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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22화 (22/420)

<22화> 위기에서 적성을 찾는것이 정석(4)

“저, 생각할 시간을 주실 수 있습니까?”

솔직히 말을 꺼내면서도 갑자기 ‘비밀을 알고 있으니 살려둘 수 없다!’라면서 죽이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의외로 테일러는 피식 웃으면서 선선히 대답했다.

“짐작을 한 것이랑 진실을 아는 것은 다르지. 천천히 생각해 보게. 하지만 너무 늦지 않았으면 좋겠군. 다음 항구에 입항하기 전에 알려 주었으면 하네.”

“혹시 거절하면... 죽습니까?”

“하핫, 설마 입항하기 전에 알려달라는 말 때문인가? 걱정 말게. 자네가 들은 내용이 조금 민감하기는 하지만... 사람을 죽일 정도까지는 아니니까.”

“하지만 제가 오늘 안 사실을 퍼트린다면 꽤나 난감하실 텐데요.”

내가 쉽게 넘어가지 않고 지적하자, 테일러는 여유 있게 웃음을 진하게 하며 대답했다.

“역시 생각이 빨라서 좋군. 거절한다고 해도 죽이지는 않을 걸세. 하지만 우리가 본국에 복귀할 때 까지는 우리와 함께 해줘야겠지.”

“어...혹시 감금 당하나요?”

“뭐? 감금? 하하핫, 그냥 죽여 버리고 말지 왜 그렇게 위험하고 귀찮은 일을 자초하겠나? 그저 지금처럼 함께 해주길 바란다는 뜻일세.”

“네... 부선장님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제안해주신 것은 조금 더 생각해 보고 말씀 드리죠.”

수많은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해진 나는 부선장실을 나오자마자 우르타와 네이선을 찾았다.

솔직히 두 녀석과 논의를 해봐야 대부분 내 의견대로 진행이 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정도 중대사면 두 녀석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우르타와 네이선에게 정이 많이 든 모양이다.

언제부터인가 셋이 함께 행동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졌고, 전투에서 가장 걱정되는 것은 두 사람이 다치거나 죽는 것이었다.

머리에서는 이전에 스쳐간 선원들처럼 헤어지면 그만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가슴은 어느새 닭살 돋는 그 단어, ‘동료’라고 말하고 있었다.

* * * * *

어둠이 내린 이클로나 호의 선미 갑판에 세 남자의 두런거리는 목소리가 흩어졌다.

“그럼 굳이 제안대로 하지 않아도 상관 없는거지?”

“뭐... 그렇다고는 하지만...”

우르타의 맹한 질문에 미적거리며 대답을 하기는 했지만 나도 영 확신하기는 힘들었다.

솔직히 거절할 때는 ‘허허허’하고 웃다가 지금 같은 한밤중에 부하들을 시켜서 칼침 한번씩 놓은 다음에 바다에 빠뜨리면 어쩔 거야?

“어... 리안, 그런데 우리도 포함이야? 그냥 너한테만 이야기 한 것 같은데?”

조용히 듣고만 있던 네이선이 제법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테일러라면 우리 셋의 관계를 충분히 알고 있을 테고, 내가 생각한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 순간부터 내용이 공유될 것이라는 것 정도는 예측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미 우리는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한 세트로 묶여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해병대장에게 인정받은 네이선은 말할 것도 없고, 우르타도 선원으로서 한 사람 몫을 하기에 충분하니까 경험 있는 선원이 부족한 테일러 입장에서는 함께 하겠다고 한다면 거절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도 있었다.

“너는 물론이고 우르타도 뛰어난 선원이니까. 안그래도 사람이 모자란 부선장 입장에서는 거절할 리가 없잖아?”

“그런건가?”

“확실하니까 그런 걱정은 하지 마.”

대충 상황 정리를 끝내고 들어가자고 하려는데 어울리지 않게 쭈뼛거리는 목소리로 우르타가 질문을 했다.

“그, 그런데 리안... 저기 있잖아...”

“뭔데?”

“정말 나, 나도 괜찮을까?”

“내가 괜찮다고 했...”

“아니! 나는... 일레드 왕국 출신인걸!”

“아...!”

그랬다. 우르타는 일레드 왕국 출신이었다.

상선이라는 것이 딱히 국적을 따져가면서 선원을 모으는 것도 아니고, 국적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없어서 잊고 있었지만 말이다.

전생만큼 국가에 대한 소속감이 높지는 않았지만, 이 세상에도 국가라는 기본적인 소속감은 있다.

계급이 낮아질수록 그 소속감의 많은 부분이 부정적인 감정으로 점철되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같은 나라 사람에게 눈길이라도 한 번 더 보내게 되는 것이 사람이게 마련.

그러니 대놓고 일레드 왕국과 적대하겠다는 테일러의 속마음을 알게 된 이상 불편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 맞아. 너 일레드 출신이었지?”

“으응, 아무래도 나는 힘들겠지?”

“우르타의 마음이 불편하다면 빠져도 괜찮아. 억지로 우리와 함께 한다고 일레드를 적대할 필요는 없어.”

“어? 그게 무슨 말이야?”

침울해져가던 우르타의 목소리가 의문으로 바뀌었다.

“아니, 너 일레드 왕국에 피해를 주는게 싫은거 아니야?”

“무슨 소리야, 리안? 일레드 따위 어떻게 되건 무슨 상관이야? 단지 그, 부선장님이 싫어할까봐...”

아, 내가 착각했구나.

하긴 그렇지. 모국이라고 해봐야 받은 것이 하나도 없는데 무슨 애착이 생기겠는가?

같은 국적 사람이라면 넓은 의미로 동향 사람이라는 동질감이라도 가질 수 있겠지만, 국가 그 자체에는 전혀 의미를 두지 않는 것이다.

물론 테일러 같은 상류층 사람들은 예외다.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해주는 권력 기관이 바로 국가니까.

“아, 그쪽이라면 전혀 신경 쓸 필요 없어. 어차피 테일러, 아니 부선장님은 우리의 출신 따위는 별 관심 없을 테니까.”

“그, 그럴까?”

“선원 뽑는데 국적 가리는거 봤어?”

“그래도... 해군인거잖아, 그냥 선원이 아니라.”

그래서 테일러는 더 신경을 안쓸거다.

언젠가는 제국 사람들만으로 해군을 구성하더라도, 초반에는 경력직을 채용하기 위해 오히려 타국인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테니까.

그리고 그 상대가 잠재적 적국의 사람이라도, 모국에 대한 충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평민이라면 두 팔을 벌려 환영해 줄 것이다.

“좋아, 그럼 결정이다! 이런 쥐꼬리만한 상선 말고! 우리도 군함 한 번 타보자!”

“어...리안, 솔직히 이클로나가 작은 건 아닌데...”

말이 그렇다는 거지, 감동 깨기는...

어차피 이렇게 되면 내친김이다.

박박 기어서라도 한 번 올라가 보자.

이렇게 상선이나 전전하면서 하층민으로 살다가 객사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군인이 낫잖아?

* * * * *

오래 끌 것도 없이 다음 날 틈을 보다가 조용히 부선장실의 문을 두들겼다.

“들어오게.”

“들어가겠습니다, 부선장님.”

주변을 둘러보고 이쪽을 주시하는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조용히 부선장실에 들어가자, 어제와 달리 깔끔하게 정리된 부선장실이 눈에 들어왔다.

필요한 것만 올라가있는 테이블에 무엇인가를 쓰고 있던 테일러는 내 얼굴을 확인하고는 빙긋 웃으며 쓰고 있던 펜과 노트를 정리했다.

“좋은 소식을 들고 온 표정이군. 환영하네.”

뭐야, 내 표정이 그렇게 읽기 쉬운 거야?

이건 뭐, 내용을 말하기가 민망할 지경이잖아.

“아... 네, 그,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좋아! 잘해보자고. 당연히 다른 두 친구도 함께 하는 거겠지?”

“네... 어떻게 아신...?”

“안그래도 해병대장과 포병대장이 오전에 포섭할 사람들을 보고했지. 놀랍게도 다른 두 친구들도 명단에 있더군. 특히 네이선? 그 친구는 해병대장이 꼭 잡아야 한다고 열변을 토하던데?”

“그, 그렇군요?”

네이선이야 이미 충분히 예상한 부분이다.

해병대와 함께 해적선으로 돌격하는 결사대를 맡았는데 모르면 멍청이지.

그런데 우르타가 덥고, 답답하고, 어두컴컴한 포갑판에 있는 대포 예찬을 할 때도 이상했지만, 포병대장이 우르타를 찍어서 포섭 명단에 올렸다니 더 이상하다.

애초에 우르타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냥 견시수처럼 목표 확인과 착탄 확인 정도만 한 것 같은데, 그게 포섭할 이유가 되는 거야?

두 번의 생을 거치면서 포병을 경험하기는커녕 진짜 대포를 제대로 본적도 없으니 알 수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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