인데, 당신들의 딸을 기억도 못하는 얼굴도 본적 없는 손녀 따위를 후작가에서 반겨줄 리가 없지 않은가?

심지어 일레드 왕국까지 얽혀서 정치적인 부담도 만만치 않은 상황이니 말이다.

다만 자신에게서 모후의 그림자를 보면서 모든 것을 희생한 우직한 기사에게는, 차마 그런 이야기를 할 자신이 없었다.

* * * * *

출항 준비를 마치고 계류삭을 걷기 직전, 헐레벌떡 뛰어오는 항구관리관과 경비병들이 보였다.

선장님은 오만상을 구기며 기분을 숨김없이 표현하기는 했지만, 결국 철거했던 현문을 다시 설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숨을 헐떡거리며 승선한 항구관리관은 연신 숨을 몰아쉬고는 선장님께 물었다.

“헥, 헥, 아이고 힘들어. 거, 좀 천천히 갈 수도 있지 않소?”

“관리관님, 출항 신고는 다 끝나지 않았습니까?”

“으흠, 상부의 특별 지시로 출항하는 선박은 선내 수색을 받아야 하오.”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갑판장이 벌컥 화를 내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니, 선적할 때 이미 검사는 다 하지 않았습니까! 고작 몇 시간이나 지났다고...”

“갑판장!”

선장님이 노기 어린 목소리로 갑판장을 부르자 갑판장은 이를 부득 갈더니 한 발 물러서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선장님, 관리관님.”

경비병들의 손이 칼 손잡이에 닿고 관리관의 얼굴에 짜증이 서리기는 했지만, 다행히 상황이 더 나빠지지는 않았다.

“나라고 좋아서 하는 것 같소? 거, 나도 귀찮으니까 빨리빨리 합시다.”

내뱉듯이 말을 마친 관리관은 모여 있는 선원들을 밀치며 빠른 걸음으로 창고로 향했다.

나는 똥 씹은 표정의 선장님과 갑판장, 안절부절하는 항해사 쪽을 보고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제가 같이 다니겠습니다.”

“어, 그래. 저 새끼들 상품 못 망가트리게 잘 감시해.”

“예에~.”

이 배의 최고 권력자인 선장님도 눈 아래로 보는 인간들을 내가 무슨 재주로 막겠어?

말을 하는 갑판장도 홧김에 하는 말이고, 나도 예의상 하는 말인 거지.

그것보다 더 중요한건 저들에게 왕녀 일행이 안 걸리는 거다.

선원들을 모아서 인적을 확인하고, 선실을 엉망으로 뒤집어 놓은 것도 모자라 예쁘게 쌓여있는 면직물 박스를 뜯어보던 관리관이 눈을 빛내며 소리쳤다.

“잠깐!”

“무슨일이십니까?”

“저기, 저쪽에 잡동사니 박스 뒤쪽! 의심스러운데?”

관리관의 말이 끝나자 경비병들이 동시에 칼을 뽑아들고 관리관의 손이 가리키는 방향을 포위했다.

포위망이 완성되자 관리관이 뒤따르던 나에게 손짓했다.

“거기 너! 가서 저 박스를 치워라. 허튼 수작 부리면 모가지에 구멍을 내주마.”

“저곳에는 아무것도 없...”

“시끄럽다! 어서 치우기나 해!”

결국 나는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포위망 안쪽의 박스를 향해 걸어갈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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