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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26화 (26/420)

<26화> 남자의 질투도 무섭다

우리는 보고를 마치고 며칠 동안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크리드를 찾았지만, 땅으로 꺼졌는지 하늘로 솟았는지 그는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심지어 그를 아는 사람조차 거의 없었는데, 같이 배를 탄 적이 있다는 사람은커녕 어젯밤의 사건을 기억하는 이들 조차 이름, 소속 선박 등을 전혀 몰랐다.

그나마 네이선이 크리드가 탔다는 배의 이름을 기억해서 그 배에 대해서도 알아봤지만, 입항한 적도 없는 선박이라는 대답만 들었을 뿐이었다.

그 대답을 받아 내느라고 항구관리소 직원에 뿌린 뇌물이 너무 아깝다...

“사람이 이렇게 행적이 없을 수도 있나?”

“그러게. 정말 특이할 정도잖아?

“언제 왔는지, 어디서 잤는지 조차 모르다니...”

“뒷골목에 의뢰하면 알 수 있을까?”

“흠... 그 정도 가치는 없을 것 같아.”

어쩌면 뒷골목의 정보상이라면 어느 정도 정체를 밝힐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고작 본명이 맞기나 한 건지 의심스러운 크리드라는 이름과 입항한 적도 없는 배 이름, 어젯밤 사건 정도만 가지고 사람을 찾으려면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의뢰비가 필요할거다.

그리고 이정도 되면 크리드라는 남자의 정체가 대충 예상이 된다.

보나마나 어딘가의 첩보원 같은 것이겠지.

어제 밤의 자연스럽게 정보를 빼내는 행동, 완벽할 정도로 자신의 흔적을 은폐한 사후 처리까지, 따로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사람이 아니고서야 설명할 방법이 없다.

“우리는 할 만큼 한 것 같다. 그냥 좀 쉬자. 머리를 너무 굴려서 피곤해.”

“어! 저쪽에 있던 선술집 맥주가 진짜 맛있대! 가보자!”

기다렸다는 듯이 네이선이 우르타에게 은근한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

우르타는 오늘 은행에서 돈을 찾아왔다.

* * * * *

- 이클로나 호 선장실 -

선장실에는 선장인 에스페른과 부선장 테일러가 마주앉아 차를 홀짝이고 있었다.

대륙 남부 일부와 향료 제도에서만 재배되는 특이한 향의 나뭇잎을 특별한 처리를 한 뒤 고온의 물에 우려내서 마시는 이 음료는, 상당한 고가를 자랑했지만 귀족들과 돈 좀 만지는 평민들에게 필수 기호품이 되어가고 있었다.

차가 절반쯤 줄어들 때까지 테일러의 보고를 조용히 듣고만 있던 에스페른이 나지막하게 물었다.

“보고는 잘 들었네. 그래서 자네 생각은 어떤가?”

“아무래도 일정을 조금 앞당기는 것이 좋겠습니다. 다행히 준비가 일찍 끝났다고 하니 큰 무리는 없을겁니다.”

잠시 고민하던 에스페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지. 그럼 다음 목적지는 어디로 잡는 것이 좋겠나?”

“바흐카덴이 좋을 것 같습니다. 서신을 보내는 시간과 이동시간을 고려하면 그 정도가 적당합니다.”

“바흐카덴이라... 하긴, 이번 사태로 볼 때 벨로키나 왕국 쪽은 아무래도 위험하겠지. 쿠샤 왕국은 그나마 우리에게 덜 적대적이니 좋은 선택이군.”

“교역 수익은 조금 손실을 보겠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니까요.”

“회계사에게 적당히 상품을 정리하라고 하지.”

“그리고...”

잠시 침묵을 지키던 테일러가 주저하며 말했다.

“저, 아무래도 위험하니 이쯤에서 각하께서는 돌아가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다행히 이곳 델라라면 육로로 이동해도 본국까지 얼마 걸리지 않을 겁니다.”

“흠,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직접 향료 제도에 한 번 다녀오는 것이 좋을 것 같네만...”

“안됩니다! 생환을 장담할 수 없는 여정입니다. 본국의 해군을 창설하셔야 할 각하께서 함께하는 것은 너무 위험합니다!”

“그렇게 말하면 자네도 마찬가지네. 내가 해군대신이 된다 한들, 자네가 없다면 도대체 함대 사령관을 누구를 임명하겠나?”

에스페른의 말이 끝나자, 테일러가 품에 손을 넣었다가 천천히 뺐다.

그의 손에 들려있는 것은 작은 노트였다.

“이클로나를 지휘하면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과 항해일지의 중요 내용입니다. 제가 설혹 귀환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 것만 재능있는 자에게 전해진다면, 저보다 더 나은 제독을 얻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제국과 폐하를 향한 자네의 충정은 반드시 보답 받을 걸세.”

“그렇다면 귀국을...”

“아니. 그래도 바흐카덴까지는 가야겠네. 어차피 그곳에 가면 힐로템으로 귀환할 선박이 있지 않겠나?”

“...네, 알겠습니다.”

선장실을 나온 테일러는 어느새 어둠이 짙어진 바다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에스페른에게는 담담하게 말했지만, 아마 이번 기회가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일게 뻔했다.

일레드의 국력은 어느새 제국을 위협할 정도로 커졌고, 모든 왕국들이 제국의 해양진출을 탐탁치 않게 보고 있었다.

만약 자신이 실패한다면, 아마도 다른 나라들의 격렬한 견제 때문에 두 번째 기회는 정말 만들기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별 볼일 없는 흔한 제국군 장교였던 자신을 전폭적으로 지원해온 에스페른이었다.

자신이 실패한다면 아마 살아서 그 책임을 질 수 없을 테니, 그 책임은 온전히 에스페른의 몫으로 남을 터였다.

그리고 자신과 다르게 제국의 실세 중 한 명인 에스페른은 그를 지지하는 세력만큼, 적대하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그런 그의 정적(政敵)들은 이 좋은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으리라.

* * * * *

- 이클로나 호 출항 당일, 로제 항구 -

수리를 마친 이클로나는 산뜻한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했다.

청소를 할 필요도 없으니 선원들 전체가 여기저기에 널부러져 빈둥대고 있는데, 선교 앞의 중앙갑판에 모이라는 외침이 들렸다.

10분쯤 지났을까?

이번에 모집된 듯한 낯선 얼굴들이 어느 정도 익숙해져 서로 웅성거리고 떠들 때 쯤, 선장님과 부선장이 타륜 옆에 섰다.

오늘도 역시나 선장님은 여유롭게 우리를 굽어보기만 하고 입을 여는 것은 부선장인 테일러였다.

“모두 주목! 오늘 이클로나는 델라항을 출항해서 쿠샤 왕국의 바흐카덴으로 향할 예정이다. 중간에 기항 예정지가 없으므로 꽤나 긴 항해가 될 것이다. 모든 선원들은 각자 임무에 충실하여 항해에 지장이 없도록 하기 바란다. 그리고 리안 앞으로.”

음... 올 것이 왔는가?

나를 힐끗힐끗, 또는 노골적으로 보면서 웅성거리는 선원들을 헤치고 타륜쪽으로 가서 선장님과 부선장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선장님이 살짝 놀란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아주고, 테일러는 내게 몸을 돌리라는 제스처를 취한뒤 말했다.

“여기 리안군은 앞으로 보좌관이다. 선장님과 나에게 항해 전반에 대한 조언을 하고 유사시에 선장님이나 내 명령을 전달하게 될 거다. 모두 유념하도록.”

테일러의 말이 끝나자 잠시 선원들 사이에 웅성거리는 소음이 생겼다.

노골적인 비웃음을 짓는 놈도 있었고, 약간 적대적인 시선을 보내는 놈도 있었다.

음, 솔직하게 말해서 대부분 부정적인 느낌이지, 호의적인 시선을 보내는 사람은 두 명 정도 밖에 안 보인다.

잠시 선원들을 둘러보며 반응을 살피던 테일러는 내 등을 툭툭 치며 내려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이만 해산, 계류색(선박을 부두에 고정하기 위해 연결해 놓은 로프) 걷고 바로 출항한다.”

뭐야? 이게 끝이야?

얼떨결에 자석에 이끌리듯 선원들이 모여 있는 갑판으로 내려가니, 가까이에서 보니 다들 눈빛이 장난이 아니다.

우르타와 네이선이 있는 쪽으로 걸어가려는데 힘을 주고 길을 막는 놈, 등이나 허벅지를 툭툭 치는 놈, 표정으로 쌍욕을 퍼붓는 놈... 별 놈이 많기도 하다.

열이 뻗치기는 하는데,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기도 한다.

만약 내가 저들 입장이더라도 방금 전까지 똑같은 선원이었던, 경력도 얼마 안되는 새파랗게 어린놈이 상사(?)가 된다면 기분이 참 더럽기는 할 것 같다.

심지어 그 상사 비슷한 놈의 책임이나 권한, 지위가 명확하지도 않은 신설직이다.

그래, 나라도 우습고, 짜증나고, 괴롭히고 싶을 것 같기는 하다.

...잠깐! 방금 내 엉덩이 때린 놈 누구야?!

이 새끼들이 선 넘네?!

* * * * *

나는 해먹 위로 꾸물꾸물 기어 올라가며 단전에서 올라오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후, 더럽고 치사해서 살겠나... 내가 지들 마누라를 뺏은 것도 아닌데 왜들 지랄발광을 하는 거야? 아, 진짜 엉덩이 때린 놈 잡히면 뒤진다...”

참고로 말하자면, 선원들은 대부분 미혼이다.

우리 아버지도 원래 선원이었다가 고기잡이 어부로 전직하고 나서야 어머니랑 결혼할 수 있었다고 한다.

솔직히 한번 나가면 언제 들어올지 기약도 없고, 3분의 1쯤은 자의건 타의건 나갔다가 안돌아오는데 어떤 여자가 그런 남자랑 결혼한다고 하겠나?

“어? 리안 들어왔어? 좀 어때? 많이 힘들어?”

“우르타냐...? 야, 말도마라. 멍든 데가 한두군데가 아니야.”

“...애들이 때려?”

“아, 때렸으면 같이 싸우기라도 하지... 실수로 물건을 놓치고, 실수로 나한테 넘어지고, 몰래 툭 치고 가고... 아오, 생각도 하기 싫다, 자자 그냥.”

편안한 자세를 잡으려고 뒤척이는데 우르타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갑판장이나 포병대장한테 말해볼까?”

“어이구, 아서라. 그걸로 해결될 일이면 내가 진작 말했지. 그리고 갑판장, 이 노망난 노인네가 제일 심해...”

갑판장을 생각하니 다시 열이 치솟는다.

분명히 오늘 그놈의 ‘보좌관’ 발표가 있기 전만해도 갑판장과 나는 사이가 나쁜 편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좋은 편에 속했다.

편제상 갑판장은 선원들을 실질적으로 지휘하는 상관이었고, 내입으로 이렇게 말하기는 민망하지만 일 잘하는 똑똑한 부하를 싫어하는 상사는 없는 법이니까.

그런데 하루아침에 잘 부려먹던 부하가 자신과 비슷한 급으로 올라선다면?

정확하게 말해서 비슷한 급은 아니지만, 일단 갑판장이 마음대로 부려먹기는 어려운 위치가 된 것은 맞다.

덕분에 오늘 하루 종일 온갖 고생을 다했다.

‘아직 너는 내 밑이다!’라고 온몸으로 웅변하듯이 쓸데없는 지시와 테클은 기본이었고, 배를 처음 탔을 때나 했을 법한 일을 맡기지를 않나, 여럿이서도 하기 힘든 일을 혼자 시키지를 않나... 아주 치가 떨린다.

그래도 며칠 정도는 참아야 할거다.

화가 난 사람에게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화를 풀라고 해봐야 역효과만 난다는 것쯤은 알고 있으니 말이다.

적당히 분노와 질투가 희석될 때쯤, 아부도 좀 하고 준비한 고급 위스키도 선물하고 그러면 좀 나아지겠지.

그 다음은 암묵적으로 인정되는 선원들의 리더 차례다.

아무래도 배라는 특성상 남자들만 모여있다보니 다 똑같은 선원이라고 해도 서열이 생기고 그룹이 생긴다.

명시적으로 선원들 간에 계급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암묵적으로 수습 선원, 일반 선원, 숙련 선원, 베테랑 선원으로 구분한다.

그리고 베테랑 선원이나 연차가 좀 되고 리더십이 있는 숙련 선원이라면 그를 따르는 그룹들이 생기게 된다.

뭐 그렇다고 아주 끈끈하고 배타적인 그룹은 아니고 적당히 느슨한 정도로, 대충 또래집단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선장이나 부선장쯤 되면 이런 자잘한 것까지 고려하지 않겠지만, 직접 선원들과 부대껴야 하는 항해사나 갑판장은 이런 리더들은 어느 정도 인정을 해주는 편이다.

사람 사는 곳이 다 똑같은 것처럼, 전생에서도 늘 있던 그것이다.

학교에서 같은 반이라도 전부 다 ‘친구’라고 할 만큼 친한 것이 아니라 자주 노는 그룹이 있고, 같은 회사, 같은 팀이라도 자주 어울리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하다못해 작은 동호회 같은 곳을 가더라도 더 마음이 가고 자주 어울리는 사람이 생기게 마련이지.

그리고 이들과 친해지는 방법은 그 그룹에 들어가거나, 그룹의 리더와 친해지면 된다.

아니 그런데... 나 이거 몇 달 전에 이미 하지 않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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