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보좌관이 살아가는 방법
다행히 내 전략은 적당히 먹혀 들어갔다.
그렇잖아? 질투가 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무슨 자기들과 원수를 진 것도 아니고, 뭐라도 된 것 마냥 아니꼽게 행동하는 것도 아닌데 분노가 얼마나 가겠어?
그래도 아직 질투는 남았는지 영 어색하게 구는 녀석들도 좀 있다.
호칭도 갑판장이나 항해사들처럼 ‘~님’이 아니고 그냥 보좌관이다.
그러면서 저렇게 입꼬리를 말아 올리는 녀석들도 있는데, 뭔가 직책이 있는 나를 깎아내려서 자존감을 채우는 변태같은 성향을 가진 것이 분명하다.
“어이, 리안 보좌관! 여기 로프정리 좀 도와줘!”
바짝 엎드릴 때야 허허 웃으면서 도와줬겠지만, 이제 그럴 필요 없다.
아니지, 오히려 약해 보이면 깔아뭉개고 물어뜯는 것이 남자들의 세계다.
“아, 세 명이나 붙어서 그것도 못해서 내가 도와야 해? 혹시 아직도 손 떨리냐?”
“뭐야? 어제는 내가 술을...”
“시끄러. 술은 네이선이 더 마셨지. 팔씨름 좀 했다고 손을 부들부들 떨 정도니 로프는 제대로 잡겠냐고... 어휴, 기다려! 내가 불쌍해서 도와준다!”
말 빨로 이기지도 못할 것을 뻔히 알면서 왜 시비를 걸어대는지 이해가 안된다.
난장판으로 어질러진 로프가 있는 방향으로 설렁설렁 걸어가면서 말을 건 녀석의 얼굴을 보니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새빨갛다.
그래도 너무 뻗대면 관계가 틀어질 수 있으니 가서 좀 돕기는 해야겠지.
“어이, 리안! 아니, 보좌관! 부선장님이 부르셔!”
“......”
정말 도와주려고 했다...
나는 어색한 미소와 함께 그들에게 가벼운 미안함을 담은 제스쳐를 날리고는 빠른 걸음으로 부선장실로 향했다.
“부선장님, 부르셨습니까?”
“아, 리안. 아니, 보좌관. 허헛, 아직 입에 붙지 않는군. 이리 와서 앉지.”
아니 이 사태의 원흉이면서 본인도 어색해하면 어쩌라는 거야...?
솔직히 말해서 보좌관이니 뭐니 하는 웃기는 직책은 필요도 없다.
그냥 선원으로 있으면서 이렇게 한 번씩 불러서 일을 시켜도 무방하니까.
그런데도 굳이 번거로움을 감수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나를 좀 높게 쓰겠다는 것 아니겠어?
그러니까 참는거다.
“자네도 대충 앞으로 일정을 알아둬야 할 것 같아서 불렀네. 자네 의견도 듣고 싶고 말이지.”
“네, 감사합니다.”
“자네라면 대충 예상은 했겠지. 이번 목적지인 바흐카덴이 어떤 곳인지 알테니까.”
“...서해 항로...를 타실 생각이십니까?”
“으음, 조금 더 여유가 있었으면 좋겠지만 해적도 그렇고, 첩자가 붙은 것도 그렇고... 상황이 녹록치 않네.”
서해 항로, 향료 제도.
대충 150년쯤 전에 쿠샤 왕국에 의해 발견되고 벨로키나 왕국에 의해 개발되었으며, 이후 연안 7국의 끊임없는 자금원이자 절대 왕정 구축의 핵심, 대항해시대의 원동력이 된 곳이다.
전생에서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대서양을 넘어 신대륙(아메리카)에 도달한 것과 비슷하기는 한데, 몇 가지 다른 점이 있다.
일단 발견한 것이 대륙이 아니라 제도다.
상당히 큰 섬들 10여개와 작은 섬 수백 개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발견 당시에는 원주민이 조금 있었던 것 같지만, 대륙이 아닌 만큼 규모도 작고 문명도 보잘 것 없었다고 한다.
시제가 왜 과거형이나면, 본격적인 개발이 시작된지 10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씨가 말라버렸기 때문이다.
여기 있는 인간들이 옛날 유럽인들보다 더 지독한 놈들이라는 것을 인증한 꼴이다.
덕분에 현재 향료 제도에 거주하는 거주민들은 대부분 노예 출신의 노동자들 뿐이라고 한다.
두 번째로 다른 점은 자원이다.
유럽인들이 발견한 신대륙은 말 그대로 자원의 보고였지만, 이곳의 향료 제도는 딱히 유명한 광물은 없다. 사금이 약간 나오는 것 같고 철광석과 구리 정도가 있는 것 같은데, 유명하지 않은 것으로 봐서 양이나 질이 그리 대단하지는 않은 것 같다.
단, 대륙과 전혀 다른 기후와 식생에 의한 특이한 약초와 향신료, 향료는 제도의 이름을 ‘향료’라고 붙게 할 정도로 엄청나다.
향료 제도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일레드 왕국이 향료 제도로 향하는 직항로를 만들기 위해서 국가의 존망이 내걸릴 정도로 위험한 전쟁을 일으켰을 정도니까, 어느 정도 가치가 있는지는 이해가 될 것이다.
일레드가 국력을 걸고 일으킨 전쟁이 바로 내해 북서쪽에 위치한 시논과 케르빈 섬을 두고 벌어진 쿠샤와 일레드의 전쟁이었는데, 이 전투를 기점으로 중견국 3국 중 가장 약체였던 일레드와 제국을 위협할 정도로 성장했던 쿠샤의 운명이 뒤바뀌는 기가 막힌 상황이 되고 말았다.
대륙의 북동쪽에 위치해서 향료 제도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타국의 항구에 기항해야만 하던 일레드는 ‘본토 - 시논 섬 - 향료 제도 북단’ 이라는 거리는 멀지만 항해는 쾌적한 항로를 획득하여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심지어 대륙 북동부터 북서까지, 사실상 타국의 북쪽 진출을 완벽하게 봉쇄하는 것에 성공하여 북부 대륙이라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독점함으로서 놀라울 정도로 성장하는 중이었다.
반대로 쿠샤 왕국같은 경우는 벨로키나 왕국의 기습으로 시논 섬과 케르빈 섬을 제 때에 지원하지 못해 두 섬을 잃은 것은 물론, 본토 북부까지 벨로키나에게 빼앗겨서 서해 항로의 독점적 지위를 잃었다.
설상가상으로 얼마 후에 남부까지 벨로키나에게 점령당해, 타국(제국)과 연결된 유일한 육로를 잃어버림으로서 벨로키나 왕국 안에 안긴 꼴이 되어버려 점점 말라 죽어가게 된 것이다.
서해 항로에 대한 잡설은 여기까지.
나는 테일러의 질문에 잠시 고민하다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바흐카덴은 전통적인 서해 항로의 출발지입니다. 덕분에 항로도 많이 알려져있고 이용하는 선박도 많습니다.”
“으음...”
“하지만 그것이 우리가 쉽게 항해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제가 알기로 우리 배에 서해 항로를 경험해 본 사람이 없습니다. 맞습니까?”
“그렇네. 서해 항로를 다녀온 자는 왠만해서는 내해로 돌아오려 하지 않고, 돌아온 자는 다시는 서해 항로를 가기를 꺼리니까.”
“제가 듣기로 편도로만 두 달, 저희는 익숙하지 않으니 어쩌면 그보다 더 걸릴 수도 있는 먼 길입니다.”
“제반 사항은 그만 하지. 그 정도는 이미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무리인걸 알면서도 실행해야 하는 때가 있네. 바로 지금도 그렇고.”
아니, 아저씨 그건 군인들 이야기구요.
나는 이렇게 승률 낮은 도박에 별로 배팅하고 싶지 않다.
심지어 배팅해야 하는 판돈이 내 목숨이라면 더욱 더.
내가 발을 뺄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데 테일러의 낮은 목소리가 나를 깨웠다.
“지금 필요한 것이 자네의 기지일세. 수익 따위는 나지 않아도 상관없어. 우리에게 필요한건 돈 몇 푼이 아니라 경험이니까.”
“...그렇다면 시도할만한 몇 가지 방안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우리는 바흐카덴에서 선단을 구성 할 걸세. 한 척이 추가될 거야.”
선박이 추가된다는 이야기를 듣자,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수익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일이 쉽게 풀릴 수 도 있겠다.
“이번에 포대를 추가하셨더군요. 양 현에 한 문씩.”
“으음, 서해 항로를 가는 것까지 고려한 걸세.”
대포는 선박이 갖출 수 있는 강력한 무력이기도 했지만, 반대로 엄청난 지출원이기도 했다.
포탄이 비싸다고 해봐야 대포에 비하면 새발에 피고, 바닷바람을 맞아대는 금속이 제대로 곱게 유지될리 없으니 유지보수비도 비싸다.
심지어 그 무게와 부피만큼 화물을 줄여야 하고, 포가 늘어난 만큼 포 운용 인원도 늘어야 한다.
사람이 늘면 사람의 공간만큼 그리고 그 사람이 쓸 음료와 식량만큼 화물 용량이 줄어든다.
수익은 줄고, 지출은 늘어난다.
상선으로서는 정말 최악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 고드실카 같은 작은 배들은 아예 포를 두지도 않는 것이다.
“혹시 새로 추가되는 선박의 무장도 이클로나와 비슷합니까?”
“글쎄? 합류시점에서야 조금 다를 수는 있지만, 바흐카덴에서 무장을 바꿀 수 있지.”
“그렇다면 이런 방법은 어떻습니까?”
서해 항로는 위험하다.
태풍도 위험하고, 일확천금을 노리는 해적들도 위험하지만, 애초에 장거리 항해를 해야 하는 배라는 공간 자체가 위험하다.
제대로 씻지도 못하는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영양공급까지 불충분하면, 사람이 죽어나가는 것은 순식간이니까.
하지만 장거리 항해인 만큼 그렇지 않아도 식료품을 많이 실어야 하는데, 거기에 풍족한 식단을 제공하려면 선주 입장에서는 돈 한두 푼 나가 문제가 아니라 수익 자체가 깎여나가는 피눈물나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일부 선박들은 선단을 구성하기도 한다.
선단은 주로 여러 척의 상선이 뭉치거나, 용병 함대를 고용하는 형태로 진행된다.
상선만 뭉치는 경우는 자체 무장을 한 무장상선들이다.
자체적인 무력이 어느 정도 되기는 하지만, 해적 선단을 상대할 정도는 아니라서 몸집을 불리는 경우라고 하겠다.
용병 함대를 고용하는 경우는 큰 상회가 주도하는 경우가 많은데, 상선들의 무장은 최소로 하고, 실제 습격 저지와 전투는 고용한 용병 함대에 일임하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게 용병인지 해적인지 어떻게 알겠어?
심지어 용병 함대라는 놈들도 일거리 없으면 조용히 해적질 한다는 것쯤은 배 타본 놈들은 다 알고 있다.
그러니 뒷배나 인맥이 부실한 소상공인(?)들은 감히 엄두도 못내는 것이지.
대신 상인들의 잔머리가 구르고 굴러서 나온 방법이, 상선 중에 일부를 용병 함대처럼 운용하는 방법이었다.
수익금 일부를 각출해서 보조해주거나, 다른 약점이 있는 선박들에게 화물을 줄이고 무장을 추가해서 전투력을 강화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다른 선박들은 무장을 조금 줄여도 되고, 너무 많은 선박이 동시에 움직이면서 발생하는 과도한 가격 경쟁도 완화할 수 있었다.
“저희가 만약 용병 함대를 표방하더라도 대형 상단에서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저희를 쓸리도 없고, 쓰려고 해도 아마 각국의 견제 때문에 힘들겁니다.”
“그럴걸세.”
“그렇다면 끝까지 상인으로 밀어붙이시지요. 바흐카덴에서 구성되는 선단에 합류하는 겁니다.”
“초행인 우리를 그리 쉽게 받아주겠는가?”
“초행이라 물건도 테스트용으로 여러 종류를 조금씩 거래할 것이고, 무장 강화라는 패널티도 감수하겠다고 하면, 충분히 받아줄 곳이 있을 것 같습니다.”
“무장 강화라... 하긴, 수익을 포기한다면 충분히...”
“대신 포는 조금 더 올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적어도 두 척을 합쳐서 20문은 되어야 교섭이 쉬울 겁니다.”
우연치 않게 기억이 나기는 했지만, 사실 나도 서해 항로의 이야기를 듣기는 쉽지 않았다.
테일러의 말대로 한 번 간 놈은 안 오려고 하고, 온 놈은 더 이상 뱃사람이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니까.
술집에서 간혹 현직인 놈들과 마주치더라도, 내해만 다니는 우리를 무시하는 경향이 심해서 대화가 이어지기보다는 곧잘 싸움으로 변질되기 마련이니, 언제 제대로 이야기를 듣겠어?
하지만 지금 테일러에게 한 이야기는 누군가의 경험담이니까, 충분히 가능할거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