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여자는 이유없이 다가오지 않는다(1)
전생에서도 그랬지만, 그보다 더 사람이 쉽게 죽어나가는 이 세상에서는 많이 아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길이다.
대부분은 눈앞의 작은 이익 때문에 이런 사실을 간과하지만(그래서 잘 죽는다) 그나마 나는 그런 위험들을 잘 피해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얼마 전 왕녀 사건을 겪으며 약간 생각의 변화가 생겼다.
경직된 신분사회에서 정상적인 노력만으로 자수성가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머리로는 이미 알고 있었다.
단지 그것을 인정하고 위험을 무릅쓸 각오가 부족했을 뿐이다.
본의는 아니었지만 이왕 나름 국제적인 수준의 비밀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으니 내친김에 정보를 최대한 모아야겠다.
아는 것은 때로는 목숨을 위협하는 독이지만, 이미 호랑이 등에 올라 탄 이상 최대한 많은 정보가 내 구명줄이 될 수도 있으니까.
“우르타는 천성적으로 막힌 곳을 싫어합니다. 포갑판에서 활동하는 것은 조금...”
내가 조심스럽게 반대의견을 표하자, 약간 떨떠름한 표정을 짓던 테일러가 작은 신음성과 함께 대답했다.
“흠, 글쎄... 그건 우르타라는 그 친구의 의견을 들어봐야겠지.”
“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보다 궁금한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내게 시간이 많이 없지만, 간단한 의문 정도는 풀어주지. 어차피 자네 직위도 생각을 좀 해봐야 하니 말이야...”
엥? 그냥 선원... 뭐, 최대한 좋게 말해도 부선장의 심복 선원(?) 정도가 내 위치 아닌가?
애초에 이 배에서 줄만한 직책이 남은 것도 아니다.
굳이 한다면 2등이나 3등 항해사를 줄 수는 있겠지만, 항해술을 어깨너머로 조금 익힌 수준으로 항해사를 맡는 것은 무리다.
항해사를 맡으려면 적어도 항해학 교육기관에서 교육을 받거나 항해술을 제대로 익혀야 했다.
대부분 몸으로 때우다 보면 기술이 늘어나는 다른 뱃일과 달리 해도를 보는법, 해도 작성법, 풍향과 조류, 각 선박의 특성, 해역의 구분 등, 소위 조함술 또는 항해술에 관한 것은 몸으로 때울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기술이라기보다는 지식 쪽에 가까운 항목이 많다보니 어깨너머로 배우기도 힘들다.
게다가 해도 자체는 배의 기밀에 속하고, 조함은 배의 운명과 직결되니까 선원일을 오래 하더라도 그런 쪽으로는 접점 자체가 그리 많지 않다.
“제가 이 배에서 따로 받을 직책이 있겠습니까? 전 항해술이나 조함술 같은 것은 잘 모릅니다.”
“그 부분은 내가 고민 할 부분이지. 그보다 질문이 뭔가?”
“아, 혹시 해적과의 전투에서 정면대결을 감행하시려고 했던 이유가 그... 특수 포탄입니까?”
턱을 괴고 잠시 침묵을 지키던 테일러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 어차피 함께 하기로 한 사이니, 이 정도는 알아도 되겠지... 자네의 말이 맞네. 본국에서 비밀리에 연구해 온 마력포탄일세. 보다시피 위력은 꽤 괜찮지. 해적들은 피해가 커질 것 같으면 바로 도망가는 자들이니, 네 척 정도는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았네.”
“혹시 그 포탄에 대해서 조금 더 설명을 들을 수 있을까요?”
“으음... 이 부분은 친구들에게도 함구했으면 하는 부분이지만...”
테일러와 면담을 마치고 부선장실을 나서며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흘렀다.
먼저 마력포탄에 대한 부분.
위력이 애매한 것은 둘째 치고, 가격을 들으면서 기겁할 수밖에 없었는데 무려 포탄 한 발의 가격이 10만 로스를 호가했다.
원래 포탄이라는 것이 그리 싼 전투물자는 아니지만, 최악의 명중률을 자랑하는 함포탄으로 10만 로스는 너무 과한 가격이었다.
아무리 시제품이라고 해도 애초에 가격이 이 정도면 상용화는 힘든 수준이다.
더 나쁜 것은 단 한번 사격으로 청동제 대포 4문중 한 대에서 균열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마지막 포격을 끝내고 더 이상 쏘지 않은게 아니라 못 쏜 것이다.
막말로 나머지 세 문에 눈에 보이는 균열이 없다고 해서 다음에 터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지 않은가?
두 번째는, 고심하던 테일러가 내 직책을 결정했다.
항구에 입항해서 나포한 선박을 처분하고 부족해진 선원을 보충하는 등 재정비를 마치면 발표되겠지만, 나는 보좌관이 된다.
보좌관이 새롭다거나 드문 직업은 아니다.
군대에서 사령관에게 붙는 참모들을 보좌관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왕궁의 대신이나 고위 귀족들에게도 보좌관이 붙는다.
심지어 큰 상단에도 상단주 아래에서 실무를 돕는 사람들을 보좌관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배에 보좌관이 있다는 소리는 처음 듣는다.
원래 없던 자리이니 하는 일도 애매하다.
항해 계획 전반에 걸쳐 선장과 부선장에게 보조하는 일이란다.
갑판장이나 항해사처럼 선원에 대한 직접 명령권을 가지는 자리도 아니고, 포병대장이나 해병대장처럼 직속 부하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이래저래 애매한 직책인 것이다.
솔직히 도대체 뭘 해야 하는 것인지 전혀 감도 안잡힌다.
* * * * *
이틀을 더 내달린 이클로나는 델라 항구에 무사히 입항했다.
누가 봐도 전투의 흔적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갤리선을 당당하게 끌고 입항하는 이클로나 덕분에 항구에 잠시 소란이 일기는 했지만, 큰 문제없이 입항을 마친 우리는 재정비에 들어갔다.
나름 전투를 겪은 만큼 전문적인 정비가 필요했기 때문에 약 열흘정도 이곳에 머물 예정이라고 했다.
열흘이나 머문다는 이야기를 듣자 왜 테일러가 그 타이밍에 나에게 영입제안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나를 주시하던 테일러는 내가 이클로나에 어느 정도 의심을 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눈치 채고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어쩔 수 없이 마력포탄을 사용하면 그 의심이 더 짙어질 테고, 장기 정박을 하게 되면 도주 위험이 높다고 봤겠지.
왠지 조금 씁쓸해졌지만 어차피 나도 위험을 동반하기는 해도 도약의 기회를 얻었고, 테일러도 좋은 선원(?)을 얻었으니 이만하면 윈-윈이다.
배가 정박해 있는 부두는 어둠이 깔리면 적막이 내려앉지만, 항구의 유흥가는 밤이 되면 불타오르기 시작한다.
오늘 입항한 배의 선원들은 배 위에서 마시던 반쯤 맛이 간 맥주나 싸구려 럼주에 분노를 토하며 선술집의 술을 바닥 낼 기세로 술을 마셔댄다.
며칠 전에 입항해서 술에 대한 갈증을 적당히 풀어낸 짐승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도박을 하거나, 여기저기에 교태를 흘리고 다니는 창녀들에게 같잖은 작업질을 한다.
내일 출항하는 배에 타야하는 녀석들은 다시 미친 듯이 술을 마시거나, 도박을 하거나, 며칠 동안 익숙해진 여체를 한 번 더 탐하려고 최선을 다한다.
물론 내일 떠나버릴, 이미 다 털어먹은 빈털터리 선원에게 여자들이 관심을 줄 리가 없지.
그녀들의 관심은 더 오래있을, 정확하게 말하면 돈이 아직 많은 뉴 페이스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 그게 문제다.
심지어 어느새 소문이 다 퍼졌는지, 우리 배에서 내린 사람들을 상대로 포상금(갤리선 매각금, 아직 매각 전이지만 선장님이 선지급했다)을 노리는 녀석들이 한둘이 아니다.
나는 비틀거리다가 넘어지면서 은근슬쩍 내 허리에 손을 갖다 대는 녀석의 손목을 잡아 무자비하게 꺾어버렸다.
“으아아아악!”
“다음에는 칼이다, 명심해.”
내가 팔을 놓자마자 자세를 잡으며 뒤로 물러나는 발걸음을 보니 역시나 취하기는 개뿔, 멀쩡하기 그지없다.
이를 악물고 오른쪽 손목을 부여잡고 있는데, 눈에서 불길이 나올 것 같다.
아... 그냥 부러뜨릴걸 그랬나?
“너 이 새끼! 지금 내 친구를!!”
“네놈! 양쪽 손목을 꺾어주마!”
아니나 다를까? 기다렸다는 듯이 두 테이블 떨어진 쪽의 남자 네 명이 벌떡 일어서며 각종 쌍욕을 퍼부었다.
한숨이 나온다.
오늘만 벌써 세 번째다.
우르타의 왼쪽 눈덩이가 시퍼렇게 부어오른 것도 그 탓이다.
오늘 술 마시기는 다 틀린 것 같다.
곧 난장판이 벌어졌다.
힐끔 보니 한 쪽 구석에서 한숨을 내쉬는 주인장이 보였지만, 표정은 이미 체념한 표정이다.
다행히 싸움은 5분 만에 막이 내렸지만, 가게에 피를 흘리는 남자 열댓명을 남겼다.
시작은 3:5, 8명의 싸움이었으니 나름 목표 초과달성이라고 할만하다.
싸움이 일상인 선원용 선술집이니만큼, 집기가 부서진 경우는 거의 없었다.
나무접시와 나무숟가락 몇 개가 부서지고 술과 음식이 바닥에 쏟아졌지만, 그 정도야 뭐...
어찌되었건 술맛도 떨어지고 더 이상 뭘 먹을 분위기도 아니라서 주인장에게 잡히는 은화 하나를 던져주고 재빨리 밖으로 나왔다.
술과 음식을 제대로 먹지 않았으니 은화 정도면 충분한 보상이 될거다.
입맛이 뚝 떨어졌지만 숙박이라도 해야 했기 때문에 다른 선술집 겸 여관을 찾아 설렁설렁 걸어가는데 뒤에서 자꾸 거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발소리. 우리가 선술집을 나올때부터 우리 뒤를 따르고 있었다.
나는 가던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누구야? 누군데 자꾸 따라오는거야?”
너무 무방비한 것 아니냐고?
상대가 숨어서 따라오는 것도 아니고, 여러 명이기는 하지만 발소리가 여자다.
여자와 아이, 노인을 조심해야하는 어떤 세상과 달리, 이 세상의 여자는 위협수준이 매우 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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