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상선단(1)
여긴 어디? 나는 누구?
......
철지난 전생의 기억을 떠올릴 만큼 지금 상황이 상식 밖이다.
여기는 그러니까 고급 룸 술집? 아니 식당? 하여간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한 번도 못 와본 곳이다.
그리고 부선장 테일러, 일등 항해사 알리샤가 동석하고 있고, 맞은편에는 딱 봐도 ‘선장입니다’라는 포스를 풍기는 남자 세 명이 앉아있었다.
...미안, 사실 그냥 지나가는 술주정뱅이 아저씨같이 생겼는데 일단 선장님들이다.
그러니까 이런 어마어마한 자리에 내가 왜 끼게 된거냐 하면...
하루 전 저녁으로 돌아가보자.
* * * * *
입항 이틀째, 나는 평소처럼 네이선과 우르타를 데리고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원래는 저녁식사이긴 한데, 그렇잖아? 반주 한 잔이 두 잔 되고, 두 잔이 한 병 되고, 그러다보면 어느새 식사는 안주로 전락하는거다.
술에 반쯤 취해서 우르타, 네이선과 술자리에서나 하는 그런 쓸데없는 이야기로 웃고 떠들고 있는데, 내 왼쪽에 의자가 하나 턱 놓이더니 누군가 털썩 앉았다.
뭐야, 어느 놈팡이가 놀러오셨나?
“리안 보좌관, 지금 시간 좀 괜찮겠나?”
“아, 그놈의 보좌관! 적당히 좀 놀려... 헉! 테일, 아니 부선장님?!”
“허헛, 동료들 장난이 심한 모양이군?”
“아닙니다! 그것보다 얘들... 아?”
갑자기 등장한 테일러 때문에 취기가 싹 날아가서 네이선과 우르타를 보는데, 이 새끼들... 엉거주춤 일어난 꼴이 벌써 튈 준비가 끝났다.
“아하하하, 리안 우리는 저쪽으로 갈게. 부선장님 편하게 말씀하시죠.”
“아, 나도 아까부터 화장실이 급했어. 부선장님 저희는 이만...”
테일러가 피식하고 웃음을 짓는 사이 두 녀석은 빛의 속도로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 사이에 술이랑 안주(?)까지 다 챙겼다.
아니, 화장실 가는 놈이 술이랑 안주를 왜 챙기는데?
뭐 그렇게 과민반응이냐 싶겠지만, 업무적으로 상사랑 친한거랑 사석에서 상사를 만나는 것은 다른거다.
막말로 상사들이 회식이랍시고 고깃집을 데리고 가면, 투쁠 한우도 맛이 없... 그래, 솔직히 대통령이랑 먹어도 한우는 맛있겠지.
하여튼 그런 자리도 귀찮고 부담스러운 것이 인지상정인데, 직원들끼리 사적으로 술 마시고 있는데 상사가 난입한 꼴인 셈이다.
심지어 테일러 정도면 그냥 상사 정도가 아니고 회사로 치면 부사장, 그것도 실권을 다 쥐고있는 부사장이다.
솔직히 우리 선장님은 뭐랄까, 명목상의 지휘권을 가지고 있지만 딱히 행사하지는 않으셔서 그냥 외부인 같은 느낌이 강하다.
고드실카 호의 선장님과는 조금 다른 느낌인데, 고드실카의 선장님은 실무에 직접 손대지 않을 뿐 전체적인 지휘를 직접 하는 느낌이라면 이클로나 호에서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오히려 부선장인 테일러다.
선장님은 그냥 테일러에게 보고만 받는 듯한 느낌이랄까?
하여간 다 필요 없고 내 미래는 물론이요,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분이니 쉽게 대하기 어려운 것이 당연하지 않겠나?
“하하, 부선장님께서 어떻게...”
“좋은 시간을 방해해서 미안하군. 하지만 상황이 조금 난감해서 말이지...”
“무슨일이신지... 혹시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을까요?”
솔직히 말하자면, 진짜 돕기 싫다.
남들은 다 노는데 왜 나만 일해야 하는데?
하지만 사회생활이라는 것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안되는 거다...
그리고 이미 이런 레파토리는 매우 익숙하다.
원래 일 잘하는 직원에게는 더 많은 일이 주어지고, 일 못하는 직원은 할 일이 줄어드는 법이지.
그래서 인간은 사회적으로 무능해질 때까지 승진한다고 했던가?
무슨 자기계발서에서 본 것 같은데?
각설하고, 세상은 기브 앤 테이크,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
더 빠른 성공, 더 많은 돈, 남들보다 더 높은 자리는 나의 시간, 노력, 희생을 양분으로 자라는 나무인 것이다.
“자네가 말한 연합 상단을 찾아봤네. 괜찮은 곳도 찾았고.”
“네, 그것 참 잘된 일이군요.”
찾았으면 된거지 뭐가 문제야?
“그들과 접촉을 해봤는데 설득이 쉽지 않아. 우리 같은 군인들에게 상인을 말로 상대하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지.”
“저,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회계사가 있지않습니까? 그라면 충분히...”
“선장님과 회계사는 본국으로 복귀했네.”
“네?! 그렇다면...?”
“으음... 회계사는 우리 소속이 아니라 강제하기 어렵더군. 실제로 함대가 창설되면 그의 자리가 애매하기도 하고 말이지...”
“하지만 저라고 해도...”
사실 그렇잖아?
내가 무슨 회계 전문가도 아니고, 흥정이니 교섭이니 해봤자 시장이나 뒷골목에서 해본 것이 전부다.
그런 내가 무슨 재주로 최소 수년 혹은 수십년을 이 바닥에서 굴러먹은 상인들을 상대로 교섭에 임하겠는가?
매사에 열심인 직원이 이쁨받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똥인지 된장인지도 모르고 나서다가 무능함을 드러내는 것이 좋은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이번 건은 정중하게 거절을...
“후, 나도 자네에게 그쪽의 재능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네. 하지만 당장 우리만 가서는 교섭 자체가 무산될게 뻔해. 그러니 손해를 좀 보더라도 교섭 자체만 성공시키게. 그거면 충분해.”
아니 도대체 상대방이 얼마나 삐딱하게 나왔길래 저런 말까지 하는거야?
일단 거절할 상황은 아닌 것은 확실한데... 왠지 불안하다.
* * * * *
그렇게 어영부영 원치 않는 협상자리에 앉게 되었는데...
삐딱한 태도는 둘째 치고 상대방이 너무 비협조적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끼리 의견을 나눈 결과, 함께는 어렵겠습니다.”
협상의 여지가 없다는 듯이 단정적으로 말하는 가운데 아저씨의 말에 테일러의 눈꼬리가 찔끔 올라간다.
어지간히 화가 난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실컷 회담자리에 나와서 한다는 말이, ‘뭐가 부족하다’ 라거나 ‘뭐를 양보해라’가 아니라 그냥 ‘너네랑 같이 안감’ 이런 일방적인 통보이니 빡칠만 하다.
그런데 이유가 참, 뭐랄까 반박하기 조금 힘들다.
앞서 수차례 말한 것처럼, 서해 항로는 매우 위험하다.
자연 재해도 있지만, 제일 무서운 것은 아무래도 해적이다.
국가의 행정력과 치안력이 제대로 미치지 못하는 향료 제도는, 지상도 무법천지지만 바다도 마찬가지.
심지어 해적들이 숨거나 기습하기 좋은 ‘제도(섬이 많은 지역)’ 아닌가?
그런데 이 해적들도 바보 멍청이가 아닌 이상 아무 생각 없이 바다위에 둥둥 떠다니다가 지나가는 상선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다.
사전에 항구에 심어놓은 첩자를 이용해 정보를 수집하고, 필요하다면 동업자들과 공동작전을 협의하며, 항로와 시간을 계산해서 적당한 위치에 매복, 기습하는 상당히 전문적인 전략을 구사한다.
문제는 최근에 개발된 해적들의 뒷치기 전술인데, 해적들 중 일부가 우리처럼 서해 항로가 처음인 것처럼 위장하고 무장을 강화해서 선단에 합류하는 것이다.
선단에 합류한 만큼 일정을 알기도 쉽고, 기습하기도 좋다.
심지어 기습을 당하면 바로 배후에서 뒤통수를 쳐버리니, 위장 해적을 믿고 무장을 줄였던 상선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를 믿을 수 없으니 함께하지 못하겠다고 하니, 해적으로 오해받아서 억울한 것도 억울한 것이지만, 협상의 여지가 없으니 테일러로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인거다.
그래서 나도 처음에는 완전히 틀렸다고 생각했다.
누가 뭐래도 제일 중요한 것은 목숨이다.
돈 좀 더 벌어보겠다고 무장 줄이고 못 믿을 상대에게 무장을 떠넘기는 멍청한 선장이 어디 있겠는가?
......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뭔가 앞뒤가 안 맞지 않나?
그렇지. 우리를 못 믿는다면 애초에 이 자식들이 여기에 나와서 앉아있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얼굴을 보고 이야기 하는 이유는 상대방과의 의견 조율을 위한 협상을 위해서다.
협상의 여지가 없다면 그냥 사람을 보내 통보만 하면 그만이지, 굳이 이렇게 모일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굳이 이렇게 격식을 갖춰서 비싼 룸을 빌려가며 우리를 만나서 하는 말이 고작, ‘협상은 결렬입니다.’라는 한마디라고?
어떻게 하면 이 거짓말쟁이들을 엿을 먹일 수 있을까?
잠시 상황을 지켜보며 생각을 가다듬은 내가 말을 꺼냈다.
“결국 우리가 해적일지도 모르니까 불안하다는 것 아닙니까?”
이야기에 별로 참여를 하지 않아서 나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던 모양이다.
게다가 동석한 테일러나 일등 항해사 알리샤에 비하면 외모부터 한참 어려 보이니까 약간 무시한 것도 있을 터였다.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가운데 앉은 아저씨가 대표로 대답했다.
“.....으흠, 꼭 그쪽이 해적이라는 뜻은 아니오. 단지 요즘 분위기가...”
“아, 그만하시죠, 이쪽도 충분히 이해를 합니다. 그럼 이렇게 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내가 아저씨의 말을 자르고 들어가자 기분이 나쁘다는 것을 숨기지 않은 채 아저씨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것 참, 젊은 친구가 패기가 넘치는군. 말해보게.”
“우리가 앞에 서죠. 대충 30km쯤? 그 정도면 우리가 무슨 짓을 해도 충분히 대응할 수 있는 거리 아닙니까?”
앞에 앉은 선장들은 어처구니없다는 눈빛을 보내고 옆에 앉은 테일러는 당장 눈빛으로 날 때려죽일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다.
하긴, 초행이라고 함께 가달라는 사람이 앞장선다고 하면 이런 반응은 당연하다.
그리고 무려 30km다.
10노트면 상선의 순항 속도로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라고 할 수 있는데, 그 10노트로 달려도 무려 1시간 30분을 넘게 달려야 도달 가능한 거리가 30km다.
실제로 화물을 적재한 상선이 10노트가 나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니까 무조건 두 시간 거리 이상 떨어져서 움직이겠다고 한 꼴이다.
그 정도면 같은 선단이라고 보기도 힘든 거리인 셈이고, 내가 제안했지만 정말 말도 안되는 제안인 셈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앞에서 가다가 해적의 공격을 받았다고 하자.
어떻게 뒤쪽에 신호는 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날씨가 좋으면 견시대에서 30km정도 거리의 배는 보이기도 하고, 망원경을 쓰면 수기 신호나 발광신호도 주고받을 수 있을 수도 있으니까.
물론 30km나 떨어진 배랑 이렇게 신호를 주고받은 경험은 나뿐만 아니라 여기에 앉은 누구에게도 없을 것이다.
문제는 신호고 뭐고, 무슨 짓을 해도 우리 배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해적의 공격을 30분 전에 알아채고, 뒤쳐진 다른 배들이 바람의 신이라도 품은 듯이 10노트의 속도로 달려오고, 거의 자동차 수준의 선회력을 보이면서 우리가 뒤돌아서 달려도, 다른 배들과 우리 배가 합류하는 시간은 한 시간 쯤 후가 될 것이다.
아무리 해전이 천천히 진행된다고 하지만 한 시간이면 과장을 조금 더해서 해적들이 우리 배 다 털고 여유롭게 식사까지 마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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