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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7화 (7/420)

<7화> 준비된 잔머리는 목숨도 구한다(1)

내가 낑낑거리며 박스를 치워내자, 한 사람이 겨우 쪼그리고 들어갈 듯한 공간이 나왔다.

어느새 내 뒤로 접근해서 잠시 살펴보던 경비병이 난처한 목소리로 말했다.

“항구관리관님, 사람이 머문 흔적은 없습니다.”

“쳇, 혹시나 했더니... 응? 그런데 저건 뭐야? 가져와봐.”

관리관이 숨겨진 공간에 놓여있던 사람 머리통만한 가죽 주머니를 손가락질 하며 가지고 오라고 하자, 경비병이 나를 밀쳐내고는 가죽 주머니를 들어 관리관에게 가지고 갔다.

가죽 주머니를 열어 본 관리관은 의심스럽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으며 나에게 물었다.

“흠? 과일에 고급 육포... 이런게 왜 여기에 있지?”

그랬다. 관리관이 발견한 것은 내가 따로 준비해 둔 비상식량 주머니였다.

“그게... 제가 몰래 숨겨둔 것인데...”

“그러니까 너 같은 뱃놈이 왜 이런 고급품을 숨겨뒀냐고 묻는 거다!”

아, 듣고 있자니 뭔가 뜨거운 것이 단전 깊숙한 곳에서 끓어오르는 기분이었지만, 일단 참기로 했다.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경비병들의 뜨거운 시선을 느끼며 내 식도락의 당위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창고가 소란스러워 지는 것을 느낀 모양인지 항해사님이 창고로 내려왔다.

“항구관리관님, 저 녀석은 원래 저런 음식들을 자주 숨겨놓고 먹습니다. 좀 봐주시죠?”

항구관리관이 들고 있는 주머니를 보고 상황을 눈치 챈 항해사가 부드럽게 말하며 관리관의 품속에 작은 주머니를 찔러 넣었다.

“흠. 흠, 아니 뭐 내가 이런 사람이 아닌데... 진짜 이해 좀 해주게. 내가 이런 걸 더 받으려고 하는게 아니고 위에서 하도 닦달을 해서 말이지...”

“아이고,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진짜 위에서 명령이 내려와서 온 건지, 이 기회에 한 몫 제대로 챙기려고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뇌물이 들어가자 봄볕에 녹아내리는 눈처럼 관리관의 표정이 녹아 내렸다.

그리고는 나를 힐끗 보더니 괜히 잇소리를 내며 몸을 돌렸다.

“쯧, 천한 것이 입맛만 까다롭다니... 에잉, 이제 대충 다 둘러본 건가?”

아직 왕녀 일행이 숨어있는 함수 창고를 확인하지 않았지만 이미 긴장이 풀린 관리관은 더 이상 수색할 의지가 없어보였다.

그 뒤를 따르며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눈치 없는 경비병 한 놈이 입을 열었다.

“항구관리관님, 아직 저쪽에 있는 창고는 확인하지 않으셨습니다만.”

“...어? 아 진짜... 알았다. 저곳만 마저 확인하지.”

어디를 가나 눈치가 없어 남들에게 민폐인 사람이 있게 마련인데, 이 경비병 녀석이 딱 그 꼴이었다.

상관인 항구관리관은 물론이고 동료들인 다른 경비병들도 얼굴을 팍 구기면서 싫은 티를 팍팍 내고 있는데 전혀 모르는 표정이다.

...당연히 이중에서 제일 짜증나는 사람은 바로 나다.

함수 창고의 입구까지 와서 해치를 열어 제친 항구관리관은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뒤를 따르던 경비병 중 한 명을 불렀다.

“다 들어가기는 좁으니까 자네가 내려가서 ‘빨리’ 확인하고 오게.”

“넷!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관리관님!”

다행스럽게도 지목된 경비병은 이 사태의 원흉인 눈치 없는 그 녀석이 아니었고, 항구관리관이 내린 명령을 완벽하게 수행했다.

내려 간지 10초가 채 지나기도 전에 올라왔다는 뜻이다.

“아무 이상 없습니다!”

“역시! 자네 일처리 속도가 마음에 드는군? 앞으로 지켜보지!”

나는 소란스럽게 배에서 내리는 항구관리관 일행을 지켜보며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스럽게도 한고비는 넘긴 것 같다.

뇌물을 더 받은 것도 주효했겠지만, 내가 만든 트랩도 한 몫을 했을 거다.

아무래도 사람이 그렇지 않은가?

의심스러운 부분을 확인했는데도 허탕을 치면 대부분 의욕이 떨어지게 마련이다.

항구관리관은 별 기대 없이 우리 배에 올랐다가 자세히 보면 충분히 의심스러운 내 트랩을 발견했고, 그곳에서 의심스러운 물건도 발견했다.

그때 아마 항구관리관은 초대형 공적을 세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부풀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특이한 내 식성(하지만 충분히 납득할 만한)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는 기대감이 급격히 무너지면서 거의 없던 의욕까지 모조리 상실했을 거다.

그런데 타이밍 좋게 별로 기대하지 않았던 뇌물까지 추가로 들어오자, 마지막 남은 함수 창고는 대충대충 수색하는 척만 하고 넘겨버린 것이다.

전생에서나 현생에서나, 보통 사람들은 커다란 기회나 운이 자신에게 올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게 마련이다.

정신없는 출항준비가 끝나고 우리는 순조롭게 항해를 시작했다.

그리고 밤이 되자 이번 사건에 얽힌 사람들이 야간 당직을 서는 시간을 이용해 왕녀 일행을 무사히 화물 창고로 옮기는 것에도 성공했다.

이제 두 사람이 아무도 모르게 우리 배에서 내리기만 하면 된다.

* * * * *

며칠째 제대로 잠을 못 잤더니 피곤해서 쓰러질 지경이다.

하지만 역시나 냄새나는 선실은 너무 싫었기 때문에 갑판에 쪼그려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 시끄러운 견시수의 외침이 들려왔다.

“좌현 330도, 미확인 선박이 접근중입니다!”

나처럼 졸고 있었는지 약간 나른한 목소리로 항해사가 물었다.

“이쪽으로 오는거 맞아? 필라비스 방향으로 가는게 아니고?”

“일단 함수는 이쪽을 향하고 있는데요?”

아무래도 항구 근처는 여러 항로가 겹치기 때문에 선박들이 자주 보이게 마련이다.

견시수가 보고한 선박 말고도 지금 육안으로 확인되는 선박만도 서너척은 된다.

그래서인지 보고하는 견시수도, 의례적인 질문을 하는 항해사도 별다른 긴장감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거대 항구인 필라비스에서 고작 하루거리도 안되는 곳이니, 설마 해적일 가능성이 있겠어?

3분쯤 지났을까?

다시 잠이 들려고 하는 순간에 약간 당황한 듯 한 견시수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어? 항해사님! 필라비스 연안경비함입니다. 정선 신호를 보내는데요?”

“연안경비함? 뭐야, 이번에는 해상검문인가? 가지가지 하는군, 정말...”

항해사는 귀찮다는 듯이 말했지만, 나는 잠이 확 달아나는 것을 느꼈다.

잘하면 피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 무색하게, 결국 예상할 수 있는 마지막 위기가 다가오고 만 것이다.

침착하자. 이런 때일수록 당황하면 안되는거다.

나는 긴장의 끈을 조이며 최대한 평온한 말투로 항해사에게 물었다.

“항해사님, 돛 내릴까요?”

“어, 그리고 선장님이랑 갑판장님께도 말씀드려.”

팽팽하게 부풀어있던 돛이 접히고, 고드실카 호는 천천히 속도를 늦췄다.

결국 배가 거의 멈춰 서자 갑판장의 신호에 따라 닻이 던져졌고, 그런 우리에게 연안경비함에서 내려진 단정 두 개가 접근했다.

“무역선 고드실카 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무슨 일이신지요?”

선장님의 의례적인 환영인사가 끝나자 날카로운 눈으로 우리를 살펴보던 40대 중반의 남자가 대답했다.

“필라비스 해상경비대 소속 루코 대위다. 이 배는 필라비스에서 나오는 중인가?”

“네, 대위님. 저희는 면직물을 싣고 어제...”

“수색해!”

자신을 루코 대위라고 밝힌 남자는 선장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신을 따라 승선한 육전대에게 수색을 명했다.

칼 같은 기세에 깜짝 놀란 선장님이 한 발 나서며 항의했다.

“아니! 이게 무슨 경우입니까! 저는 허가를 받은...”

이번에도 선장님은 말을 마칠 수 없었다.

루코 대위가 인상을 쓰며 재빨리 칼을 뽑아 선장님의 목에 들이 댔기 때문이다.

“동작 그만! 본관은 중요한 공무를 수행중이다. 저항하는 자는 이 자리에서 죽여주지.”

갑작스러운 상황전개에 다들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고, 육전대원들은 한참동안 배의 여기저기를 들쑤시고 다녔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함수 창고쪽에서 육전대원의 외침이 들려왔다.

“루코 대위님! 여기에 수상한 흔적이 있습니다!”

소리를 들은 루코 대위는 입꼬리를 슬쩍 말아 올리며 나를 지목했다.

“다른 놈들은 여기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그리고 너! 따라와!”

루코 대위가 내 대답을 듣지도 않고 함수 방향으로 몸을 돌리자, 남아 있던 육전대원 두 명이 동시에 칼을 뽑아들고 선장님 이하 선원들을 위협하는 자세를 취했다.

내가 자꾸만 떨려오는 다리에 애써 힘을 주며 연안경비함 쪽을 슬쩍 보자, 어느새 포구에서 튀어나온 대포들이 우리를 겨냥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가 보이면 그냥 쏴버리겠다는 의지가 노골적으로 느껴졌다.

연안경비함이라 대포도 얼마 없고 그나마 있는 대포도 소구경이겠지만, 애석하게도 우리는 대포는커녕 닻까지 내리고 있는 상황이다.

대포까지 갈 필요도 없이, 선장님까지 다해도 21명에 불과한 우리가 12명이나 되는 군인들을 상대로 이길 가능성도 없다.

...X발. 아무래도 오늘이 인생 2회 차 마지막 날이 될 것 같은 거지같은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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