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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28화 (28/420)

<28화> 터닝 포인트

나만 보좌관이니 뭐니 말이 많았던 것은 아니다.

네이선은 결국 해병대로 적을 완전히 옮겨서 선원일을 거의 손에서 놓아버렸고, 우르타는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해서 오락가락한다.

아직 견시대에 미련을 버리지 못해서 대부분의 시간은 견시대에 올라가서 지내고 있지만, 하루도 쉬지 않고 포갑판으로 내려가는 것 같다.

뭐, 포병대장님도 별로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다.

포병대라고 훈련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들어보니 포병대장이 우르타에게 원하는 건 정확하고 정밀한 포 조작이 아니라 관측병으로서의 능력이니까.

그리고 항해가 막바지를 바라보기 시작할 때쯤 선원들 사이에서 알음알음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바흐카덴에 도착하면 서해 항로를 타고 향료 제도를 향하게 될 것이라는 소문이었다.

테일러도 충분히 알 정도로 공공연하게 소문이 돌았음에도 아무 말도 없는 것을 보면 의도적으로 낸 소문인 것 같았다.

뱃사람들이고 모두 모험심 넘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일부 선원들은 아예 배에서 내릴 작정을 한 것인지 바흐카덴에서는 좋은 일자리를 구하기 힘들다고 투덜거렸고, 일부는 자신의 목숨 값과 모험심의 무게를 저울질하며 갈팡질팡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선원들은 오히려 좋은 기회를 만났다며 기뻐했다.

서해 항로를 타는 것이 위험한 일이라고는 하지만 애초에 선원이라는 직업 자체가 목숨 걸고 외줄타기 하는 일인 이상 일당이 높다는 것은 대부분의 단점을 상쇄할 수 있는 장점이었다.

게다가 비단 일당뿐만이 아니다.

선원의 개인적인 화물은 제한이 심하기는 하지만, 고작 주머니 몇 개 분량의 향료나 향신료를 가지고 뭐라고 하는 배는 없다.

그리고 향료 제도에서 고작 그 정도의 분량만 구할 수 있더라도 본토에서 처분만 잘하면 내해에서 거의 1년 치 일당을 한 번에 얻을 수 있었다.

말 그대로 일확천금인 것이다.

물론 갔다가 무사히 돌아올 확률부터 전문가도 아닌 사람이 정상적인 상품을 구할 가능성, 항해 중에 상품이 상하지 않을 가능성... 하여간 수많은 가능성을 뚫고 돈을 손에 쥐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전생에서도 그렇지 않았던가?

사람들은 복권을 사고, 주식을 하고, 도박을 한다.

냉철하게 이성적으로 따지면 하지 말아야 할 확률임에도 사람들은 어리석은 도전을 계속한다.

사람들이 관심이 있는 것은 성공한 몇몇의 기적 같은 이야기이지, 그 뒤에 숨겨진 수많은 실패자들의 어두운 삶이 아니니까.

얼마 전에도 비슷한 말을 한 것 같지만, 사람이 사는 곳은 거의 비슷비슷하다.

* * * * *

슬슬 인간의 미각에 한계를 시험하기 시작하는 점심식사를 겨우 마치고 나오는 길에 우르타를 만났다.

우르타가 있는 곳이 견시대 아니면 포갑판이다보니 요즘에는 영 얼굴 보기가 힘들다.

작정하고 돌아보면 다 돌아보는데 30분이나 걸릴까 싶은 이 배에서 며칠이나 얼굴을 안 마주 칠 수 있다니, 그것도 나름 대단하다.

아예 소속이 달라져버린 네이선도 하루에 두세번은 보는데 말이지.

“여, 우르타 오래간만이네?”

“앗! 리안! 나는 리안 자주 봤는데?”

“......”

그래, 넌 견시대 위에서 내 정수리를 지켜보기도 했겠지.

그런데 그게 우리가 만난 것은 아니지 않냐?

“그래, 지켜봐줘서 고맙다. 요즘 어때? 잘 지내?”

“응, 대포는 정말 멋진 것 같아!”

“그래? 의외네? 포갑판 같은 곳은 싫어하잖아.”

“으응... 거기는 지금도 싫어... 하지만 대포가 있잖아! 재밌어!”

내가 지금 스무살이 넘은 남자랑 이야기하는 것 맞지?

네이선이나 우르타 모두 순진한 편이기는 하지만, 우르타는 가끔 순진이나 순수를 넘어서 정신연령 자체에 문제가 있나 싶을 정도로 단순한 모습을 보여주고는 했다.

“그럼 어떻게 할 거야? 이제 포병대로 옮기려고? 포병대장님은 그랬으면 하는 것 같던데...”

“으응... 글쎄? 지금도 나쁘지는 않은걸? 대포가 좋기는 하지만 그곳에서 하루 종일 있는 것은 자신 없어...”

그래, 너라면 그럴 줄 알았다.

그래도 전투 쪽에 대한 특기가 하나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어차피 나와 함께 하기로 한 이상 언젠가는 군함을 타게 될 텐데, 군함의 목적 자체가 전투이니만큼 전투에 관한 특기가 있는 편이 그냥 선원보다는 대우가 좋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동안 나는 테일러에게 몇 번 불려가서 질문을 받거나, 항해술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뭐, 정확하게 항해술은 아니고 항해에 관련한 잡다한 지식들에 대하여 이야기 한 것이지만, 최근에 책 한권을 선물 받으며 테일러의 의도를 알게 되었다.

선물 받은 책의 이름은 ‘항해술 총론’. 대충 훑어봐도 대충 쓰여진 책이 아니라 어딘가 유명한 항해학교에서 교재로 쓸법한 완성도 높은 항해술 책이었다.

테일러는 나를 단순한 선원, 군인, 소모품이나 쓰다가 버리는 도구 정도로 키우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확인시켜준 것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테일러의 호의는 나를 향한 것이었다.

누가 봐도 전투에 특화된 네이선이야 딱히 쳐낼 이유가 없지만, 우르타는 글쎄...

우르타는 정말 좋은 선원이다.

하지만 좋은 군인이라고 보기에는 조금 어렵다.

나도 칼질은 썩 잘하는 편이 아니지만, 그런 내게도 형편없이 밀리는 실력을 가진 우르타이니

군인으로서는 거의 낙제점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근력은 조금 부족할지 몰라도 몸 자체는 굉장히 빠르고 균형감각은 범인과는 격이 다른 수준인데, 이상하게 칼만 들면 애가 바보가 되어버린다.

그렇다고 일반인도 상대 못할 정도로 형편없는 수준은 아니지만, 우리가 칼을 들면 싸워야 할 상대가 보통 배위에서 칼질하는데 이골난 해적들이라는 것이 문제다.

전생에서의 군인, 특히 해군이란 거의 고급 기술자에 가까워서 우르타같은 사람도 딱히 문제될 것이 없다.

하지만 아직 대포를 제외하면 화기라고 할 만한 것이 없고, 전쟁과 전투의 주축은 냉병기인 이 이곳은, 육군이건 해군이건 일단 칼을 못 쓰면 빈축을 사는 세계니까 말이다.

그런데 진짜 이상하긴 하네.

왜 이 세상에는 개인 화기가 개발되지 않는 거지?

난 지금까지 이 세상에서 ‘총’이라는 것을 본적도, 들은 적도 없다.

* * * * *

바흐카덴 항구는 한때 대륙 최대의 항구로 이름났던 곳이다.

쿠샤 왕국에서 출발하는 서해 항로의 시작점으로, 지금도 상당히 큰 규모를 자랑한다.

하지만 말로만 들은 예전의 위용은 찾아보기 힘든데, 쿠샤 왕국의 몰락과 함께 규모가 급격하게 쪼그라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흐카덴에는 지금까지 내가 타던 내해 위주의 무역을 하는 배들은 그리 자주 오지 않는다.

대부분 서해 항로를 다니는 선박들인데, 그래서인지 소형 상선보다 중대형 상선이 더 많아 보였다.

그럼에도 전체적으로 썰렁해 보이는 것은, 아무래도 쿠샤 왕국 선박 외에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쿠샤 왕국은 일레드-벨로키나 연합과의 전쟁에서 대패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몰로스 제국을 위협하는 해상 강국이었다.

바흐카덴, 론, 시논 섬의 시논 항구까지 대륙 5대 항구 중 3개를 소유하고 있었고, 대륙의 어떤 나라도 쿠샤 왕국의 허가 없이는 서해 항로를 이용하지 못했다.

하지만 일레드에게 시논 섬을 실함하면서 서해 항로에 대한 독점권을 상실했고, 론 항구를 벨로키나에게 빼앗김으로서 다른 모든 나라들에게 외면을 받게 되었다.

쿠샤보다 동쪽에 위치한 다른 나라들 입장에서는 쿠샤 영토 한가운데 위치한 바흐카덴보다는 론 항구가 서해 항로의 출발, 도착지로 더 좋았으니, 론의 관세를 최소화 하겠다는 벨로키나의 결정에 지지를 보낸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그것이 역설적으로 우리가 바흐카덴을 선택한 이유이기도 했다.

제국이 대부분의 왕국에게 적대적 견제를 받고 있기는 하지만 그나마 관계가 나은 나라가 바로 국경을 접하지 않은 쿠샤와 프레티아였다.

쿠샤 같은 경우에는 몰락하기 전까지만 해도 제국과 수차례나 물리적 충돌이 있을 정도로 적대적이었지만, 벨로키나에게 둘러싸인 꼴이 되어버린 지금은 벨로키나와 날을 세우고 있는 제국과 오히려 관계가 좋아져 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제국의 해양 진출에 대해서도 ‘소극적 반대’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고 한다.

풀어서 말하면 ‘달갑지는 않지만 굳이 하겠다면 쫓아다니면서 말리지는 않을게.’ 정도로 보면 되겠다.

다른 나라들은 어떻기에 저게 좋은 반응이냐고?

당연히 ‘적극적 반대’이고, 풀어서 말하면 ‘바다에 나올 거면 전쟁부터 각오해라!’ 라고 할 수 있으려나?

덕분인지 몰라도 평소보다 덜 엄격한 입항 심사를 끝내고 부두에 계류하자, 남자 몇 명이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부두에서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말이 나온 김에 한번 떠들어보자면, 이클로나는 입항을 할 때마다 아주 난리가 아니었다.

제국 소속이라는 깃발 하나만으로 입항 심사부터 계류위치 지정까지 온갖 차별을 받는 것이었다.

덕분에 지금까지 옛날 버릇(불법과 편법사이를 오가던 그런 일들)이 다시 튀어나올 엄두도 못냈다.

솔직히 너무 짜증나서 내리려고 했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지만, 고드실카를 탈 때보다 과하게 높은 일당이 내 인내심을 늘려주곤 했었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현문이 설치되기 무섭게 배에서 내린 선장님과 테일러를 위시한 간부진들은 기다리던 남자들과 악수를 하더니 바로 멀어져갔다.

아마도 테일러가 말했던 이번에 선단을 구성한다는 선박의 간부들인 듯 했다.

그리고 유일하게 남은 갑판장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렸다.

“총원 그대로 들어! 이클로나의 다음 목적지는 향료 제도다! 그리고 선장님께서 모험을 함께한 멋진 놈들은 복귀 후에 더 크게 보상하겠다고 하셨다! 단! 모험을 원하지 않는 겁쟁이들은 내 앞으로 모여라. 너그러우신 선장님께서 퇴직금으로 한 푼씩 더 주기로 했으니까!”

퇴직금이라는 말에 여기저기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엄청나게 고된 항해를 마치고 큰 수익을 얻은 경우, 퇴직금이라고 돈을 더 주는 것은 드문 일은 아니다.

선장이나 선주 입장에서는 선박 정비가 끝나면 빨리 배를 출항시켜야 더 큰 수익을 노릴 수 있는데, 진이 빠진 선원들은 장시간 쉬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난리를 치고도 그냥 선원들을 내치면 평판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지사.

그러니 선원들에게 돈을 더 쥐어줌으로서 서로 좋게 헤어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경우가 조금 다르다.

항해가 조금 길기는 했지만 딱히 어려운 것은 아니었고, 이번에는 수익이 얼마 안된다는 것을 대충 눈치로 다들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선원들은 언제나처럼 별로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안그래도 서해 항로를 향한다는 말에 배를 더 탈지 말지 고민되는 판에 돈까지 더 준다면 무게추가 순식간에 넘어가 버리는 것이다.

그 예상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갑판장 앞으로 선원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모이지 않는 자들은 대충 훑어봐도 대부분 테일러의 심복들 -아마 제국인들- 로 예상했던 녀석들이 태반이었다.

아마 그 태반에 속하지 않은 녀석들도 거의 다 내가 못 알아본 심복들이거나 우리처럼 테일러등에게 설득당해 합류를 결정한 자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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