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이직과 스카웃 제의의 함정(1)
사실 이 세계의 배라는 곳은 불의 사용이 매우 제한적이다.
기본적으로 대부분이 목재로 이루어진 선박의 특성상 불이 위험하기도 했지만, 불을 사용하기 위해서 필요한 연료의 문제도 컸다.
이 세계는 연료로 주로 나무를 사용한다.
일전에 연안경비대 소동 때 있었던 기름을 사용한 등불은 굉장히 특수한 경우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 나무라는 녀석이 부피도 그렇고 무게도 그렇고 보통이 아니다.
안그래도 공간이 부족한 곳이 배인데, 난방이나 요리 좀 하겠다고 불을 마구 피웠다가는 장작을 한 가득 실어야겠지.
하지만 불을 아주 안 쓸 수는 없으니 필수적으로 준비된 것이 바로 부싯돌.
이 부싯돌이라는 녀석을 쓸 때마다 그리워했던 녀석이 바로 라이터였던 것이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라이터를 만지작거리며 차분하게 생각해보았다.
고작 며칠 전에는 과도가 나오더니 얼마 되지도 않아서 라이터라니.
물건도 랜덤이고 주기도 제멋대로다.
하지만 이번에 확실히 다른 부분은, 이 세계에 없는 물질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심지어 라이터 안에 들어있는 가스도 그렇다.
액화가스가 자연 상태로 존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이 세계에서 사용되는 연료는 아니니까.
도대체 무슨 기준으로 물건이 튀어나오는 것일까?
이러다가 막 총이라도 나온다면 완전히 대박일 텐데.
아니 총알 제조 기술이 없어서 어차피 소용없으려나?
그건 그렇고 사람의 욕심이 끝이 없다보니 차라리 지포 라이터였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아껴 쓴다고 해도 라이터가 소모품이라는 부분은 해결할 수 없으니까.
그리고 구조상 복제도 불가능할 것 같다.
하지만 지포 라이터라면 복제가 가능하지 않을까?
발화점이 조금 더 높고 비쌀지 몰라도 일단 기름 자체는 구할 수 있는 세상이니 연료도 문제 없을거고.
에이, 쓸데없는 생각이지.
그냥 주어진 행운에 감사하도록 하자.
1층으로 내려와 의자에 걸터앉아 물을 마시면서 보니, 몇몇 사람이 술이나 잠에 쩔어있는 뇌를 깨우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이 보였다.
이곳의 대부분 여관처럼 1층은 식당 겸 펍을 겸하고 있어서 일단 식사를 시키기로 했다.
해장을 해야지, 어우 속쓰려.
지나가는 종업원에게 식사를 주문하고 함께 온 녀석들을 깨워달라고 부탁하며 돈을 좀 쥐어주었다.
내가 가서 깨우고 싶어도 도대체 몇 호실에 있는지를 알아야지.
어차피 종업원에게 구구절절 설명하면서 호실을 알아내느니, 그냥 돈 조금 쥐어주고 다 시키는게 편하다.
잠시 후 식사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계단으로 네이선이 터덜터덜 내려왔다.
아까 전에 여자 두 명이 먼저 계단을 내려와서 사라졌지만 모르는 것으로 하자.
계단에 서서 떡 진 머리를 벅벅 긁던 네이선은 이내 나를 발견하고는 내가 있는 테이블로 걸어와서 무너지듯이 주저앉았다.
“좀 괜찮냐?”
“응, 좀 피곤하긴 하네.”
괜찮다고? 이 자식은 무슨 강철의 간을 가진 인간인가?
“내가 잘 기억이 안나서 그러는데, 우르타는?”
“리안이 들어가고 나서 기절했길래 내가 방에다 던져 넣었어.”
뭐야, 이놈만 술을 안마신건가?
분명히 술을 물처럼 들이킨 것 같은데?
내가 어이없는 눈으로 가만히 보고 있자, 네이선은 쑥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어제 먹었던 술 있잖아, 포엔인가? 그거 맛있더라 그치?”
어, 위스키인지 진인지 모르겠는데 맛은 기억 안나고 독하긴 어마어마하게 독하더라.
고드실카 호를 타면서 같이 술을 마시기는 했지만, 어제처럼 미친 듯이 마신 것은 처음이라 전혀 몰랐다.
네이선 이 놈, 엄청난 주당이구나...
나와 네이선의 식사가 끝날 때쯤에 겔겔거리며 1층으로 내려온 우르타는, 몇 차례 어제 먹은 음식의 잔여물과 위액을 확인하고 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자,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리안은 어떻게 할건데?”
하아, 생각해보니 이 녀석들 내가 고드실카 호를 타기 시작한 이후에 들어온 녀석들이다.
심지어 첫 배가 고드실카 호였으니, 나를 어미새처럼 쫓아다니는 것도 이해가 된다.
하지만 내가 무슨 보모도 아니고 언제까지 덩치가 산만한 남자애들의 뒤치다꺼리를 할 수는 없는 일이지.
심지어 저 녀석들이 꽤나 어린 편이기는 해도 나도 만만치 않게 어리다.
끽해봐야 두, 세살이나 차이 날까?
물론 정신연령은 세배쯤 차이날 것 같기는 하지만.
“괜히 은행에서 돈 찾아 흥청망청 놀 생각 말고, 다시 다른 배 타.”
“어엉...”
“네이선 너는 돛도 잘 다루는 편이고 딱 봐도 신체능력이 좋은게 티가 나니까 경력이 있다는 것만 알려주면 어떤 배건 환영할거야.”
네이선을 보면서 차근차근 장점에 대해 설명해주자 어린 아이처럼 헤벌쭉 웃는다.
그리고 그 옆에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나를 보는 우르타 녀석이 있었다.
“리안 나는? 나는 어때?”
“우르타? 너는 최고의 견시수야. 알고 있잖아? 너도 어떤 배에서든 환영 받을거야.”
자신감을 심어주기 위해 일부러 칭찬한 부분도 있지만, 두 사람은 정말 괜찮은 선원이다.
두 사람의 인성만 가지고도 선장들이 절대 배에서 내보내고 싶지 않을 텐데, 심지어 두 사람은 신체적으로도 남들보다 뛰어난 부분들이 있다.
우르타는 시력과 반사 신경이 엄청난 수준이고, 네이선은...
글쎄, 네이선은 그냥 말 그대로 몸 쓰는 일에 관해서는 천재다.
기본적으로 근력 자체도 남다르고, 유연성, 반사 신경, 민첩성... 하다못해 습득력까지, 나랑 같은 인간이 맞나 의심할 정도로 대단하다.
몇 년 전, 해적을 만났을 때 첫 전투를 겪게 된 네이선은 눈이 부실 정도였다.
배를 타기 전까지 칼(살인을 주 목적으로 만들어진 날붙이)을 잡아본 적도 없다는 녀석이었는데, 혼자서 해적 일곱을 베어 넘겼다.
물론 다른 선원들도 분전하기는 했지만, 사실 그날의 승리는 온전히 네이선의 몫이었다.
해적 선장이 네이선을 보고 기가 질려서 후퇴했거든.
해적, 해적하니까 엄청 무서울 것 같지만 그들이라고 매번 약탈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래도 주업이 칼질이다보니 해적이 더 난폭하고 살인에도 익숙하지만, 선원들이라고 딱히 순박한 사람들이 아니라서 머릿수가 비슷하다면 승패는 알 수 없게 된다.
게다가 해적들도 자기 목숨 귀한 줄은 안다.
자기네 동료가 너무 많이 죽으면 영업을 접거나, 다른 해적에게 털릴 수도 있기 때문에 피해가 커질 것 같으면 도주하는 경우도 적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뭐, 해적이 상선 노릇도 하고, 상선들도 욕심이 생기면 다른 배 약탈도 하고 그런다.
그냥 주업이 뭐냐의 문제일 뿐, 다 거기서 거기라는 뜻이다.
* * * * *
결국 우리 셋은 혼잡한 부둣가를 함께 어슬렁거리고 있다.
아무리 말을 해도 굳이 나를 따라 오겠다는데 어쩌겠어?
배에서 신규 선원을 받을 때 그룹으로 받는 것은 굉장히 싫어한다.
일단 가장 큰 문제는 반란 가능성이다.
만약에 반란이나 사보타주를 목적으로 사람이 탄다면, 그 동조자의 규모가 클수록 위험도가 증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두 번째는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범죄에 이용될 가능성이다.
앞서 말한 첫 번째와 거의 비슷한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세 번째는 기존 인원들의 편의를 위해서... 라고밖에 못하겠다.
신입이 오면 좀 텃세도 부리고 갈구고 그래야 하는데, 그룹 단위로 들어오면 그게 어렵다.
나는 솔직히 전생의 기억이 있어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지만, 그냥 근절하기 어려운 악습처럼 내려오는 것이라서 내가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
그나마 사람이 죽어나갈 정도로 심하지는 않으니까 그냥저냥 눈감는 수밖에.
뭐, 상황이 그렇지만 고작 세 명이라면 어느 정도 비벼볼만 하지 않을까?
특히나 이번에는 좀 큰 배를 타 볼 생각이라서 인원도 많을 테니 그리 까다롭게 굴지는 않을 것 같기도 하다.
“리안, 고드실카 같은 배는 왜 안돼?”
“그건 너무 작잖아.”
“하지만 그게 더 익숙한데?
“맞아! 그리고 큰 배라고 돈을 더 주는 것도 아니라면서?”
“하지만 큰 배를 타본 경험이 있어야 장거리 항해를 가는 배를 타지.”
“어? 장거리? 얼마나?”
“...서해 항로?”
내가 약간 머뭇거리며 대답하자, 순간 정적이 흐르더니 사색이 된 네이선과 우르카가 나를 붙잡고 늘어졌다.
“으악! 리안 안돼! 서해 항로에는 엄청 큰 문어가 선박을 한입에 삼킨댔어!”
“석양이 지는 방향에서 드래곤이 나타나 불을 뿜는대!”
“노래를 부르면 마녀가 나타나서...”
“아니야! 세이렌의 노래가 들리면...”
“유령선이 나타나면 어떡할건데?!”
“그만!”
내가 소리를 지르자 두 사람이 놀란 토끼눈을 하고 입을 다물었다.
하여간 뱃사람들의 허풍이라는 건... 어휴.
그리고 이 녀석들은 스무살도 넘은 녀석들이 바보인가... 그걸 다 믿어?
“그런 말도 안되는 것들은 다 헛소문이고, 그냥 바다가 좀 난폭하고 해적이 많아. 그 정도라구.”
“아니, 그런데, 리안도 안가봤잖아...”
어...그건 내가 할 말이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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