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잘가요 왕녀님, 다시는 보지 맙시다
지친 표정으로 천천히 멀어지는 연안경비함을 바라보는 선원들 사이에 끼어있던 갑판장이 손뼉을 치며 주위를 환기시켰다.
“다들 정신 차리고 제자리로 돌아가! 그리고 리안! 밑에 상황은 어때?”
“아, 등불이 넘어지면서 불이 나긴 했는데, 금방 껐습니다.”
“제기랄, 망할 놈들... 상품은 어때?”
“화재 자체는 별 문제가 아닌데, 아무래도 탄내가 베었을테니 제 가격을 받기는 힘들 것 같은데요?”
“휴... 선장님께 보고해야겠군. 네가 정리 좀 해놔.”
“아니, 저 진짜 죽을 뻔 했거든요? 좀 쉬게 해주면 안돼요?”
물론 내가 가서 정리해야 할 필요도 있고 어차피 나를 시키겠지만 일단 삐딱하게 대답을 던졌다.
아무 말도 안했지만 눈치 빠른 갑판장이라면 충분히 나를 의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진짜 왕녀 일행을 태웠을 것이라고 까지는 생각하지 않겠지만, 뭔가 뒤가 구린 짓을 하고 있다고는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 상황이라면 평소와 다른 고분고분한 모습을 보였다가는 일이 어떻게 꼬일지 모른다.
“시끄러! 지금 상황이 어떤지 몰라서 그래? 빨랑 가봐!”
“예, 예, 그럼 가봐야죠 뭐...”
내가 귀찮다는 듯이 느린 걸음으로 화물 창고로 걸어가자, 눈치를 보고 있던 몇 명이 슬쩍 따라 붙었다.
그나마 나랑 좀 친한 녀석들이다.
돕겠다고 이렇게 나서 주는건 참 고맙지만 지금은 조금 곤란하지.
“일단 다른 곳부터 정리하고 있어. 특히 선실에 내 자리 좀 잘 살펴보고.”
“어, 리안. 그... 괜찮은거야?”
왕녀 일행이 화물 창고에 숨어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네이선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뭐, 진짜 최악을 생각할 만큼 위험하기는 했지만 다 끝났으니까 안심을 시켜줘야겠지.
나는 네이선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쾌활한 목소리로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크게 말했다.
“어? 걱정 마! 그 놈들이 상자를 다 열어봐서 상품 상태랑 뭐 그런 것 좀 먼저 확인해야 해서 그래. 대충 다른데 정리 되면 서너명만 데리고 창고로 와.”
나를 따르던 선원들이 다른 곳으로 흩어지고, 별다른 문제없이 창고에 들어온 나는 재빨리 은신처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보통체형의 성인 남자가 들어가도 답답할 정도로 작은 공간인데, 두 사람이나 들어갔으니 지금쯤 기절 직전일 지도 모르겠다.
심지어 알렌이라는 기사는 일반인보다 덩치가 훨씬 큰 편에 속하니 말이다.
급히 은신처를 가린 판자를 떼어내니 땀에 흠뻑 젖은 두 사람이 보였다.
다행스럽게도 특별하게 문제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두 분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제일 큰 고비는 넘긴 것 같습니다.”
“오늘 같은 일이 또 있을 수도 있지 않겠소?”
“가능성을 아주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만, 확률은 희박합니다.”
“그렇다면 조금 더 긴장해야겠군.”
“네, 다음에 같은 일이 벌어질 것 같다면 힘들더라도 미리 숨으시는게 좋을겁니다. 매번 화재가 난다면 분명히 의심하는 사람이 생길테니까요.”
“으음, 고맙소.”
“뭐, 저도 살려고 한 일이니까요. 그보다 곧 선원들이 내려와서 창고를 정리 할 것입니다. 가능하면 관련자들을 부를 거고, 숨어계신 부분은 제가 미리 해 두기야 하겠지만 혹시 모르니 조심해 주시기 바랍니다.”
두 사람이 조심스럽게 숨어들자 나는 빠르게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모든 상자를 열어 재낀 것은 아니지만, 상당수의 상자가 열려있어서 탄 냄새가 베어버린 면직물이 적지 않았다.
냄새가 아주 심한 것은 아니고 은은하게 나는 정도지만, 이 정도도 상인들에게는 가격을 후려칠 좋은 핑곗거리였다.
불을 낸 건 일단 나니까 재수없으면 징계를 받거나 급여를 못 받을 지도 모르겠다.
심지어 두 사람을 내려 주는 방법까지 생각하면 어쩌면 고드실카 호를 타고 항해하는 것은 이게 마지막일지도...
* * * * *
낮 시간 내내 열심히 일을 한 결과 선내는 깔끔하게 정리되기는 했다.
하지만 저녁식사를 하는 선원들의 얼굴은 어두웠다.
화재가 났다는 것과 상품들이 손상을 입었다는 말이 모두에게 퍼진 탓이다.
선주를 겸하고 있는 우리 선장님은 뱃사람 출신 치고는 굉장히 좋은 사람이었다.
무리한 일정으로 선원들을 위험에 내몰지도 않고, 가끔 이윤이 많이 남을 때는 보너스도 챙겨줄 정도였다.
필라비스에서 문제가 조금 있기는 했지만 그 문제 덕에 이익이 커졌으니 어쩌면 이번에 로제에 도착하면 보너스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분위기가 조금 쳐지기는 했지만,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은 채로 하루가 지나고 다시 밤이 되었다.
나는 네이선, 우르타와 함께 엘리안 왕녀와 알렌을 배에서 내보내기로 했다.
내일 아침이면 로제에 입항할 수 있다는 것을 이미 항해사에게 슬쩍 확인한 터라 지금이 마지막 기회였다.
보통의 밀항자라면 입항하고 화물을 내리는 부산스러운 틈에 슬쩍 선원들 틈에 끼여서 내리면 그만이지만, 두 사람은 그게 불가능했다.
장님이 봐도 선원이 아닌 것이 티나 나는데, 그게 가능할 리가 있나?
선창에 있는 화물을 다 내리는 동안 숨어있는 것은 불가능하고, 전에는 운이 좋았을 뿐 함수 창고는 두 사람이 안전하게 숨어있기는 조금 어렵다.
그러니까 결국 입항 전에 사라지는 방법밖에 없다는 뜻이다.
조용히 우현의 단정(소형 보트)이 내려졌고, 알렌은 담담한 표정으로 내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큰 신세를 졌군. 훗날 왕녀님이 복권되신다면 이 신세를 갚을 날이 올 것이다.”
그리고 그때까지 가만히 서 있던 왕녀는 목뒤로 손을 가져가더니 목걸이를 풀어내게 건넸다.
알렌의 눈살이 찌푸려지며 저지하려는 찰나, 왕녀의 단호한 목소리가 먼저 나왔다.
“이 정도라면 충분한 보상이 될 것이다.”
“어... 알렌 경의 표정을 보니 귀한 것 같은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무조건 받고 싶기는 하지만 알렌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탈출 방법까지 준비되었겠다, 수틀리면 우리를 다 죽이고 튈 수도 있을 테니까.
“그렇습니다, 왕녀님. 그 목걸이는...”
“아니, 목숨보다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경. 이 자가 아니라면 저는 죽거나 끌려가서 누군가의 노리개가 되었을 테니, 이 자는 이것을 받을 자격은 충분합니다.”
살짝 한 숨을 내쉰 알렌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후... 왕녀님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그렇다면 감사히 받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곳에서 잘 처분하여 두 분께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도록 하죠.”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반응을 보아하니 상당히 비싼 녀석인 모양이다.
선금으로 받은 브로치에 이것까지 더하면 진짜 내 배를 장만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나도 뭔가 보답을 줘야겠지.
협박에 의해 목숨 걸고 하기는 했지만, 겨우 밀항 한 번에 이정도 금액이면 서비스정도는 줘도 괜찮은 거잖아?
“여기 이 주머니를 받으십시오.”
“이것은?”
“얼마 되지 않지만 자주 쓰이는 화폐들입니다. 어디에서 꺼내더라도 의심을 받지는 않을 겁니다. 당분간 행적을 숨기시려면 귀한 물건들을 처분하시기 보다는 이 돈을 쓰십시오.”
“그건 고맙군. 잘 쓰겠네.”
알렌이 주머니를 갈무리하더니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나는 줄을 잡고 내려가려는 알렌에게 마지막 당부를 전했다.
“잊지마십시오. 밤을 틈타 무조건 동쪽 방향으로 노를 저으시면 됩니다. 아마 동이 틀 때쯤이면 육지가 보일겁니다. 무탈하시기 바랍니다.”
“......”
아무런 대답 없이 알렌이 사라지고, 잠시 후 줄이 두어 번 당겨지자 우리는 조심스럽게 왕녀를 아래로 내리기 시작했다.
한 밤중에 줄을 타고 내려가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일이라서 택한 방법이었다.
딱 봐도 평생 운동이랑 담을 쌓고 지냈을 것 같은 왕녀보고 줄을 타고 내려가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왕녀는 내려지기 바로 직전, 주저하더니 한 마디를 더 남겼다.
“혹시, 혹시라도 내가 복권이 된다면... 꼭 찾아 오거라. 만약 그 때 그 목걸이를 가지고 온다면 더 큰 보상을 내리마.”
왕녀가 단정에 내려가는 것에 성공하자, 잠시 후 삐걱거리는 노 젓는 소리가 들리더니 배에서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 소리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던 우리는, 그제서야 긴장이 풀리며 갑판에 주저앉았다.
진짜, 진짜 끝이다.
몇 분이나 흘렀을까? 침묵을 깨고 우르타가 물었다.
“저 사람들 괜찮을까?”
“왜?”
“아니, 귀족치고는 착한 것 같아서...”
“시끄러, 이제 우리 일 아니니까 그냥 잊어.”
“으응...”
우르타가 입을 다물자 기다렸다는 듯이 네이선이 입을 열었다.
“리안, 이번에는 돈 좀 되는거야? 아까 그 목걸이 엄청 비싸 보이던데?”
“어이구, 걱정마. 이번에 목숨 건 녀석들 내가 제대로 챙겨 줄테니까. 내가 이런 걸로 장난하는 거 봤어?”
“아, 당연히 리안은 믿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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