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이등 항해사 볼라트
작지만 그나마 제대로 프레임이 짜여진 침대와 손바닥만한 티 테이블 하나, 그리고 뚱뚱한 사람은 앉지도 못할 작은 의자 두 개.
아, 작지만 책장이 딸린 책상이랑 의자도 있다.
가로세로 각 3m정도는 되려나? 비록 전생의 고시원 저리가라 할 정도로 작은 방이긴 하지만 무려 내 방이다.
내 방! 개인실! 나만의 공간! 이 얼마나 멋진 말인가?!
쥐뿔도 없는 어부 아버지 아래에서 정신을 차리고 전생의 기억을 놓지 못해 아등바등 대다가 결국 현실에 수긍하고 선원으로 일한지 벌써 6년차...
그래봐야 고작 스물네살이다.
항해학교 출신도 아닌 일반 선원 출신으로 내 나이에 개인실을 받는 건 거의 최초 아닐까?
당연히 정상적으로 받은 것은 아니고, 우리 배에 회계사가 없어지고 내가 임시 회계사를 맡다보니 회계사의 개인실이 넘어온거다.
똑! 똑! 똑!
“리안 보좌관님, 잠깐 괜찮으세요?”
“어? 볼라트 항해사님? 들어오세요!”
항해사 볼라트는 항로 안내를 위해 우리 배에 임시 승선한 항해사다.
원래 선단의 기함이라고 할 수 있는 힐레아테의 이등 항해사였다고 하는데, 성격도 서글서글하고 친절한 사람이다.
원래 나랑 굉장히 불편한 사이가 될 수도 있었는데, 나보다 개인실 배정 순위가 높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원래 이 방의 주인이 될 수도 있었던 사람이라는 뜻이지.
다행히 우리 쪽 이등 항해사 한 명이 메릴리오네로 옮기면서 방이 하나 비어서 이 방을 양보하는 거지같은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전에 부탁하신 책이 이거 맞나요?”
볼라트는 문을 열고 들어와서는 예의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들고 온 책을 건네주었다.
“아... 이렇게 이런 책을 막 빌려주셔도 괜찮으세요?”
“하하, 별말씀을요. 구하려면 시장에서도 구할 수 있을걸요?”
아니, 거짓말이다.
애초에 서점이 있는 시장 자체가 드물다.
있더라도 서점들은 보통 고급 주택가 근처에 따로 세워지곤 한다.
문자를 아는 사람이 전체 인구의 10%가 될까 말까 하는 세상에 인쇄업이 발달할 이유도 없고, 그래서 책은 구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고가다.
당연히 서점의 주 고객층도 상류층 또는 돈 좀 있는 부유층이다 보니 유동인구의 90% 이상이 없는 자들인 시장에 있을 이유가 없는 거다.
그리고 삶의 여유가 생기고 나서 몇 번 방문한 서점에서도 전문 서적은 본적도 없다.
문자뿐만 아니라 정보와 지식에 대한 폐쇄성은 상상을 초월하는 곳이 이곳이니까.
“매번 감사해요, 다음에 제가 거하게 한번 쏘겠습니다.”
“거 참, 민망하게 후훗, 그래도 굳이 사시겠다면 고맙게 얻어먹겠습니다.”
“그런데 출발하기 전에 긴장했던게 무색하게 되게 평온하네요?”
“뭐, 그럴 수 밖에요...”
너무 잘해줘서 조금 의심스럽기는 한데, 확실히 볼라트는 경험이 많아서 도움이 된다.
빌려주는 책 뿐만이라도 이렇게 가끔 몇 분 정도 수다를 떨면서도 얻는 정보가 적지 않다.
항해가 시작되고 테일러의 혹독한 훈련(?)도 시작되었는데, 그는 애초에 나를 항해사로 키우겠다고 내게 대놓고 말했다.
뭐, 항해학교 출신이 아니고 이렇게 도제관계식으로 항해사가 되는 경우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 타던 배를 내리면 경력을 인정받기 힘들다.
그래도 뭔가 내 인생을 한 등급 업그레이드 시킬 수 있는 기회를 잡은 것 같아서 죽을힘을 다해 공부하는 중이다.
그런 와중에 볼라트가 이런저런 도움을 주니 고맙지 않다면 사람도 아니지.
볼라트의 말에 의하면 지금 당장은 바다도 잔잔한 편이고 해적도 없다고 한다.
대륙에서 향료 제도까지 직항으로 항해하는 것은 위험한 것은 둘째 치고 식료품을 한 번에 많이 실어야 해서 가지고 움직일 수 있는 상품의 양도 대폭 줄어든다.
그래서 서해 항로를 따라 향료 제도를 향하려면 보통 중간에 두 곳을 들러야 하는데, 첫 번째가 마다카트 섬, 두 번째가 푸에리오다 제도의 파난 항구이다.
전생으로 말하면 태평양 한가운데의 하와이 제도나 대서양의 아조레스 제도 정도의 느낌으로 보면 되겠다.
첫 번째 기항지인 마다카트 섬에서 푸에리오다 제도로 가는 길은 폭풍도 자주 오고, 제도에 숨은 해적들도 제법 있다고 한다.
믿기 힘든데... 바다 괴물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푸에리오다의 파난 항구에서 향료 제도로 향하는 길은 여울에, 암초에, 바글바글한 해적까지... 최악의 난코스라고 한다.
향료 제도에 가까워질수록 해적이 기승을 부리는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가 싣고 있는 상품은 다 대륙에서 사온 것이고, 향료 제도에 가까울수록 처분하기도 쉽고 가격도 더 받을 수 있기 때문.
반대로 우리가 귀환할 때는 대륙에 도착하기 전이 가장 위험한 상황이라고 한다.
향료 제도에서 사온 상품들은 말 그대로 인생역전이 가능한 금액으로 처분이 가능하니 말이다.
“어? 그런데 못보던 것이네요?”
“아, 저건...”
볼라트의 시선이 향한 곳은 침대의 밑이었다.
그 곳에는 단단한 나무 손잡이가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아, 잘 숨긴다고 했는데 왜 튀어나온거야?
아무래도 배가 흔들리면서 천천히 밀려나온 모양인데...
“처음 보는 형태인데... 한 번 봐도 되죠?”
“아, 그럼요~ 보세요.”
그러자 기쁜 표정으로 한달음에 침대 근처로 이동한 볼라트가 허리를 굽혀 나무 손잡이를 잡고 들어올렸다.
그의 손길에 따라 몸체가 묵직하게 딸려 올라오며 그 모습을 드러냈다.
석궁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쇠뇌 또는 크로스 보우라고 부르는 편이 맞겠지.
오늘 아침에 뜬금없이 나타난 전생(?)의 물건이다.
“와우, 제가 이쪽 전문가는 아니지만 딱 봐도 정말 정교하게 만들어진 물건인데요? 도대체 어디서 구하신 겁니까?”
“아... 그, 그게...”
내가 전생의 기억이 돌아오면서 가끔 나타나는 다른 세상의 물건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랬다가는 단번에 미친놈 취급을 받을게 분명하니까.
하지만 얼른 변명을 생각하기도 난감한 것이, 보통 선원들이 기본적으로 자기가 쓰는 칼이나 단검 정도를 개인적으로 구비할 뿐, 비싼 활이나 석궁같은 장거리 무기를 갖추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솔직하게 말하면 한 번도 본적이 없다.
“하하하, 혹시 그쪽 루트로 구하셨어요?”
“네? 그게 무슨...?”
“아시잖아요, 그, 뒷골목?”
“아, 아, 네, 네!”
나를 보고 피식 웃은 그는 한참동안 석궁을 이리 저리 만져보더니 다시 침대 밑으로 곱게 넣은 뒤 일어섰다.
“장물이나 밀수 그런게 대놓고 언급 할 일은 아니지만 우리끼리 뭐 어때요? 다들 알고 있는데요 뭐.”
“그래도 좀 민망하네요.”
“정말 걱정이 많으셨나봐요? 이런 것까지 준비하시고. 아무리 장물이라도 상당히 비싸게 주셨을 것 같은데... 명품같아요.”
“네, 네... 어렵게 구했죠...”
랜덤 박스에서 뽑은 꼴이니까 어렵게 구한 것은 맞다.
“가능하면 이번에는 피 튀는 전투는 좀 없었으면 좋겠네요.”
“해적은 자주 만나나요?”
“운이 좋다면 가는 길이나 오는 길 한 번 정도는 해적을 안만나기도 하는데... 둘 다 안만나기는 좀 힘들죠? 그리고 재수 없으면 서너번 습격당하기도 하고... 어휴, 저는 싸움은 영 안맞아서 힘들어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옷 위로 두드러지는 볼라트의 근육은 그의 실력이 만만치 않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긴, 배의 인원 중에 가장 샌님 이미지가 강한 회계사나 선의조차도 칼을 못 쓰는 사람이 드문데, 항해사씩이나 되는 양반이 평범한 실력일 리가 없다.
“그런데 마지막에 합류한 저기...뭐더라, 알레몬?”
“엘리아몬 호요?”
“네, 좀... 과무장 아닌가요?”
“아... 조금 그렇죠? 그런데 저기 선장님이 작년인가? 해적한테 털려서 이번에 겨우 재기했다고 하더라구요. 아마 트라우마 같은게 남았지 않을까요?”
“그럴수도 있지만...”
“에이, 걱정 마세요. 선장님들이 이미 다 확인하셨으니까. 그리고 여기 이클로나랑 메를리오네로는 화력이 조금 부족하긴 했어요.”
“다른 배들은요?”
인상을 살짝 찡그리며 잠시 고민하던 볼라트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음...힐레아테는 포를 다룰 수 있는 선원도 있고 그나마 괜찮은 전력이기는 한데... 나머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대포도 대부분 구형이라서... 그런데 제 경험으로 볼 때, 웬만큼 유리한 상황이 아니면 저런 배들은 보통 도망만 다닙니다. 웃기는게 이탈해서 완전히 떨어져 나가지는 못해요. 혼자서는 움직일 배짱이 없으니까.”
“하... 그럼 만약에 그렇게 도망다니다가 다른 배들이 다 항복하거나 나포되면요?”
“그때쯤 되면 혼자서라도 도망가기도 하는데... 사실 그 정도 상황이 되기 전에 기동력이 많이 떨어지거나 나포되죠.”
“어리석네요, 그래도 같이 싸우는 편이 이길 확률이 높을텐데.”
“하하하, 저들에게는 ‘승리’보다는 당장 ‘살아남는’ 것이 더 중요하니까요.”
원래 선단의 구성은 우리까지 총 5척으로 이루어질 예정이었지만, 막판에 엘리아몬이라는 1000톤쯤 되어 보이는 대형 선박이 합류했다.
다른 배들이 이클로나나 메를리오네 같은 500~700톤 수준의 중형 상선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비교적 대형 선박인 것이 맞다.
물론 대형 상단이나 국가에서 운용하는 1000톤을 초과하는 초대형 수송 선박이나 본격적으로 군용으로 제작되는 각 국의 1, 2급 전투함들에 비하면 빈약해 보일수도 있지만, 개인이 가지기에는 충분히 큰 선박이었다.
무장도 상선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을 정도다.
양 현의 포대에 각 10문씩, 대포를 20문이나 장착했고, 소구경이지만 선수와 선미포도 장착한 것으로 보인다. 선원도 다른 선박들의 두 배쯤 채워서 상품은 우리보다 적게 실은 모양인데, 다른 선박들이 수익금 일부를 나누어 주기로 하고 합류시킨 모양이다.
무장도 그렇고 승선 인원이나 선단 내에서 대우도 그렇고, 사실상 우리 같은 무장상선이라기보다는 용병호위함으로 합류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지금 엘리아몬은 선단의 약간 바깥쪽을 항해하면서 좌우 경계를 맡고 있다.
지금이 항로 중 가장 안전한 상태라고 하는데, 사주경계까지 해야하다니...
아직 아무 일이 없는데도 자꾸 불안해진다.
그리고 솔직하게 말해서 엘리아몬이 영 의심스럽다.
우리는 그렇게 의심했으면서 엘리아몬은 왜 그렇게 쉽게 받아들였는지는 모르겠는데, 엘리아몬의 선장이라는 사람의 이력부터 좀 이상하지 않나?
볼라트가 말하기를 한번 망했다가 재기했다고 했는데, 어떻게 재기를 했는지 몰라도 한번 망한 상인이 갖추기에는 너무 큰 배고, 과무장이다.
대포가 무슨 애들 과자 값도 아니고, 당연히 선원도 저렇게 많이 고용하면 상선으로서는 치명적인 손해로 돌아온다.
아무리 배가 조금 더 크다고는 하지만 우리 배의 두 배가 넘는 인원이라니, 갤리선도 아니고 너무 과하잖아?
혹시라도 전투가 벌어지면 솔직히 다른 것보다 엘리아몬을 주의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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