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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15화 (15/420)

<15화> 오버테크놀로지

토토 할아범이 사람을 시켜서 가지고 온 금화와 은화를 가지고 우리는 분배를 시작했다.

토토 할아범이 따로 소개비를 주겠다고 했지만 우리도 성의 표시로 발레아스 아저씨에게 5만 로스를 건네주었고, 공범 다섯 명은 15만씩, 나는 20만과 목걸이를 가졌다.

솔직히 일은 내가 다 한 꼴이라 절반은 내가 받아야 맞는 것 같은데, 이제 헤어지는 마당에 그렇게까지 인색하게 굴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 멍청이들도 이 돈을 쓰는 동안은 그나마 입이 무겁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

음... 희희낙락하며 사방으로 흩어지는 녀석들을 보니 큰 기대는 하지 말아야겠다.

그리고 남은 녀석들...

“야, 너희는 왜 그러고 있어?”

내가 어정쩡하게 서 있는 우르타와 네이선을 보며 묻자, 우물쭈물하던 우르타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어... 리안은 어디로 갈 거야?”

“난 은행가야지. 돈 맡기러.”

“아, 은행...”

“뭐야? 새삼스럽게. 그럼 난 간다?”

내가 싱거운 녀석의 반응에 몸을 돌리자, 다급한 네이선의 외침이 들렸다.

“어! 은행! 그래, 우리도 은행에 돈을 맡겨야지! 그렇지, 우르타?”

“어, 어? 어! 그, 그래! 이러다 잃어버리면 어떡해?”

뭐라는 거야, 이 바보들이?

전생을 살아 본 나는 은행을 잘 사용하는 편이지만, 이 시대의 대부분 사람들은 은행을 이용하지 않는다.

심지어 선원 같은 하층민들은 교육수준이 처참한 것도 모자라 잉여 수입이라는게 거의 없다보니 은행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단적인 예로 그나마 우르타와 네이선은 나랑 친한 편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은행계좌를 개설하지 않았다.

저축이라고 해봐야 농사지을 때 추수가 끝난 뒤 겨울을 위해 식재료를 보관하는 정도의 개념정도만 생각하는 사람들이니, 남에게 내 돈을 맡겨둔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중세수준의 은행이라면 수많은 문제가 있을 것 같지만, 의외로 이 세계의 은행은 대단한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바로 마법. 그렇다, 전생에서는 소설에서나 나오던 그것이다.

물론 소설처럼 성을 박살내고, 손짓 한 번에 수천 명을 죽이는 그런 종류는 아니지만, 분명히 이 세계도 마법이 있다.

하여튼 이 마법이라는 것이 은행에 적용되어 있는데, 하나는 계좌 카드.

진짜 카드다. 심지어 전생에서의 카드랑 비슷하기까지 하다.

재질은 금속이고(무슨 금속인지는 모른다) 조금 두껍고, 무겁기는 하지만 이 카드가 진짜 대단한 녀석이다.

비록 은행에서 입출금 할 때 밖에 못쓰지만, 무려 잔액을 상시적으로 표시해준다.

두 번째는 본인인증이다.

내가 은행에서 카드를 제출하고 용건을 말하면, 직원이 내 손목을 통해 마력패턴이 카드와 일치하는지 확인한다.

그리고 카드의 이전 거래 지점에 마력 통신(전화까지는 아니고 모스 부호 정도 되는 것 같다)으로 잔액이 맞는지 확인한다.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말 그대로 전생의 전산 시스템을 거의 비슷하게 갖추어 놓은 최첨단 은행인 셈이다.

이 오파츠급의 놀라운 은행에 한 가지 단점이라면, 가격이 비싸다는 것이다.

일단 계좌 개설 및 카드 발급 비용이 1만 로스 근처로, 보통 가난한 사람들의 한 달 생활비와 맞먹는다.

그게 끝이 아니라, 매년 이자가 붙기는커녕 연회비(?)를 내야한다.

이게 약 3,000로스 가량 된다.

은행을 이용한 빈도나 금액에 따라 조금씩 다른 것 같은데, 정확하게는 모르겠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은행을 쓰는 사람은 상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고작해봐야 부유한 중산층, 상인, 하급 귀족들 정도일까?

그래서 선원 특유의 후줄근한 옷차림으로 은행을 가면 눈총을 받는 것은 기본이고, 입구에서 저지당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런 꼴을 자주 봐서인지 우르타와 네이선은 내가 몇 차례 권했음에도 계좌개설을 차일피일 미루고만 있었는데 갑자기 은행계좌를 만들겠다니 웬 일인가 싶었다.

흠, 하긴 저놈들이 저만한 돈을 쥐어본 것은 처음일테니 좀 쫄리기는 하겠다.

말이 쉬워서 15만 로스지, 보통 평민들은 평생가도 한 번에 못 쥐어보는 거금이긴 하지.

한바탕 소동 끝에 나와 같은 은행에 계좌를 개설하고 대부분의 돈을 입금한 우리는 우울할 정도로 가벼워진 돈주머니를 들고 은행을 나섰다.

어... 실제로 우르타와 네이선은 우울해 보였다.

“자, 어떡할까? 대충 저녁시간인데 같이 술이나 한 잔 하고 헤어질래?”

해가 슬쩍 넘어가는 시간대라 조금 이르기는 하지만 나도 괜히 아쉬운 마음에 제안을 하자 우르타가 반색하며 대답했다.

“그래! 그거 좋지! 가자, 술 마시러! 진짜 오늘은 원 없이 먹어도 되겠다!”

대부분 입금했다지만 그래도 워낙 액수가 크다보니 다들 수중에는 1만 로스 전후의 거금이 남아있었다.

그렇다면 굳이 싸구려 선술집을 갈 필요는 없겠지.

솔직히 선원들이 주로 다니는 선술집 겸 식당 겸 여관은 너무 후지다.

가격대가 저렴한 것은 좋지만 이렇게 돈 많을 때 아니면 언제 호사를 누리겠어?

막말로 왕녀의 일이 꼬이면 내일 당장이라도 죽을지 모르는 판이잖아.

시내의 제법 괜찮은 식당에서 밥을 먹고, 펍을 겸하는 깨끗한 여관에서 세상이 끝난것처럼 술을 퍼마신 우리는 그날 세 마리의 개가 되어 기절했다...

* * * * *

눈이 부시다. 뭐지? 나 갑판에서 잠들었나?

뱃속은 벽돌을 갈아 넣은 것처럼 쓰리고, 식도부터 혀까지 바짝 말라서 말도 안나온다.

도대체 어제 무슨 짓을... 아, 술... 미쳤지... 일단 일어나자.

물컹!

뭐야... 설마 이 자식들 나랑 같은 방에서 잠들었나?

그런데 뭐가 이렇게 부드러워?

“으음, 오빠... 조금만 더 자자...”

이게 무슨 개...

“으아악!”

“엄마야! 왜 소리를 질러요!”

부지불식간에 내가 소리를 지르자 그 소리를 듣고 깨어난 여자가 나를 보면서 또 소리를 질렀다.

다행히 속옷은 입고 있었지만, 뭐... 그렇다.

이 세계의 속옷이 남성의 정상적인 아침 신체 변화를 가려줄 만큼 튼튼하고 촘촘한게 아니라서 말이지...

“누, 누구세요?!”

내가 재빨리 스캔한 내 옷을 집어 들고 대충 걸치며 묻자, 당황한 표정을 짓던 여자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 밤을 같이 보내놓고 이름도 몰라요?”

그러면서 힐끗 내 아래쪽을 보더니 베시시 웃는다.

“밤에 너무 취해서 제대로 못한 것 같은데 지금이라도 할래요?”

몇 년 동안 빛도 제대로 안 들어오는 선실에서 자거나 창문 하나 없는 싸구려 여관의 골방에서 자다가 반쯤 열린 창문 틈으로 빛이 들어오니 엄청나게 밝아 보인다.

그리고 그 빛 때문에 여자의 눈부신 나신... 은 개뿔.

일단 여자가 나체가 아니고, 내 취향도 아니다.

얼굴에 이상한 화장으로 떡칠을 하기는 했지만 최소로 잡아도 30대 후반.

아! 혹시라도 오해할지 모르는데, 이곳의 30대 후반이면 내일모래 할머니 소리 들을 나이다.

전생의 신체 나이로 따지면 대충 50대쯤 되겠다.

물론 관리 잘하고, 생활고에 시달리지 않는 고귀하신 분들은 훨씬 천천히 늙는다고 하지만 보통은 그렇다는 뜻이다.

아쉬워하는 여자를 겨우 내 보내고 나니 참아왔던 목마름이 다시 밀려온다.

하지만 물을 마시려면 방을 나가야 하는데, 그전에 소지품 점검 좀 해보자.

내가 창녀랑 잠을 자지 않는 이유가 몇 가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이놈의 보안이다.

창녀들이 항상 뭔가를 훔친다는 뜻은 아니지만, 고가의 물건이나 많은 돈을 보면 열에 아홉은 도둑질을 한다.

단지 선원들은 대부분 푼돈만 가진 반 거지들이라서 굳이 손을 안대는 것 뿐이다.

하여간 팍 줄기는 했어도 고이 모셔져 있는 돈주머니와 술마시기 전에 미리 숨겨둔 목걸이를 확인한 내가 침대에 주저앉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요상한 것이 눈에 띄었다.

무광택의 검은색을 띈 손가락 길이의 무엇.

너무 오래간만에 봐서, 아니 전생에서밖에 못 봐서 순간 인지 부조화가 일어났다.

내가 손을 부들부들 떨며 그것을 집어 들자 낯설지만 익숙한, 기묘한 촉감이 느껴진다.

플라스틱...

플라스틱이다!

세상에, 플라스틱이라니? 현생에 절대 없는 물질이 바로 플라스틱이다.

전생에서도 19세기나 되어서야 개발된 화학의 정수가 현생에 존재할리 없지 않은가?

그보다 더 멋진 것은, 그래! 이것이 바로 라이터라는 것이다.

딸깍, 딸깍, 화르륵!

똑딱이 버튼을 두어번 누르자, 배를 타면서 그렇게 그리워했던 아름다운 불꽃이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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