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11화 (11/420)

<11화> 그들이 남기고 간 똥

다음 날 아침이 되자 난리가 났다.

당연히 수평선 뒤 쪽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로제항 때문은 아니었고, 우현의 단정이 없어진 것을 갑판장이 알아 버렸기 때문이다.

사실 단정이 손바닥만한 것도 아니고 알아채지 못하는게 이상하긴 하다.

낡아서 무게를 못 이겨 터져버린 로프를 확인 한 갑판장은 야간 당직을 섰던 선원들을 모조리 불러놓고 떽떽거리는 중이었다.

“이야, 그러니까 단정이 떨어지는 소리를 아무도 못 들었다? 왜? 그냥 다 쳐 잤다고 그러지 그러냐? 시발! 전부다 기절을 했어도 한 놈은 시끄러워서 깼겠다! 이게 말이 돼?”

설마 아무도 못 듣기야 했을까?

들었어도 다 공범인지라 입 다물고 있는거지...

괜히 불똥이 튈까 싶어서 조용히 자리를 옮기려는데, 갑판장의 으르렁 거리는 목소리가 내 뒷덜미를 잡아챘다.

“야, 리안! 너 이리와!”

“아, 저는 왜요? 전 당직도 안섰는데...”

“이 새끼가 오냐오냐 하니까... 너 이 새끼, 출항하기 전에 고정용 로프 체크 안했어?”

“아... 너무 정신없어서 깜빡하긴 했는데...”

차마 내가 어제 교체했다고는 할 수 없으니 대충 둘러대며 갑판장의 얼굴을 힐끔 쳐다보니 아주 터질 듯이 씨뻘겋게 변한 것이, 쉽게 넘어갈 일은 아니다 싶었다.

하긴, 단정이 한두 푼 하는 것도 아니고, 열 받을 만 하긴 하지.

나도 배타면서 단정이 풀려 사라질 거라고는 예상해 본적이 없다.

애초에 태풍을 만난 것도 아닌데 누가 단정 같은 커다란 부속품이 사라질 것이라고 예상하겠어?

“너... 따라와. 나머지는 해산! 오늘은 입항 전에 배에 있는 전체 로프 재점검한다!”

어라... 표정이 좀 심상치 않은데?

갑판장이 향한 곳은 자신이 쓰고 있는 부선장실 이었다.

침대와 책상, 조그마한 옷장 겸 보관함을 제외하면 서있을 자리도 별로 없는 작은 방이지만, 혼자서 쓰는 공간이라는게 얼마나 좋은 일인가?

전생을 기준으로 말해서 부선장실이 고시원이라면 우리가 쓰는 선실은 축사정도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내가 부선장실에 따라 들어가서 공손하게 문을 닫고 돌아서자, 악귀같은 표정의 갑판장의 얼굴이 코앞에 보였다.

그리고는 어떻게 대응을 하기도 전에 숨이 턱 막히면서 등 쪽에 강렬한 충격이 가해졌다.

“커허헉, 가, 갑판장님, 왜...”

내 멱살을 잡아서 벽에 찍어 누른 갑판장은 씹어뱉듯이 말했다.

“너 이 새끼, 말 똑바로 해. 지금부터 거짓말하면 진짜 죽여 버릴 테니까.”

숨이 턱턱 막히는 와중에도 뇌가 정신없이 일하기 시작했다.

갑판장은 확신이 없다면 이렇게 행동할 사람이 아니다.

뭔가 걸린 거다.

누가 다 불었나?

뭘 발견했을까?

혹시 어제 소동을 눈치 챘나?

아니면... 또 뭐가 있지?

“크헉, 마, 말로, 말로 해요!”

“누구야? 어제 단정 타고 나간 놈들.”

“그게 무슨... 으어억!”

더 세차게 나를 벽으로 밀어붙인 갑판장은 어느새 허리춤에서 대거를 뽑아들고 내 오른쪽 눈알 바로 앞에 갖다 대며 다시 물었다.

“한번만 더 개소리를 지껄이면 애꾸로 만들고 시작한다. 내가 못할 것 같아?”

“컥, 우선 이것 좀 풀고...”

“말해, 새끼야!”

망할. 진짜 찌를 기세다.

도대체 뭐가 걸린 거지?

솔직히 갑판장 정도의 노련한 사람이 주의 깊게 살핀다면 의심할 만한 부분이 너무 많아서 감도 못 잡겠다.

갑판장이 평소에 허허거려서 그렇지, 뱃일만 30년을 한 사람이다.

이 시대에 뱃일을 30년 했다는 것이 무슨 뜻일 것 같아?

전생에서도 뱃사람들은 거칠기로 유명했지만, 이 시대는 더 심하다.

강도, 도적, 용병, 군인, 선원이 거의 비슷한 취급을 받을 정도다.

살인? 갑판장이 사람을 죽이는 것을 내가 본 횟수만 네 번이다.

그리고 갑판장이 떠드는 무용담을 바탕으로 보면 허풍이 섞인 것을 감안해도 그가 죽인 사람의 수는 100명이 훌쩍 넘는다.

전생 같았으면 희대의 살인마로 사형에 처해질 일이지만, 애석하게도 이 시대에는 흔한 일이다.

“밀항자, 밀항자요!”

“너 이... 지금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면서...!”

“큭, 내보냈잖아요, 다 이야기할 테니 이것 좀...”

시시각각 조여오는 죽음의 공포에 굴복한 내가 사실대로 털어놓자, 갑판장은 분노와 안도가 섞인 기묘한 표정으로 몸에서 힘을 뺐다.

겨우 갑판장의 팔을 뿌리치고 몸을 빼낸 나는 한 동안 기침을 하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멱살을 얼마나 세게 잡혔는지 쇄골이 부러진 느낌이다.

날개뼈도 아프고 목도 뻐근한 것이 내일 일어나면 근육통 제대로 오게 생겼다.

“야, 좀 괜찮으면 다 털어놔봐. 이번에도 숨기는거 있으면 경고 없이 죽여 버린다.”

“하아, 그러니까 필라비스에 입항한 날 밤에요...”

결국 나는 갑판장에게 사실대로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갑판장이 어디에서 어디까지 알고 있고 추측하는지 알 도리가 없으니 별 수 있나?

그러나 갑판장의 기함하는 목소리에 내 설명은 금방 끊기고 말았다.

“뭐?! 진짜 왕녀였다고?!”

“아 좀, 이야기 하라면서요?”

“어, 어? 그, 그래.”

“여튼 그 기사, 대놓고 말했다구요... 안 태워주면 다 죽인다고.“

불을 지른 부분이나 단정을 내리고 고정 로프를 바꿔치기 한 부분 등에서 몇 마디 욕설이 나오기는 했지만 그럭저럭 나는 설명을 마칠 수 있었다.

내 설명이 끝나자 한참동안 심각한 얼굴로 고민하던 갑판장이 물었다.

“좋아. 태운 것은 이해한다. 다 죽을 수는 없으니까. 그런데 왜 나나 선장님한테 말을 안했지?”

“여럿이 알면 뭐해요? 괜히 걸릴 위험만 높아지지.”

“최소한 그들을 숨기는데 도움을 받을 수는 있었을 거다. 나도 선장님도 불가피한 상황이라는 것을 이해했을 테니까.”

“반대로 수상함을 느낀 멍청한 선원 중 한 명이 고자질했을 수도 있고, 어설픈 연기 때문에 다 죽는 결과가 나올 수도 있었겠죠?”

“후... 알겠다. 하지만 이 건은 선장님께 보고할 수밖에 없어. 이번만큼은 나도 네 편을 들기 힘들군.”

“이해합니다, 갑판장님.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다행히 당장 죽는 최악의 결말은 피했지만 아무래도 고드실카 호는 이만 내려야 할 것 같다.

선장님이 내리라고 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이런 상황에서 내가 무슨 낯짝으로 다시 배를 타겠어?

그나저나 선장님이 전말을 다 알게 되면 손실분을 책임지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왕녀 일행에게 주려고 다른 선원들에게 빌린 돈도 적지 않아서 막대한 손실이 예상된다.

브로치랑 목걸이가 있으니 상관없는 것 아닌가 싶지만... 음, 일단 매각을 보류하려고 했다.

이왕 도와주기로 했으면 끝까지 도와줘야 할 것 아냐?

필라비스에서 직항으로 가기 힘든 먼 항구에서 장신구를 매각한다면, 솔직히 추적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그 정도 되면 그곳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도 여러 가지가 되고 그 사이에 왔다 갔다 한 배도 어마어마할 테니까.

게다가 그렇게 되면 고드실카 호도 위험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게 된다.

마음을 정리하고 조용히 방을 나오기전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갑판장에게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아셨어요?”

“...그거 알아서 뭐하게?”

“아니, 그냥 궁금해서요. 몇 가지 걸리는게 있긴 한데...”

“너는 그 눈빛이 있어. 나쁜 짓 할 때의 눈빛. 자꾸 내 눈을 피하는 것 같아서 유심히 봤지.”

“고작 그걸로 눈치 챘다구요?”

“......단정 고정 로프, 출항 전에 내가 확인했다. 알았으면 이만 꺼져, 꼴도 보기 싫다!”

아오, 왜 평소에는 나한테 맡기고 안하던 짓을!

부선장실을 나오자 어느새 성큼 가까워진 로제 항이 눈에 들어 왔다.

이제 저 곳에 도착하면 나름 정이 들었던 고드실카 호와 작별하게 되는 것이다.

딱히 뭐, 이후의 일이 걱정되고 그러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이 세계는 대항해시대, 경력 있는 선원을 원하는 곳은 얼마든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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