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상선단(2)
겨우 정신을 수습한 테일러가 기가 막혀서 더듬거리며 물었다.
“자, 자네 지금... 무슨 개... 아니, 지금 제, 제정신으로...”
“아아, 부선장님 걱정마십시오. 제게 다 생각이...”
겨우 테일러를 진정시키려는데 앞에서 빈정거리는 말이 들려왔다.
“허, 앞장서서 갈 수 있을 정도면 그냥 혼자 움직이는게 낫지 않소? 굳이 왜 우리를...”
“그쪽이랑 같은 문제죠. 그쪽도 지금 해적을 막으려고 선단의 규모를 늘리는 중 아닙니까?”
빈정거리던 아저씨의 얼굴이 살짝 굳으며 침묵이 내려앉았다.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하아, 선장님들. 들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건 확실하죠. 저희의 합류를 원치 않으셨다면 굳이 여기에 세 분이 앉아있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으음...”
다시 묘한 침묵이 흐르고, 테일러는 살짝 놀라는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저희에게 얼마나 더 큰 양보를 원하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우리가 해적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앞장서죠.”
“하지만 그대들은 항로를 모른다고...”
“세상에 다 공개된 항로 따위 누가 모릅니까? 단지 한 번도 안 가본 것 뿐이죠. 그러니 경험있는 항해사 한 명만 이쪽으로 넘겨주세요.”
“항해사를 넘겨달라니! 그게 무슨...!”
해적들이 출현하는 방향은 보통 타겟으로 찍은 선박의 선수 방향이다.
그래서 우리가 해적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위해 앞에 선다고 한 것이고.
전방에서 해적이 나타나면 뒤 돌아서 같이 공격한다?
배는 사람처럼 손쉽게 방향을 바꾸지도 못하고, 가속되는 시간도 엄청 길다.
뒤로 돌리려면 시간도 엄청 걸리는데다가, 보통 선박이 순풍이 되는 방향으로 진행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뒤로 돌면 역풍이 되어버린다.
그러니 30km정도 거리라면, 선두에서 무슨 짓을 하더라도 뒤에서 대응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 된다.
“서해 항로를 항해한 경험이 있는 항해사 한 명이면 충분합니다. 30km면 선장님들의 우리 이클로나에 대한 불신을 상쇄하기에 충분한 거리 아닙니까? 그러니 항로를 잘 아는 항해사 한 명만 이클로나에 탑승시킨다면, 우리도, 선장님들도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내가 생각해도 말 같지도 않는 말을 신박한 개논리를 내새워 주장하자, 듣다 못한 오른쪽의 선장이 발끈하며 테이블을 치고 벌떡 일어섰다.
“하, 내해만 돌아다니던 촌놈이 서해 항로를 무시해?”
지금 밀리면 끝장인거다.
어차피 철판 깔았으니까 갈데까지 가보자.
“선장님, 말씀 가려서 하시죠? 그 말은 우리 선장님과 부선장님을 함께 모욕하시는겁니다. 저희가 서해 항로를 무시했다면 여러분에게 부탁을 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러자 가만히 지켜만 보던 왼쪽의 선장이 테이블을 살짝 두들겨 주의를 모은 후에 말했다.
“그만들 하지. 어린 친구가 제법이야. 눈치가 빠르군?”
“감사합니다. 아마 선장님들은 저희가 해적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고 계셨던 것 같군요.”
“뭐, 확신은 못했지만 이클로나라는 배의 최근 행적 정도는 알아볼 수 있었지.”
“그렇다면 역시...”
오른손을 들어 내 말을 저지한 그는, 시선을 테일러에게 돌려서 말을 이었다.
“부선장이라고 하셨던가? 이렇게 된 이상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젊은 친구 말대로 우리가 해적이 무서워서 선단을 늘리려는 것은 맞소. 하지만 경쟁자가 늘어나는 것은 그리 달갑지 않아. 하지만... 지금 상황이 조금 그렇군...”
“이해했소. 그럼 원하시는게 뭐요? 추가 무장?”
“아, 아, 우리도 그 정도로 염치가 없지는 않소. 한 가지만 지켜주시오. 우리가 먼저 거래하고, 그대들이 마지막에 거래하는거요. 파는 것도, 사는 것도. 받아들이겠소?”
오, 뭔가 엄청 봐주는 것 같은 말투인데, 아주 사기꾼이 따로 없구만?
가장 마지막에 거래한다는 것은 가지고 있는 상품을 가장 싸게 팔고, 매수할 물건을 가장 비싸게, 혹은 품질이 가장 안좋은 녀석을 사라는 뜻이다.
보통 상인이라면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지.
안그래도 무장을 늘려서 상품 양도 부족한데, 거기에서 나오는 수익까지 줄어들면 거의 피가 생으로 뽑혀나가는 기분일거다.
보통 상인이라면 그렇다는 뜻이다.
“말도 안되는 말씀을 하시는군요. 차라리 향료 제도로 향하는 길만 함께 하는 걸로 하시죠. 돌아오는 것은 우리가 알아서 오겠습니다. 대신 첫 기항지에서 우리는 거래를 하지 않고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그래, 테일러는 수익이야 별 상관없다고 했지만 진짜 그렇다는 것을 티를 내면 아주 골수까지 빨아먹을 놈들이 바로 상인이라는 족속들이다.
그러니 의심하지 않게 한번쯤은 튕겨줘야 한다.
갔던 길을 되돌아오는 것은 이론적으로는 가능한데, 이게 뱃길이다 보면 또 말처럼 쉽지가 않다.
게다가 무리(상선단)를 이루어도 그 위험한 길을 혼자서 돌아온다는 것은 말 그대로 그냥 자살하겠다는 말이랑 비슷한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런 상황이라면 뭐 웃돈을 주고 다른 선단에 끼어서 간다던가, 해군의 순시일정을 알아봐서 거기에 맞춰서 움직이는 편법이 있기는 하다.
물론 돈이 들고, 많은 시간을 대기해야 하며, 상품 값을 제대로 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상선에게 여러 가지 치명적인 단점이 있지만 우리는 사실 별 상관없잖아?
반대로 저쪽도 이쪽에서 어깃장을 놓기 시작하면 난감하기는 마찬가지다.
향료 제도는 말 그대로 식민지, 대농장(플랜테이션) 형태로 운영되기 때문에, 산업의 발달이 미미한 수준이다.
물론 향료 제도를 기반으로 새로운 세력이 발생하는 것을 견제하려는 대륙 국가들의 의도도 있겠지.
결론적으로 향료 제도에서 무장을 추가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는 뜻이다.
아주 없지는 않겠지만 당연히 여기에서 무장을 하는 것보다 가격이 몇 배나 비쌀 것은 굳지 경험해보지 않아도 예상할 수 있다.
그런 상황이니 우리가 떠나버리고 남은 상선들만으로 서해 항로 횡단을 한다면, 우리 못지 않게 해적들의 아주 훌륭한 먹잇감이 되는 것은 뻔한 결말이다.
여유로움을 가장해서 상대방을 스윽 둘러보니, 가운데 앉은 선장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한 것을 보니 상당히 열 받은 모양이다.
으음... 도발 수준을 조금 낮춰야겠다...
“이거야 원, 그렇게 같이 죽자는 식으로 나오면 서로 곤란하지 않겠나? 그럼 세 번만 양보를...”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세 번째 기항지 정도면 거의 막판 아닙니까? 잘해봐야 그 뒤로 한, 두 군데 항구만 더 기항하고 돌아올 것 같습니다만?”
“아닐세, 그래도 향료 제도까지 갔는데 최고의 물건을 골라야 하지 않겠나? 일곱 번, 심하면 여덟 군데 이상의 항구를 돌기도 한다네.”
딱 걸렸다. 최악일 경우 여덟 번이라는 뜻이니,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거의 다섯 번 이내로 끝난다는 소리겠지?
그리고 상식적으로, 향료 제도에 들어서서 첫 기항지가 어디겠나? 대륙에서 들고 간 물건 값 가장 잘 받을 수 있는 곳이겠지.
그럼 실질적으로 그곳에서 대부분의 물건이 처분될거다.
결국 첫 번째 기항지가 제일 중요하다는 뜻이다.
“한 번. 첫 번째 거래에서는 저희는 아무것도 안하겠습니다. 그러면 되겠습니까?”
“한 번이라니. 그건 너무 심하군. 두 번으로 하지.”
“아니, 항구 두 곳에 기항하는 동안 우리는 거래를 하지 말라구요? 그럼 파손이나 변질에 의한 손실이 상상을 초월할 것 같은데요?”
“좋네. 그럼 첫 번째는 거래 금지, 두 번째는 마지막 순번. 이렇게 하지.”
“말만 듣기 좋게 바꾼 거지, 어차피 두 번 금지랑 비슷한 것 아닙니까? 더 이상 운송이 불가능한 상품들은 어차피 그곳에서 헐값에라도 넘겨야 할테니.”
끝까지 내가 물러서지 않자, 세 선장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이내 테일러를 보더니 양해를 구했다.
“잠시 쉬었다가 진행해도 되겠소? 그쪽도 저기 젊은 친구와 의견 조율이 필요할 것 같군.”
“으음, 좋소. 그럽시다.”
“그럼 잠시 쉬었다가 돌아오겠소.”
말을 마친 선장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빠른 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그들의 발소리가 멀어지고 난 후에도 한동안 유지되던 침묵을 깬 것은 의외로 그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일등 항해사 알리샤였다.
알리샤는 40대 중반 정도의 강인한 인상의 남자였는데, 생김새나 덩치를 보면 갑판장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압도적인 외모를 자랑했다.
아리송한 느낌의 테일러와 달리 그냥 군복만 입히면 누가 봐도 군인이 될 것 같은 남자랄까?
성격도 굉장히 딱딱한 편이라, 선원들이 꽤나 어렵게 생각하는 사람 중 한명이었다.
뭐, 일등 항해사가 선원이 막 대해도 좋은 직위는 아니긴 하지.
“리안이라고 했나? 음... 정식으로 사과하지, 리안 보좌관. 앞으로 잘 부탁하겠네.”
뭐야, 이 쿨내 진동하는 사과는?
그런데 뭘 사과한거냐? 혹시 그동안 나를 같잖게 생각했던... 아니! 설마 날 보좌관이라고 생각도 안했던거야?!
알리샤가 입을 열자 의외라는 듯 시선을 보내던 테일러가 피식 웃으며 말을 받았다.
“그것 보게, 알리샤 소ㄹ, 아니 일등 항해사. 리안 보좌관은 여러모로 능력이 있는 친구야.”
“확실히... 저희가 가지지 못한 능력이 있습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허헛, 이 이야기는 그 정도로 하고... 리안 보좌관, 그런데 어떻게 알았나?”
“네? 무엇을 말입니까?”
“그들이 우리가 해적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 말이네.”
잠시 생각을 정리한 나는 차분하고 최대한 간결하게 대답하기 시작했다.
“일단 저들도 바보가 아닌데 함께 항해할 상대를 조사하지 않았다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평범한 선박이었다면 하루 만에 뭔가 알아내기 힘들었겠지만...”
“우리가 평범하지 않다? 최대한 눈에 띄지 않으려고 노력했네만...”
“부선장님, 일단 제국 국적의 상선 자체가 드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얼마 전에 나포한 해적선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하지만 그런 일이 아주 드물지는 않은... 아!”
“네, 눈치 채셨군요. 부선장님도 타국의 개입을 확신하셨지 않습니까?”
정보라는 것은 한번 돌기 시작하면 얻기 쉽다.
뭐, 상선이 해적선을 나포하는 일이 자주 있는 일은 아니라서 우리 행적을 알아내는 일이 아주 어렵지는 않았겠지만, 아무래도 다른 곳에서 이미 취급했던 정보이니만큼 난이도가 대폭 낮아졌을 터였다.
그러니까 고작 하루만에 우리의 최근 행적을 알아냈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그래, 확실히 내가 이번만큼은 사람을 잘 본 것 같군. 이제 어떻게 마무리 할 셈인가?”
한결 여유로워진 테일러가 자세를 편안하게 바꾸며 물었다.
“일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저는 교섭에 능한 사람은 아닙니다. 아마 저쪽에서 최종안을 들고 올테니, 더 이상 빼지 않고 그대로 따를 생각입니다. 이미 부선장님이 요구하신 사항은 충분히 만족한 것 같아서요.”
“좋아, 그럼 마무리는 내가 하지.”
“네, 그러는 편이 그림이 좋을겁니다.”
중요한 내용에 대한 이야기가 끝나고 쓸데없는 이야기로 잠시 시간을 보내자, 문이 열리며 선장 세 명이 나란히 들어와 우리 앞에 앉았다.
“오래 기다리셨소. 우리가 먼저 제안을 해도 되겠소?”
“들어보겠소.”
잠시 뜸을 들이던 가운데 앉은 선장이 나지막하게 마지막이 될 제안을 던졌다.
“첫 번째와 두 번째 항구에서만 세 번째로 거래해주시오. 이게 우리가 양보할 수 있는 최대요.”
선단에 참가하는 그룹이 총 4개, 제비뽑기를 해도 평균 2, 3등이니, 3등이면 정말 후한 조건이다.
물론 대충 눈치를 보아하니 우리가 마지막 순번일 것 같기는 한데... 왜냐고?
마지막 -네 번째- 순번의 그룹은 거래를 안하면 그만이잖아?
첫 항구에서 거래를 안 한 그룹은 다음에 첫 번째로 거래하게 해주면 되는거니까.
조삼모사 같은 건데... 어차피 우리에게는 그렇게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여유롭게 테일러를 보자, 슬쩍 웃으며 테일러가 대답했다.
“좋소. 그렇게 합시다.”
별다른 고민도 없이 테일러가 교섭을 마무리 짓자, 마주앉은 선장들의 표정이 기묘하게 구겨지는 것이 아주 보기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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