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이직과 스카웃 제의의 함정(2)
해가 붉게 물들 때까지 항구의 이곳저곳을 누비며 배를 구경만 하자 인내심에 한계에 이른 우르타가 목소리를 높였다.
“리아안! 언제까지 돌아다니기만 할 거야?”
“그래, 맞아! 이렇게 돌아다닌다고 배에 태워주는건 아니잖아?”
기다렸다는 듯이 네이선이 동조하고 나섰다.
이런 단순한 녀석들 같으니라구...
내가 이렇게 돌아다니며 배들을 관찰하는 이유가 있다.
가장 큰 이유는 당연히 어떤 배가 그나마 괜찮을지 알아보기 위함이다.
세세한 사정이야 배를 타봐야 알겠지만 선박의 외관과 선원들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간단한 견적정도는 나온다.
예를 들어 지금 내 왼쪽에 있는 배처럼 너무 깨끗하면 좀 그렇다.
깨끗하면 좋은 것 아니냐고?
그 깨끗하게 하는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야?
물론 관리 상태가 엉망인 것이 좋다는 뜻은 아니지만 저렇게 광적일 정도로 깨끗하다면 선원으로 일하기가 매우 피곤해진다.
그리고 아까 지나온 배의 선원들처럼 활기가 없고 상처나 멍이 눈에 띈다면 당연히 기피대상 1호다.
물론 전 항해가 이상하게 매우 어려웠거나, 재수 없게 해적을 만났거나 하는 변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예외의 경우까지 고려할 수는 없는 것 아니겠어?
그리고 추가적으로 아직 부두에 정박중인 고드실카 호를 살펴 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배는 기본적으로 항구를 떠나는 순간 폐쇄상태가 된다.
설마 망망대해에서 헤엄쳐서 도망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멍청이는 없겠지.
일전에 왕녀 일행이 단정을 타고 떠날 수 있었던 이유도 근처에 육지가 있는 특수한 상황이라 가능했던 것이지, 일반적으로 바다위에서 표류한다는 것은 죽는다는 뜻이다.
하여간 만약 고드실카 호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있어 보인다면 배를 타는 것은 포기하고 최대한 빨리 여기를 벗어날 생각이었다.
왕녀 일행이 문제가 생겨서 그 여파가 고드실카 호에까지 미쳤다면, 이미 내렸다고 해도 주범(?)에 해당하는 우리도 위험할 테니까.
만약 그 상황에서 다른 배에 승선한 상태라면... 도망도 못가고 잡혀 죽는 거지 뭐.
이런 세세한 내용을 설명하기가 너무 귀찮았던 나는 일단 두 사람의 입을 막아보기로 했다.
“배고프지? 일단 뭐 좀 먹자.”
단순한 녀석들이라 먹는 이야기가 나오자 바로 헤실헤실 풀어진다.
네이선 이 술고래 녀석은 또 술을 마시자고 한다...
오늘도 어제처럼 광란의 밤을 보내기에는 체력도, 주머니 사정도 여의치 않아서 그냥 평범한 부두의 선술집 겸 여관을 찾아 들어갔다.
주 고객이 선원이니만큼 더럽고, 시끄럽고, 음식도 맛이 없고 그렇긴 하지만 싸다.
어제의 강렬한 기억 때문인지 제법 배가 고플 시간임에도 나온 식사를 깨작거리고 있는데, 슬슬 주점에 사람이 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여기, 저기에서 선원을 모집하는 홍보 활동이... 있을 리가 없지.
아무리 개나 소나 받아준다고 해도 최소한의 커트라인이라는게 있는데, 무슨 전생의 게임이나 만화처럼 뜬금없이 ‘우리 배 탈사람!’ 이라거나 ‘너, 내 동료가 되라!’ 이럴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아, 전에 말한 취객 납치 같은 건 정말 극단적인 상황인거고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나지는 않는다.
그러면 탈 배를 어떻게 구하느냐?
테이블에 앉아서 우리끼리 적당히 크게 웃고 떠들면 된다.
그러면서 흘리는거지.
전에 타던 배, 지금 실직 상태라는 것, 주로 했던 일, 경력, 특이한 이력(사건사고)... 이력서 제출 같은 거다.
술 마시고 했던 얘기 또 하는건 별로 이상하지 않으니까 사람이 물갈이 될 때쯤 되면 레파토리를 한 번 더 읊는다.
그러다보면 이렇게 낚시에 걸리는 놈이 하나씩 생기는거지.
“...그래서 말인데, 자네들 우리 배에 타 볼 생각 없나?”
맥주잔을 들고 우리 테이블의 한 자리를 차지하더니, 자기 자랑을 한참 늘어놓던 남자가 결국 본론을 꺼냈다.
그리고 두 테이블 건너 한 남자는 이쪽을 계속 힐끔거리고 있다.
“그래서 그쪽이 타는 배가 뭐라구요?”
“아, 내가 말을 안했나? 플로토라고 하지! 250톤급 신형 켈리언급 상선일세!”
음, 낮에 부두를 돌면서 본적이 있다.
신형은 개뿔, 딱 봐도 진수 된지 10년은 지난 것 같더만.
딱히 나쁜 구석은 기억나지 않지만 솔직히 대형 상선이라고 보기에는 좀 무리가 있다.
적당히 장단을 맞춰주다가 그를 내보내자,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 테이블을 힐끔거리던 남자가 당연하다는 듯이 우리 테이블에 앉았다.
흰머리 덕분에 빛바랜 회색빛을 띄고 있지만 뱃사람답지 않게 깔끔한 헤어스타일, 50대 중반쯤 되 보이는 남자는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우리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신가? 탈 배를 구하는 모양이지?”
“그렇습니다. 그런데 뱃사람 맞으십니까? 그렇게 안보이시는데...?”
“하하, 이렇게 예의바른 대응이라니, 나보다는 자네가 더 뱃사람 같지 않군. 어때, 우리 배에 타 보겠나?”
술잔을 들고 쾌활하게 웃음을 짓고 있지만 예리한 눈빛이 내 얼굴에서 떠나지 않았다.
뭐지 이 사람?
나는 왠지 모를 불안함에 어깨를 으쓱이며 한 번 튕겨보기로 했다.
“보시다시피 여기 세 명이 다 젊어서 규율이 빡빡한 배는 좀 못 버팁니다. 그런데 당신을 보면 어휴, 우리랑 안 맞을 것 같은데요?”
“고드실카 호라면 나도 좀 들은게 있지. 물론 거기보다야 못하겠지만 우리 배도 상당히 괜찮은 편이라고 자부하네.”
어라? 고드실카를 안다고?
고드실카는 큰 배도 아니고 딱히 유명할 일도 없다.
뭐 선원 복지가 좋다는 것 정도가 이슈가 될 수는 있겠지만, 애초에 자의로 내리는 선원이 거의 없다보니 그리 크게 퍼져나갔을 것 같지도 않다.
내가 살짝 놀라며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자 그는 실수했다는 듯이 손을 내저으며 말을 이었다.
“아, 아, 오해하지 말게. 거기 갑판장이랑 내가 좀 아는 사이거든.”
“아, 갑판장님이랑...”
“어제도 같이 한 잔 했지. 그리고 자네 이야기도 들었고.”
“네?!”
아니 이 노인네가 도대체 누구한테 무슨 말을 한 거야?!
설마 왕녀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니겠지?
“아니, 뭐, 무슨 말을 들으셨길래...”
“칭찬을 많이 하더군. 내부 사정으로 내보내기는 했지만 아까운 사람이라고. 내부 사정이 뭔지는 말 안했지만 딱히 자네 잘못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말도 했지.”
“아, 그런가요?”
휴, 다행히 왕녀에 대해서 이야기 할 정도로 취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어제 헤어진 세 놈만 해도 불안해 죽겠는데 노인네까지 아주... 사람을 말려 죽일 셈인가?
자신을 테일러라고 소개한 남자가 타는 배는 플로디엄급 상선 이클로나. 만재 배수량이 무려 700톤에 이르는 대형 상선이라고 했다.
선적(선박이 소속된 국가)이 조금 특이했는데, 바로 대륙 최강국인 몰로스 제국이었다.
최강국의 선박이 왜 특이하냐면, 몰로스 제국은 해군이나 해상 무역에 관해서는 영 별 볼일 없기 때문이다.
애초에 제국이 성장하게 된 발판이 풍요롭고 넓은 국토에서나 뿜어져 나오는 상품들과 육상 무역, 그리고 이를 지키기 위한 강력한 육군 전력이었기 때문에 해상에서 취약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다른 나라들은 제국을 견제하기 위해서 해상 전력 강화에 최선을 다하면서도 서로 은근슬쩍 연합하여 제국의 해상 진출을 막아왔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제국이 아무리 노력을 하고 있다고 해도 제국 국적의 선박은 아직 흔하지 않은 편이다.
적당히 배를 자랑한 테일러는 친구들과 상의할 시간을 달라는 내 말에 선선히 자리를 비켜주었다.
출항일은 사흘 후니까 천천히 생각해보고 탈 생각이 있다면 출항 전날까지 배로 와 달라는 남기기는 했지만 전혀 미련이 없는 태도였다.
그런데 테일러라는 남자,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선원이라고 보기에는 이상하다.
뭐랄까? 딱 꼬집어서 뭔가를 지적하기는 그런데, 마치 안맞는 옷을 억지로 입고 있는 느낌이다.
하지만 이제 나와 세트로 묶여버린 두 바보는 전혀 이상함을 못 느끼는 모양이다.
“리안, 어떡할 거야?”
“나는 괜찮은 것 같은데? 솔직히 그 남자가 말한대로면 진짜 큰 배잖아?”
“그래, 대우도 괜찮은 것 같고! 갑판장님이랑도 아는 사이라잖아?”
완전히 홀랑 넘어갔다.
하지만 테일러가 갑판장을 언급했을 때 깜짝 놀란 부분도 있고 해서 영 찝찝하기만 했다.
“아직 이틀이나 여유가 있으니까 다른 배도 좀 알아보자.”
“꼭 그래야 할까?”
“응... 더 좋은 배는 없을 것 같은데?”
“아니면 배 말고 상단 호위 같은걸 한 번 해보는 것은 어때?”
아무래도 불안한 마음에 슬쩍 다른 일을 해보자고 던져보자 격한 반응이 돌아왔다.
“아, 리안! 그건 좀 그래. 난 걷는게 너무 싫다구.”
“상단 호위면 용병이잖아? 용병 같은 더럽고 위험한 일은 하기 싫어.”
그래... 뱃놈이 배를 타야지, 땅 위를 걷고 싶겠니?
그런데 용병이나 선원이나 거기서 거기 아니냐?
용병들은 뱃일이 더럽고 위험해서 절대 못한다고 할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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