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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31화 (31/420)

<31화> 메를리오네

별다른 잡음 없이 교섭이 끝나고, 왠지 나는 더 바빠졌다.

먼저 교섭이 인상적이었는지 테일러가 나를 임시 회계사로 임명(선장이 공석이 되면서 자동적으로 테일러가 선장이 되었다)하고, 상품 구매를 맡겨버렸다.

선임자도 없이 진짜 교역소를 발발 기다시피 하며 구매 계약을 체결하고 돌아오니, 기다렸다는 듯이 포대 개조 발주에 나를 데리고 갔다.

...왜 내가 가야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게 타의에 의해 마지막(?)일지도 모를 휴가를 반납하고 포대 개조를 감독하다가 이번에 합류하게 된 메를리오네를 방문했다.

메를리오네는 외관만 봐서는 이클로나와 쌍둥이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비슷한 플로디엄급 상선이었는데, 포대가 없다는 것만 달랐다.

“어, 선장님? 포대가 전혀 없네요?”

“대포는 가지고 왔네. 다만 몇 가지 정치적인 문제 때문에 포갑판을 따로 만들지 않았을 뿐이지.”

“아, 어차피 이번에 개장을 해야하니...”

“저기 오는군. 인사하지, 이번에 합류한 메를리오네의 선장을 맡은 펠리엔 중령, 아니 선장일세.”

메를리오네에서 내려 빠른 걸음으로 다가온 중년의 남자가 테일러에게 절도 있게 인사를 하더니 곧 내게 시선을 돌렸다.

“그쪽이 리안...보좌관? 이야기는 많이 들었소. 반갑소, 메를리오네의 선장, 펠리엔이오.”

“아, 네, 펠리엔 선장님.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지금까지 쭉 지켜본 바에 의하면 서해 항로를 항해한 경험을 가진 유능한 인력을 가지는 것은 몰로스 제국의 국가단위 프로젝트다.

이번뿐만이 아니라 이전에도 몇 번 시도가 있었던 것 같은데 죄다 다른 나라들의 정치적, 물리적 방해로 망한 모양이다.

상황이 그렇다보니 이번에는 제국에서 꽤나 절치부심한 모양.

그러니까 테일러를 필두로 하는 이번 항해에 포함되는 인력이라면 이후 해군 창설에 주요 멤버가 될 확률이 높다는 뜻이다.

음... 구구절절 말이 많았지만 그냥 앞으로 친하게 지내면 좋은 사람이라는 거다.

내가 어떻게 펠리엔과 친해질 수 있을지를 생각하며 찬찬히 그를 관찰하고 있는데, 그는 이내 테일러를 향하더니 약간 걱정을 담아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선배님, 괜찮으시겠습니까? 여기 이 친구라도 데리고 가시지요.”

그러자 펠리엔 뒤에서 조용히 서 있던 남자가 한발 앞으로 나오며 꾸벅 인사를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번에 메를리오네의 부선장으로 임명된 오엔입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흐음? 이 친구는 처음 보는군?”

“네, 개인적인 문제가 있어서 어제 합류했습니다. 본국에서 꽤나 인정받는 인재입니다. 선배님이 부리시기에 나쁘지 않을겁니다.”

“아, 아, 물론 펠리엔 자네의 마음은 잘 알겠네. 하지만 아무리 나라도 본국의 인사권을 함부로 건드리고 싶지는 않아. 게다가 필수적인 것도 아니고 말이야. 전에 말한 대로 나는 여기 리안 보좌관으로 충분하네.”

테일러가 나를 그렇게 높게 봐주니까 뭔가 좀 민망하고 그렇다.

그런데 다른 두 사람의 눈빛이 영 마음에 안드는데?

이제 30대 초중반 정도로 보이는 오엔이라는 녀석은 눈썹에 힘 잔뜩 들어간게 딱 봐도 날 무시하고 있었고, 펠리엔도 뭔가 미심쩍다는 표정이다.

“하지만...”

펠리엔이 미련이 남은 듯 내게 시선을 거두고 말을 꺼냈지만, 이번에는 테일러가 빠르게 잘랐다.

“이 이야기는 그만하지. 목이 마르군, 들어가서 포갑판 개장 문제를 논의하는 것은 어떤가?”

“네! 그럼 모시겠습니다.”

어정쩡한 인사가 끝나고 우리는 메를리오네의 선장실로 들어갔다.

선장실에 대한 첫 느낌은... 역시 선장실은 좋다...!

그동안 진짜 좋다고 생각했던 부선장실 따위는 단번에 창고 수준으로 만들어버리는 퀄리티를 자랑한다.

제대로 된 침대에 티 테이블도 있고, 회의용인지 6인용 식탁도 있다.

커다란 책상에, 책장도 여러 개 있고, 배라는 공간에서는 최고의 사치라고 할 수 있는 그림이 있는 액자, 장식대 위의 장식품도 있다.

모든 공간이 극단적인 효율성을 강조하기에, 솔직히 좀 궁색해 보이는 배라는 곳에서 이런 장소가 있을 수 있나 싶다.

그렇게 넋을 놓고 감탄하고 있는데, 테일러의 목소리가 나를 현실로 불러왔다.

“리안 보좌관? 그만하고 이리 와서 앉지.”

머슥해진 표정으로 재빨리 자리에 앉자, 포갑판 개장에 대한 이야기가 바로... 결정되었다.

“어차피 자네들도 이런 일은 해본적이 없을테니, 포갑판은 여기 리안 보좌관에게 맡기도록 하지.”

“네? 부선장, 아니 선장님! 갑자기 왜 제가...?”

“여기 펠리엔을 포함해서 메를리오네의 선원들이 부족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네. 하지만 이번 일에 관해서 만큼은 방금 전에 똑같은 일을 했던 자네만큼은 아닐 거야. 그러니 자네가 진두지휘하고, 메를리오네쪽 인원들은 일을 보조하면서 배우는 것으로 하세.”

“으음... 선배님 말씀이 맞습니다. 리안 보좌관, 부탁하지.”

이렇게 되면 빼도 박도 못하는거다.

두 선장이 그렇게 하라면 하는 거지,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뭔가 일이 점점 늘어가는 상황에 영혼이 탈탈 털려나가는 느낌이었지만 자리가 자리인 만큼 자세를 흐트러뜨릴 수도 없었다.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두 사람은 쉬지 않고 다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리고 다른 선장들의 요청대로 우리는 선단의 선두와 후미에 나눠서 배치될걸세. 내 생각에는 이클로나가 선두에 서는게 좋을 것 같네만.”

“으음, 선배님. 죄송하지만 만약 해적과 조우한다면 선두의 선박은 상당히 위험해집니다. 특히나 이클로나와 메를리오네의 무장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이클로나는 개전과 동시에 상당한 포화에 노출될 겁니다.”

펠리엔의 지적은 정확했다.

일반적으로 해적들은 정면이나 정면에 가까운 측면에서 치고 들어오니까 선두의 선박은 확실히 위험하다.

특히나 가장 믿을만하고 강력한 아군인 이클로나 혹은 메를리오네가 선단의 최후미에 있다면, 제대로 된 지원도 받지 못하고 털릴 가능성도 있다.

심지어 내가 제시한 30km는 아니지만 선두 선박은 대열보다 10km 앞에서 선행하기로 합의되어있다.

“그래, 자네 말이 맞아. 특히나 선두가 대열보다 좀 더 앞에서 나가는 상황이라면 더 위험하지. 하지만 말이야...”

“그렇다면 메를리오네가 선두에 서겠습니다. 선배님이 위험을 감수하실 필요가...”

“있네! 내가 위험을 감수해야지! 실무에서 물러서서 뒤를 봐주는 것은 에스페른 각하로 충분하네. 자네도 알다시피 나조차도 장거리 항해에 대한 경험은 일천하네. 그런데 벌써부터 몸을 사린다고?”

갑자기 언성을 높여서 열변을 토하는 테일러는 온 몸에서 열정과 분노를 내뿜었다.

“어차피 우리의 목표는 북부 항로를 개척해서 노던테라를 향하는 길을 여는 것일세. 이를 바탕으로 일레드를 제압하는 것은 다음 이야기지. 그런데 고작 안전한 서해 항로의 선두에 서는 것을 두려워해서 어쩌겠나! 특히나 이번에 선두 선박에 경험 많은 항해사가 동승하기로 했으니 그에게서 최대한 많은 것을 얻어내야 하네.”

잠자코 듣고있던 펠리엔이 우려를 가득 담아 다시 권했다.

“선배님,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경험을 위해 굳이 위험한 선두에 서실 필요는 없는 것 아닙니까? 선단의 뒤에 서더라도 어차피 서해 항로를 가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달라. 앞서가는 배의 꽁무니만 따라가는 것과 직접 항로를 잡는 것이 어떻게 같을 수가 있는가? 그리고 내가 몸을 사리기 시작하면 부하들도 하나씩 몸을 사릴 거고, 그렇게 되면 이전의 실패를 되풀이 할 뿐이네.”

“선배님...”

“펠리엔.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라. 앞으로 20년, 아니 10년만 지나도 우리는 일레드에 손을 댈 엄두도 못내게 될걸세.”

“우려가 과하십니다! 아무리 일레드라도 고작 10년으로 어찌 본국을 앞지르겠습니까?”

“굳이 앞지르지 않아도 되네. 일레드에는 충분히 강력한 동맹들이 있잖은가? 심지어 최근에 프레티아까지 집어삼켰지.”

“프레티아라면 이미 본국에... 아닙니다.”

펠리엔이 무엇인가 말을 하려다 얼버무리자, 입을 다문채 무서운 눈으로 펠리엔을 노려보던 테일러가 가벼운 한숨과 함께 마무리를 지었다.

“휴, 자네는 흥분하면 말을 함부로 하는 그 버릇을 고쳐야 할거야. 조심하게.”

“죄송합니다, 선배님.”

“됐네, 그건 그쯤하고... 내 결심은 확고하네.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이번 일은 성사시켜야 해. 본국의 흥망이 걸린 문제일세.”

“...따르겠습니다.”

“그리고 말이야, 내가 고작 해적 따위에게 패해서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나저나 프레티아라...

일전에 왕녀님 사건 때문에 본의 아니게 자세하게 알게 된 나라다.

정권을 차지했다는 2왕자의 배후에 일레드가 있는게 확실한 모양이다.

권력이 도대체 뭐길래 자기 가족을 죽이고 나라를 팔아먹어 가면서까지 손에 쥐려고 아등바등하는지 모르겠다.

쥐꼬리만한 권력이라도 쥐어 본적이 있어야지...

그러고보니 왕녀님 소식은 이후로도 한 번도 못들은 것 같다.

잡히지는 않은 것 같은데... 잘 살고 있으려나?

하나 더, 노던테라.

예전에 테일러에게 이야기를 들은 이후에 조금씩 정보를 수집해 봤는데, 내가 테일러의 이야기에 넘어간 것인지 몰라도 진짜일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사실 이 세상이 지구처럼 구형이라는 가정하에(여러가지 상황을 봤을 때 구형이 맞는 것 같기는 하다) 누군가가 세계일주를 마치고 세계지도를 완성하지 않는 이상 신대륙이 발견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전생의 지구에서도 호주가 발견되는 17세기까지 남반구에는 대륙이 없는 줄 알았다고 하니까  이 세계도 북쪽에 대륙이 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결정적인 이유로 꼽은 것이 바로 모피와 목재였다.

다른 것은 몰라도 모피는 그 동물이 살아가는 환경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목재 역시 건조 방법이나 처리 방법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나무의 종류와 생장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그런데 지금까지 알아본 결과 일레드의 상단이 취급하는 최고급 모피는 다른 나라와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이 정론이었고, 일레드의 군함들은 내구성이 기이할 정도로 높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런데 이 대륙은 7개나 되는 국가가 있지만 거의 대부분 생활양식이나 식생이 비슷비슷하다.

유일하게 다른 곳이라면 제국 남단에 위치한다는 대사막 정도일텐데, 거기는 사람이 아예 안산다고 한다.

대사막 아래에 뭐가 있는지도 모른다니 말 다했지 뭐.

그렇다면 일레드의 최고급 모피와 기이할 정도로 질긴 선박 건조용 목재는 도대체 어디서 난 것일까?

그게 소문의 북부 대륙, 노던테라라고 하면 많은 부분이 맞아 떨어진다.

테일러는 진짜 저 노던테라를 찾아 낼 생각인 모양인데, 실존 여부를 떠나서 무조건 목숨을 건 항해가 될 것 같다.

한 열흘 정도 가서 쉽게 발견될 거리였다면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았을 리가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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