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25화 (25/420)

<25화> 여자는 이유없이 다가오지 않는다(3)

당장 여자들을 잡으러 가겠다는 우르타를 겨우 진정시키고 나니, 분위기가 매우 뻘쭘해졌다.

크리드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계속 낄낄거렸고, 우르타와 네이선은 황당함과 분노, 미안함에 어쩔 줄을 몰랐으며, 나는 창피함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어우, 그래서 내가 조심하랬잖아...”

“미안해, 리안...”

“그래서 얼마나 들었었어?”

“한 8,000로스 정도...”

나와 네이선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은 돈이기는 한데 당장 우르타가 돈이 없으니 최소한 오늘은 우리가 돈을 대줘야 할 판이다.

은행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기는 했지만, 네이선에 비해 우르타는 아직도 은행에 가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3~4일정도 쓸 돈만 남기고 다 예금한 우리와 달리 우르타는 열흘 동안 쓸 돈을 계산하고 훨씬 많은 돈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평소라면 돈을 빌려주고 내일 은행에 가서 갚으라고 하겠지만 돈을 잃어버린 녀석에게 그렇게 냉정하게 말하기도 민망하니, 오늘은 쓸데없는 돈이 나가게 생겼다.

“대충 진정 된건가? 그럼 다들 한잔 하자고! 자네들 꽤 친한 것 같은데?”

분위기를 바꾸려고 크리드가 손뼉을 치며 술잔을 집어 들자, 우리도 반사적으로 술잔을 잡았다.

* * * * *

살기어린 강렬한 첫인상과 다르게 크리드는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여러 배를 탄 모양인지 신기하고 재밌는 사건도 많이 알고 있었고, 무엇보다 말을 매우 잘했다.

의외로 말을 잘하는 사람을 찾기는 쉽지 않다.

청자의 호기심과 관심을 적절하게 자극하고 반응을 이끌어내며 무의식적으로 대화에 참여하게 만드는 기술은, 그 사람의 지식, 경험, 성격 등이 반영된 고급 스킬이다.

물론 타고나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쉽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나는 계속해서 위화감이 들었다.

분명히 크리드는 뱃사람이다.

무심결에 나오는 동작, 말투, 쓰는 어휘까지 의심할만한 구석이 전혀 없다.

그런데 말을 너무 잘한다.

마치 이야기꾼, 음유시인 아니, 전생의 토크쇼 진행자가 아닌가 싶을 정도다.

“호오, 그러니까 그 포탄이 그렇게 강력하다고?!”

“진짜! 크리드는 못봐서 그래! 막 화염이 뻐엉! 하고 터지는데 우리도 깜짝 놀랐다니까?”

“이야, 진짜라면 그 해적놈들 표정이 볼만 했겠는데?!”

“그러니까 말이야, 너무 멀어서 표정까지는 잘 안보이더라고.”

잠깐 딴 생각을 하는 사이에 대화의 주도권이 우르타에게 넘어갔나보다.

우르타는 우리가 겪은 최근의 전투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었다.

그 전투의 백미는 아무래도 마력포탄... 어라?!

나는 긴장감을 다시 끌어올리며 눈치채지 못하게 크리드를 다시 살펴 보았다.

그동안 함께 마신 술이 상당한 양인데도 눈빛이 맑다.

몸의 움직임, 말투는 적당히 취한 것처럼 불안정한데 눈빛만 따로 떼놓고 보니 취했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나는 실수인 척 테이블 가장자리에 있던 맥주잔을 팔꿈치로 슬쩍 밀었다.

텅, 텅, 데구르르르...

반쯤 남아있던 맥주가 바닥에 쏟아지고 나무로 만든 맥주잔이 바닥을 굴렀다.

“아, 거 참, 리안 취했어? 술 아깝잖아?”

한참 신이 나서 포탄에 대해 떠들던 우르타가 인상을 찡그리며 타박했다.

아니, 저 자식은 돈도 없어서 우리한테 빌붙어야 할 녀석이 뭐 저리 당당하지?

“뭐야? 돈도 잃어버린 녀석이 누구한테 뭐라고 하는거야?”

“에잇! 치사하게 지나간 이야기 할거야?!”

“아, 시끄럽고 오늘은 대충 정리하자.”

“어? 리안, 그러지 말고 조금만...”

우리를 보며 낄낄거리던 네이선이 당황하며 남은 맥주잔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크리드도 건들거리며 한마디 거든다.

“그래, 그래, 이렇게 만났는데 벌써 끝내기는 아쉽잖아?! 조금만 더 마시자구!”

“크리드 미안해. 아무래도 좀 불안해서 말이지.”

“엥? 뭐가?”

나는 불만으로 가득차서 입을 삐쭉거리는 우르타와 네이선을 한 번 씩 본 후에 말을 이었다.

“어휴, 이 멍청이들아. 그 여자들이 가져간 돈 주머니에서 8,000로스가 넘는 돈이 나왔어. 하지만 우리가 받은 포상금에 비하면 작은 돈이지. 그럼 어떻게 생각할까?”

“어... 돈을 다 썼나보다?”

“은행에 맡겼다고 말했잖아? 은행에 맡긴 줄 알겠지.”

“으이구, 은행 따위 믿기나 하겠어? 보통 ‘아, 다른 놈 주머니에 돈이 다 들어있나보다’라고 생각하겠지.”

“어... 그, 그런가?”

“그럼 그놈, 아니 년들이 오늘밤에 할 행동은 뭐겠냐?”

내가 그럴듯한 가설을 내놓자 우르타와 네이선이 혼란에 빠진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크리드는 갑자기 내 어깨를 툭툭 치면서 껄껄 웃었다.

“크하하하하, 정말 재밌어 리안! 그런데 설마 그 정도까지 하겠어? 아무리 우리가 뜨내기 뱃놈들이지만 자고 있는데 습격하거나 할 정도로 멍청한 놈들은 별로 없다고.”

그래, 분하지만 크리드의 말이 맞다.

우르타의 주머니가 털린것이야 뭐, ‘재수가 없었네’ 정도로 하고 넘어갈 수 있다.

그러나 숙박을 하는 곳에 침입을 해서 재물을 강탈하거나 한다면, 그 때는 동네 범죄조직도 고달파진다.

무방비 상태의 대상을 상태로 이루어지는 범죄를 어영부영 넘어가면, 말 그대로 약해보이면, 어느 순간 목숨도 왔다갔다하게 된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으니까.

우리뿐만 아니고 우리 배의 대부분의 선원이 나서는 것은 당연하고, 하룻밤 술친구 정도의 얕은 인연을 가진 다른 배 선원들도 신나서 합류할거다.

정당하게 폭력를 행사할 이유가 만들어졌는데 가만히 있을 선원 따위는 없다.

하지만 어리석은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으니 그런 일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뭐, 나도 그 정도로 일이 커질 것 같지는 않지만 우리가 만취라도 하게 되면 그들도 욕심이 생기지 않을까?”

크리드는 할 말이 궁한지 입을 다물었고, 우르타와 네이선은 눈빛을 주고받더니 처연한 표정으로 네이선이 말했다.

“그럼 이것까지는 마셔도 되지?”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저 크리드라는 놈과 이야기 하는 것을 막고 싶지만 의심한다는 티를 낼 수도 없다.

그리고 내 술은 떨어졌으니까 난 새로 한 잔만 시켜야겠다.

* * * * *

전날 마신 술이 많지 않아서 제법 일찍 일어난 우리 일행은 내 재촉에 못 이겨 아침 식사를 대충 때운 뒤 한참 수리 중인 이클로나 호를 향했다.

“이쪽은 부두 방향인데? 은행에 가는 것 아니야?”

“잠깐 할 일이 좀 있어. 혹시 너희들 부선장님 어디로 간다는 이야기 들었어?”

“아니, 부선장님 행선지를 우리가 어떻게 알아...?”

하긴, 부선장이 너희에게 행선지를 보고할 의무는 없지...

수리 중인 배에 부선장이 있을 확률은 낮았지만, 그래도 가보면 아는 사람이 한 놈은 있을 것이다.

실질적으로 배를 총괄하는 것은 테일러니까, 수리 중에 문제가 생기면 연락할 곳이라도 알려 주지 않았겠어?

다행히 한창 수리 중인 이클로나 호의 갑판에는 테일러가 있었다.

조선소 담당자와 배를 돌아다니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뭔가 개조를 하려는지 파손되지 않은 부분도 손으로 가리키며 뭐라고 하고 있었다.

정말 다재다능한 사람인 것 같다.

아무리 배에 익숙한 사람이라도 조선공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직접 할 수 있을 정도로 선박 구조에 익숙한 뱃사람은 흔치 않으니까 말이다.

그의 일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 잠시 부두에서 대기하던 우리는 조선공과 대화를 마무리하고 부선장실로 돌아가는 테일러를 불러 세웠다.

시간이 흐를수록 우르타와 네이선의 얼굴에 불만이 차올랐지만, 사태의 심각성이 높은 만큼 전혀 고려대상이 되지 못했다.

“부선장님, 잠깐 시간 괜찮으십니까?”

“응? 자네가 왜...? 중요한 일인가?”

“중요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부선장님이 아셔야 할 일입니다.”

“흠, 그럼 내 방으로 가지. 뒤에 두 사람도 같이 가야하나?”

“네, 같이 있었으니까요.”

갑작스러운 우리의 출현에 의문을 표하면서도 테일러는 침착하게 우리를 부선장실로 안내했다.

배 위의 개인실이라고 생각하면 상당히 괜찮은 편이지만, 성인 남성 네 명이 들어가기에는 약간 비좁은 부선장실에 들어와서 나는 어제 있었던 일을 가감 없이 털어놓았다.

이런 일은 괜히 내 입장을 변호한다고 어설픈 거짓말을 했다가는 역효과만 나는 법이지.

“...그러니까 소문이 벌써 퍼졌고, 우리의 전투 상황을 캐내려는 것 같았다?”

“결론적으로 그렇습니다. 뒷부분은 그저 제 추측입니다만...”

“그런가... 좋지 않군.”

심각하게 내 말을 경청한 테일러는 의외로 담담한 반응을 보여주었다.

아마 테일러도 어느 정도는 예상하지 않았을까 하는 내 추측이 들어맞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상황을 모르고 눈치를 보고 있던 우르타가 눈을 질끈 감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부선장님... 그게 기밀인지 몰랐어요...”

“괜찮네. 자네가 아니더라도 다른 선원들을 통해 정보는 들어갔을거야.”

비밀리에 연구중인 포탄을 공공연하게 사용하는 순간부터 어차피 기밀 유지는 포기했다고 보는게 맞다.

그래서 우르타가 별 처벌 없이 잘 넘어갈 것이라고 예상한 것이고.

하지만 의도적으로 우리에게 접근해서 전투상황을 캐내려는 자가 있다면, 상황의 예측 유무에 상관없이 최소한 부선장은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굳이 이 자리를 만든 것이었다.

“확실히 처음부터 수상하기는 했지... 리안, 우리 이클로나 정도의 선박이 내해에서 습격당하는 일이 잦을까?”

“흔한 일은 아닙니다. 가성비가 안나오니까요. 특히나 이번처럼 네 척의 해적선이 기다렸다는 듯이 포위(비어있는 곳은 역풍방향이니 막힌 곳과 같다)하듯이 달려드는 경우는, 향료 제도 쪽의 거대 해적들이나 쓰는 방법이라고 들었습니다.”

일단 해적들도 먹잇감에 대한 정보를 어느 정도 확보하고 일을 벌이는 만큼, 이클로나가 엄청나게 큰 선박은 아니지만 대포와 해병대가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엄청나게 가치가 높고 처분하기 편한 화물을 싣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습격하려면 대포에 해병대까지 상대해야하는 상선이라니, 해적 입장에서는 가성비가 너무 안나온다.

그래서 네 척이나 달려든 모양이지만, 애초에 네 척이나 되는 선단이 되어버리면 해군에게 포착되기도 쉬운 만큼 보통 내해 해적의 행태라고 보기에는 이상한 점이 있었다.

“...아무래도 일정을 조금 당겨야겠군. 아, 포탄에 대한 것은 적당히 아는 만큼 이야기해도 상관없네. 리안, 자네는 따로 말하지 않아도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은 구분하겠지?”

“물론입니다. 부선장님.”

“좋아, 정보 고맙네. 역시 내가 사람은 잘 본 모양이군. 뒷일은 내가 수습할테니 자네들은 이만 휴식을 즐기도록 하게. 열흘이라지만 쉬다보면 금방 갈 것 아닌가?”

그렇지... 원래 일하는 시간보다는 쉬는 시간이 더 빨리 흐르는 법이다.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