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준비된 잔머리는 목숨도 구한다(3)
나는 깜짝 놀라는 척 하며 루코 대위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그는 인상을 확 구기며 나를 떨쳐내기 위해 팔을 세차게 떨쳐냈다.
“감히 어디에 손을 대는 거냐!”
그리고 나는 균형을 잃은 척 넘어지며 상자 위의 등불을 넘어뜨렸다.
사실 배 위에서 등불 같은 것은 잘 쓰지 않는다.
배라는 것이 대부분 목재나 천 같은 불에 타기 좋은 소재로 만들어지다 보니, 기름을 사용하는 등불은 워낙 위험한 물건이기 때문이다.
내가 본 유일한 예외가 바로 경비대들이다.
그들은 목적 자체가 숨겨진 것을 찾는 일이다 보니 조명이 필요했고, 애초에 그들의 승선한다는 것은 배가 안정상태(정박 상태 또는 투묘 상태)라는 뜻이다 보니 위험도도 많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어찌되었건 내 의도대로 대차게 넘어진 등불은 곧 바닥에 떨어지며 기름이 흘러나왔고, 그 기름에 불이 붙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으악! 불! 불이다!”
미친놈처럼 방방 뛰며 힐끗 루카 대위를 보자 그 역시 약간 당황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일단 저놈도 배를 타는 인간이니 선상에서 화재가 얼마나 큰 사고인지 알고 있을 터, 검문검색 중이었다고는 하지만 타국의 상선에 불을 낸 꼴이니 난감할 터였다.
하지만 루코 대위는 곧 냉정을 회복하고는 빠르게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당황하지마! 어차피 불길은 크지 않다! 거기 네 명, 너희는 불을 끄고 너는 밖에 대기 중인 놈들에게 상황 설명해주고 와. 입구도 좀 열어 놓고. 밖으로는 절대 나가지 마라.”
잠깐 몸이 얼어있던 육전대원들은 루코 대위의 지시가 떨어지자 언제 당황했냐는 듯 움직이기 시작했고, 나는 미리 봐 두었던 커다란 천 조각으로 불을 두들겨 끄면서 조심스럽게 상황을 살폈다.
루코 대위는 못마땅한 눈으로 서서히 잡혀가는 불길을 바라보고 있었고, 육전대원들은 열심히 불을 두들겨 끄느라 다른 곳을 살필 여유도 없어보였다.
등불에 있는 기름의 양이 워낙 뻔한데다가 내가 미리 근처에 불을 끄기 좋은 낡은 아마포를 자연스럽게 놔두었기 때문에 불길은 금방 잡혔다.
나는 선창에 가득 찬 연기를 손으로 헤치며 루코에게 물었다.
“대위님, 잠시 창을 열어도 되겠습니까? 아시다시피 상품에 냄새가 베면 큰일인지라...”
아, 선창에도 나무로 된 창문이 있기는 하다.
평소에는 바닷물이 들이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막아두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빨리 열어야 했다.
직물에 탄내가 잔뜩 베이면 상품가치가 하락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선창 내부는 연기로 인해 숨쉬기는 물론이고 시야확보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당연히 지금 상황은 내가 의도한 바다.
그나저나 이 사람들은 잘 숨었으려나...?
아무리 교묘하게 숨는다고 하더라도, 밀항자들은 본격적인 수색을 벗어나기는 어렵다.
시체가 아닌 이상에야 최소한의 활동 공간을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설렁설렁 대충 둘러보는 수색 정도는 쥐 죽은 듯이 가만히 있으면 적당히 넘길 수 있을지 몰라도, 지금 육전대원들처럼 상자마다 다 개봉할 정도로 본격적으로 수색하면 도저히 그 눈길을 피하기 힘들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선창 수색을 마친 육전대원들은 고개를 저으며 루코에게 다가와 보고했다.
“특별히 의심스러운 곳은 없습니다.”
“사람이 들어있을 만한 곳은 모두 수색했습니다.”
“...그래?”
보고를 들은 루코는 찝찝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지만 바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철수한다.”
* * * * *
“왕녀님, 배가... 멈춘 것 같습니다.”
기사 알렌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깜빡 잠이 들었던 엘리안은 살짝 고개를 저으며 정신을 차리려고 애를 썼다.
고작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온 몸의 관절과 근육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게다가 먹는 것, 입는 것, 심지어 싸는 것까지...
살면서 닷새가 넘도록 씻기는커녕 옷도 못 갈아입기는 처음이다.
힘들다? 아니, 고통 뭐 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치욕스럽다. 차라리 죽고 싶다. 거의 매 순간마다 그런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녀의 뒤에 있는 무언가를 보는 알렌의 눈빛이, 마지막 이성의 끈을 놓는 것을 막고 있다.
“아직 도착할 시간은 아니지요?”
“네, 아무리 바다의 변덕이 심하더라도 사흘은 걸린다는 거리가 하루가 되지는 않을 테니까요.”
“어쩌면... 그자가 말한 만일의 상황일지도 모르겠네요.”
“네, 혹시 모르니 미리 준비해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알렌은 소리 없이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남은 음식을 한데 묶어서 커다란 상자 밑의 숨겨진 틈에 집어넣고, 혹시라도 자신이나 왕녀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물건이 있는지 주변을 세심하게 살폈다.
발자국, 앉은 자국, 손이 닿은 부분까지 모조리 확인을 마친 후에 걱정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왕녀에게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훌륭하신 분이다. 메릴린 전하의 미모와 지혜를 쏙 빼 닮으셨구나...’
탈출 후 행적을 숨기기로 했을 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왕녀의 외모와 향기였다.
알렌은 기사로서 감히 그 부분을 지적할 수 없었기 때문에 행적이 금방 들통 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지만 겨우 다시 탈출에 성공하자 왕녀는 스스로 탐스러운 머리를 마구잡이로 자르고, 드레스를 불태운 뒤, 천민들이 입는 옷을 걸치고 로브로 몸을 감쌌다.
심지어 자신의 향기를 죽이기 위해서 더러운 진흙 구덩이에 들어가서 한참을 있기까지 했다.
심지어 지금의 상황은 더 심각했다.
기품이나 편리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알렌이 생각하기에는 왕국의 죄수들보다 나을 것이 없는 생활환경이지만 단 한마디의 불평조차 하지 않은 왕녀였다.
의심스러울 만큼 똑똑한 그 선원에게 높은 수준의 식사를 요구한 것도, 왕녀가 요구한 것이 아니었다.
주변 정리를 마치고 꼼꼼하게 두 번, 세 번을 확인 한 알렌은 왕녀에게 조용히 말했다.
“이 정도라면 추적을 전문적으로 익힌 추적자가 오더라도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이제 기다리면 되나요?”
“아니, 혹시 모르니 그자가 말한 비밀 은신처 근처에서 기다리시지요.”
사실 알렌도 그자가 알려준 비밀 은신처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성인 남자 한 명이 들어갈 정도의 공간.
왕녀와 자신이 함께 들어가려면 단순한 접촉 정도가 아니라 거의 끌어안다시피 해야 할 것이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불경하다는 생각이 퍼뜩 들어 얼른 지우기는 했지만, 최악의 순간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상황은 점점 안 좋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이제 어느 정도 얼굴이 익숙한 그 선원이, 타국의 군인으로 보이는 남자들을 대동하고 창고로 들어왔고, 항구에서는 멋지게 먹혀들어간 잔꾀가 통하지 않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등불이 엎어지며 모두의 시선이 한 곳에 쏠리는 순간, 알렌은 조용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먼저 은신처를 감쪽같이 감추고 있는 판자를 제거하고, 왕녀를 그 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병사들이 불을 끄기 시작하자 그 소리에 맞춰 거의 왕녀를 몸으로 구겨 넣으며 어렵게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마지막, 분리된 판자를 홈에 맞추어 끼우자 완벽한 어둠이 두 사람을 감쌌다.
작은 관에 들어가면 이런 느낌일까?
온몸을 옴싹달싹 할 수 없었고, 가녀린 왕녀의 숨소리는 지금 당장이라도 끊어질 듯 위태로웠다.
그나마도 근처에 발소리가 들리면 두 사람은 죽은 듯이 숨을 참아야만 했다.
신의 도움이었을까?
다행히 군인으로 보이는 남자들이 떠나는 기미가 보였고, 그제서야 알렌과 왕녀는 그나마 편안하게 숨을 쉴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문제가 다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이 은신처라는 곳은 몸을 움직이는 것이 제한되는 내부에서 열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심지어 왕녀와 함께 들어와 있으니 더욱 힘들었다.
다 부술 각오로 힘을 쓴다면 어찌어찌 가능하기야 하겠지만, 그래서야 혹시 이후에 비슷한 위기가 온다면 회피할 방법이 없었다.
결국, 그자가 돌아 올 때까지 두 사람의 고난은 끝나지 않을 듯 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