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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8화 (8/420)

<8화> 준비된 잔머리는 목숨도 구한다(2)

그나마 아직 최악의 상황이 아닌 것은 발견 장소가 함수 창고 쪽이라는 것이다.

왕녀 일행이 화물 창고로 자리를 옮긴 후에 나름대로 치운다고 치웠는데, 야간이기도 하고 마음이 급해서 흔적이 남은 모양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불려가는 사람이 나라는 것이지.

최소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나 당황해서 어버버 하다가 딱 걸릴 확률이 99%쯤 될 것 같은 공범 5명 보다는 내가 가는 것이 낫다.

“네놈, 뭘 알고 있지?”

몇 걸음 걷기도 전에 내게 고개도 돌리지 않고 나지막하게 던지는 루코 대위의 질문에 순간적으로 숨이 멎는 줄 알았다.

“네?! 뭐, 뭘, 아니 무엇,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덕분에 의도치 않게 말더듬이가 되어버렸지만, 루카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이짓거리를 오래 하다 보니 말이지, 큰 건수는 너 같은 조무래기가 아니라 윗대가리들이 저지른다는 걸 알게 되지. 그리고 그 놈들은 반드시 주로 부리는 심복이 있어. 바로 네놈 같은.”

오, 신이시여! 하필이면 왜 이런 놈이 걸린 걸까?

솔직히 우리가 그렇게 도덕적인 집단은 아닌지라 몇 가지 불법적인 일을 저지르기는 했다.

주로 밀수, 밀매, 장물처리... 뭐 그런 것들이다.

살짝 변명하자면, 배가 작으니까 부수입이 좀 있어야 하잖아?

그리고 우리처럼 작은 배들은 밀수건 뭐건 규모가 하도 작아서 잘 잡지도 않는다.

물론 걸려도 상관없다는 것은 아니고 재수 없게 걸리면 그냥 뭐 압류, 벌금 정도로 끝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일은 대부분 갑판장 주도하에 이루어지고, 갑판장이 믿고 쓰는 사람이 바로 나다.

그래, 저 대위 녀석 기가 막히게 맞췄다.

함수 창고로 먼저 내려가라는 손짓을 하며 루카 대위가 차갑게 말했다.

“지금이라도 말하면 너는 살려주겠다. 밀항자가 있다면 지금 불어라. 만약 걸린다면 이번만큼은 고작 벌금 정도로 안 끝날거야.”

하필이면 콕 집어서 밀항자라니.

이것으로 저 놈이 찾는 것이 바로 왕녀 일행이라는 것이 확실해졌다.

다행히 나는 창고로 내려가는 중이었기 때문에 살짝 고개를 숙이는 정도로 표정을 숨길 수 있었다.

“아이고, 대위님! 용서해주십시오! 저희가 몇 번 밀항자를 태운 것은 맞지만 이번에는 진짜 못 태웠습니다! 필라비스의 분위기가 너무 심각해서 고작 이틀 만에 출항한걸요.”

함수 창고로 내려가자 아주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그리고 육전대원 두 사람이 등불을 가까이 대고 보기 좋게 만들어 놓은 장소는 바로 어제까지 왕녀 일행이 머물던 곳이었다.

나는 공포에 질려서 그 자리를 다시 확인하고는 무의식중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몇 가지 도구가 사람이 앉기 좋게 눌려 있기는 했지만 딱히 밀항을 의심할만한 증거는 안보였기 때문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자세히 살펴보고 있는데 내 뒤를 따라 내려온 루카 대위가 거침없이 그 장소로 향해 걸어갔다.

“뭐야?”

“넷! 이곳에서 의심스러운 앉은 흔적과 육포 조각, 아직 완전히 마르지 않은 과일의 씨앗을 발견했습니다.”

“흠, 확실히 육포나 과일이 이런 창고에 있을 것들은 아니지.”

지금이다! 지금 치고 나가야 살 수 있어!

나는 밑바닥까지 용기를 끌어 모아 입을 열었다.

“그, 그곳은 제가...”

순간적으로 창고에 있는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부담감이 온 몸을 옭죄어 왔지만 나는 겨우 정신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그, 제가 가, 가끔 쉬는 장소입니다...”

마치 뱀과 같은 냉정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루카 대위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 뭐, 네놈이 남 몰래 처박혀 쉬는 곳이다, 그런 주장을 하고 싶은 건가?”

“그, 그렇...”

왠지 말이 통할 것 같은 느낌에 막 설명을 하려는데 얼음송곳으로 내리 찍는 듯 한 날카로운 루카 대위의 목소리가 말문을 막았다.

“개소리! 너 같은 선원 놈이 이런데서 과일을 처먹을 만큼 여유가 있다?”

걸렸다, 이 새끼.

“정말입니다! 믿어주십시오. 지금 당장 증거를 보여드릴 수도 있습니다!”

“증거? 하, 좋다. 한 번 속아주지. 그 증거는 어디 있지?”

“여기가 아니라 화물 창고에 있습니다.”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마지막 도박수를 던지는 수밖에 없다.

만약 다른 곳을 뒤지고 있는 육전대원들이 화물 창고를 꼼꼼히 뒤지다가 왕녀 일행을 발견하는 날에는 앞뒤 잴 것도 없이 우린 다 죽을 판이다.

그런 상황이 오기 전에 생각의 허를 찌르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겠지.

다행히 아직 준비해둔 한 수가 남아있으니 최악의 순간에도 한 번쯤은 기회를 만들 수 있을 거다.

우리가 함수 창고를 나와 화물 창고로 향하는데, 다른 곳 수색하던 육전대원들도 화물 창고로 향하는 것이 보였다.

마침 창고로 들어가려던 그들은 우리를 발견하고는 자기들끼리 몇 마디를 주고받더니, 우리가 올 때까지 그 자리에 서서 대기했다.

“대위님, 다른 곳은 모두 수색을 마쳤습니다. 이곳이 마지막입니다.”

“좋아. 선원들은?”

말을 하던 육전대원은 나를 힐끔 보더니 자세를 바로 하고 대답했다.

“견시수까지 총원 20명 모두 신병 확보했습니다.”

“무장은?”

“모두 해제했습니다. 반항은 없었습니다.”

“잘했다, 상병. 선원들 감시에 두 사람을 더 보내고 자네도 두 명을 데리고 입구에서 지킨다. 만약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밖으로 먼저 나오려고 한다면 무조건 신호탄을 쏴라.”

“알겠습니다!”

지시를 마친 루카 대위는 잠시 서서 생각하더니 이윽고 다음 명령을 내렸다.

“좋아, 나머지는 다 나를 따른다. 그리고 너! 앞장서라.”

화물 창고로 내려온 나는 재빨리 항구관리관에게 걸렸던 그 곳으로 다가갔다.

출항하자마자 경비병들이 들쑤신 창고를 정리한다는 핑계로 더 교묘하게 숨겨놔서 얼핏 보기에는 뒤에 공간이 없어 보였다.

남은 육전대원 네 명과 루카 대위가 창고에 모두 들어오자 루카 대위는 고개를 까딱 하며 내게 신호를 주었다.

나는 진짜로 상당히 무거운 잡동사니 박스를 낑낑거리며 살짝 밀어낸 뒤, 손을 넣어 몇 번 더듬어 보다가 말했다.

“저, 죄송한데 등불을 좀 빌릴 수 있습니까?”

살짝 인상을 쓴 루카 대위는 할 수 없다는 듯 등불을 든 육전대원에게 고개짓을 했다.

그러자 내게 다가온 육전대원이 등불을 건네주었고, 나는 등불로 안쪽을 비춰보며 육포와 과일 따위가 들어있는 주머니를 꺼냈다.

루카 대위에게 몇 걸음 다가 간 나는 자연스럽게 등불을 근처의 화물 박스 위에 올리고 양손으로 주머니를 공손하게 건네주었다.

신경질적으로 주머니를 열어 본 루카 대위는 피식 웃더니 주머니를 바닥에 집어 던지며 말했다.

“그래, 이게 네놈 것이다? 좋아. 그렇다고 하지.”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샅샅이 뒤져라! 움직이는 건 쥐새끼 한 마리도 놓치지 마!”

이런 미친 작자가!

결국 최후의 수단을 쓰게 만드는 거냐?!

나는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아니! 이게 무슨...! 여기 있는 것들은 전부 화물들입니다! 대위님 제발 자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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