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폭풍 전야
특별할 것이 없는 항해였다.
해적으로 의심되는 선박들이 두어번 접근하기도 하고, 파도가 조금 높아지거나 먹구름이 끼기도 했지만, 그 정도는 그냥 늘 상 있는 일이다.
게다가 보좌관으로 자리가 거의 잡힌 이후로는 사실상 선원일을 거의 놓다시피 해서 딱 정해진 ‘할 일’은 없어서 더욱 시간이 남았다.
다만 그 남은 시간을 테일러가 시키는 ‘훈련’ 또는 '공부'에 모조리 할애하다보니 선원일을 할 때처럼 육체적인 피로가 쌓이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피로가 급격하게 쌓여갔다.
그리고 이 배에서 정신적으로 피곤한 사람은 나밖에 없는 것 같다.
문이 노크도 없이 벌컥 열리며 인영 하나가 구르듯이 방으로 들어왔다.
“리안~ 오늘도 이상한 공부해?”
“이상한 공부가 아니야, 우르타. 너도 해야한다니까?”
“싫어! 공부는 질색이라고...”
우르타가 멋대로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우르타와 네이선도 아주 평범한 선원들처럼 글을 몰랐다.
그래서 최근 들어 ‘동료’라는 생각이 들면서 조금씩 가르쳐 보려고 하고 있는데, 영 쉽지가 않다.
전생을 살면서 깨달은... 음, 문명사회에 살면 대부분 깨닫는 것이지만 문자의 취득 여부는 개개인의 가능성을 극단적으로 열고 닫는 키가 된다.
전생에서의 과거 기득권들도 그랬고, 지금 세상의 기득권들도 그런 이유에서인지 평민들에게 문자를 익히는 것을 권하지 않는다.
이 세계 문자체계의 악랄함을 보니, 어쩌면 누구나 쉽게 익히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도 있는 것 같다.
사람이 문자를 익히면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
사고의 확장, 지식의 공유, 시공을 초월한 의사소통... 하지만 이 시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문자는 그저 있는 자들의 요상한 취미일 뿐이다.
전생에서의 중세 유럽처럼 글을 모르는 귀족이 있는 수준은 아니지만, 평민들 중에는 문자를 익히는 경우가 매우 드물었다.
그나마 네이선은 인상을 팍팍 구기면서도 꾸역꾸역 조금씩 익히는 모양인데, 우르타는 뭘 좀 가르치려고 하면 일단 내빼는게 일상이다.
“어휴, 우르타! 말했잖아... 최소한 문자는 알아야 어디 가서 멍청하다는 소리는 안 듣는다니까?”
“걱정마! 지금도 안 들어.”
응, 그건 내가 말을 안 해서 그래...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내저은 나는 용건을 물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야? 그리고 방에 들어올 때는 노크를 하라니까.”
“아! 리안 못 들었어?! 섬이 보여! 그, 그, 뭐였지?”
“마다카트 섬?”
“어! 마라가쓰 섬!”
“아니 마다카트...”
“응! 마라가트!”
“됐다. 말을 말자... 오늘이 며칠째지? 나가보자.”
“음, 9일? 아마 그럴걸?”
나는 읽고 있던 각 해역의 조류에 관한 전문 서적을 덮고 우르타와 함께 갑판위로 나섰다.
얼마나 앉아있었는지 온 몸이 찌뿌둥하다.
살짝 기지개를 켜고 발을 놀려 선수 쪽으로 가자, 할 일없는 선원들 십여명이 모여서 웅성거리는 것이 보였다.
대충 사람들을 슬쩍 밀치며 앞으로 나오는데, 내 얼굴을 확인하고는 슬쩍슬쩍 몸을 비켜주는 것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예전 선원이었을 때였다면 대번에 인상을 찌푸리며 욕부터 박고 시작했을 놈들이 조용히 투덜거리기만 하고 자리를 비켜준다.
이제 선장이 된 테일러가 계속 끼고 도니까 내게도 어느새 권위라는 것이 생긴 것이다.
대중으로부터의 박리, 다수로부터 ‘나와 다른 사람’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면 그게 계급이 되고, 특별한 소수의 계급은 권위가 생기며, 결국 권력이라는 무형의 힘을 가지게 된다.
비록 호가호위에 불과한 권위와 권력일지라도, 가짜도 계속되면 어느새 진짜와 비슷해지는 것이다.
우르타와 함께 제일 앞으로 나서자, 저 멀리 수평선 뒤로 볼록 솟은 땅덩어리 하나가 보인다.
날씨가 너무 맑은걸 보니 거리는 좀 되겠다.
오늘 입항할 수 있으려나?
“잘하면 저녁쯤에는 입항하겠는데?”
“아니요, 해가지면 해상에서 정박할겁니다.”
갑자기 들려오는 대답에 고개를 돌리자, 볼라트가 어느새 내 옆에 서 있었다.
“아, 볼라트 항해사님! 다 왔는데... 굳이 바다 위에서요? 어차피 밤에도 항구에서 불빛 정도는 나올 것 아닙니까?”
“으음, 일단 우리가 선단의 너무 앞쪽에 있어서 다른 선박들이 함께하기에는 시간이 조금 부족하기도 하구요, 항구 근방에 가면 암초 지대가 몇 군데 있습니다. 숙련된 선원들이라면 몰라도... 저 혼자서는 자칫 큰 사고가 날지도 모르니까요.”
하긴, 암초라면 야간 항해는 위험하기는 하지.
어차피 섬 근처라면 경비함대도 있을 테니까 위험하지는 않을 거다.
“암초라면 어쩔 수 없죠. 배위에서 하루 더 있어야 한다니 짜증나기는 하지만... 그래도 오늘은 편하게 쉬겠네요.”
일부러 쾌활함을 가장해서 큰 목소리로 말하고 볼라트를 보는데, 표정이 영 시원치 않았다.
“아, 그, 그렇죠. 아 참, 리안 보좌관님 전에 드린 책 때문에 말씀 드릴게 있는데... 잠시 자리 좀 옮기실까요?”
“네? 네, 그러시죠. 제 방으로 가실까요?”
나도 나름 눈치가 빠르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어딘지 어색한 표정과 뜬금없는 볼라트의 말에 심상치 않은 기색을 읽은 나는 빠르게 임기응변으로 대응하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나와 우르타, 그리고 볼라트까지 내 방에 들어오니 방이 비좁은 느낌이다.
우르타는 자기가 왜 여기에 있어야 하는지 이해가 안되는 표정으로 멀뚱멀뚱 서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도 우르타가 여기에 왜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이제 와서 나가라고 말하기는 민망하니까 그냥 넘어가자.
의자에 적당히 걸터앉은 나는 맞은편의 볼라트를 보며 물었다.
“항해사님, 뭔가 있습니까? 표정이...”
“아, 이미 선장님께도 말씀드리기는 했는데 보좌관님도 아셔야할 것 같아서요.”
“뭡니까?”
“사실 마다카트 섬 근처에는 해적이 많습니다.”
“네? 아니, 마다카트는 쿠샤 왕국군이 주둔하는 곳 아닙니까?”
“정확하게 말하자면, 육군만 주둔하고 있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섬에 육군만 주둔을 한다구요?”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바다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여진 섬이다.
‘군대가 주둔한다’ 라고 하면 당연히 해군을 생각하지, 누구도 육군을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육군‘도’ 있을 수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해군이 주둔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상이잖아?
“후우, 아시다시피 쿠샤 왕국의 힘이 예전같지 않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사실상 서해 항로의 해군력만 겨우 유지하는 수준이죠. 이곳을 잃으면 나라 자체가 망할 판이니까요. 덕분에 조금 중요도가 떨어지는 지역에 대한 지배권이나 통제권은 거의 잃은 상태입니다. 마다카트 섬도 마찬가지죠.”
“하지만 마다카트는 서해 항로의 중간 기항지로 중요한 곳이지 않습니까?”
“네, 그래서 육군이 주둔합니다. 대규모 원정군이 오기가 힘든 곳이니 적당한 수의 육군만 주둔시켜도 섬을 지키는데는 문제가 없으니까요.”
하긴, 마다카트까지 원정군을 파견하는 것은... 어렵기는 하겠다.
덕분에 국력이 크게 쇠퇴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쿠샤가 서해 항로에 강력한 점유율을 유지하는 것이기도 하고...
“그렇다면...”
“네, 그들이 지키는 것은 섬입니다. 바다가 아니죠. 마다카트가 근처라고 해서 방심했다가는 해적들의 좋은 먹잇감이 될겁니다.”
“해적들이 이곳까지 출몰한다구요? 아무리 그래도 정규군이 있는 곳인데...”
“해적들이 스스로 해적이라고 광고라도 하고 다니겠습니까? 사실 쿠샤 왕국측에서 일부러 방치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해적들도 쿠샤 왕국 국적 선박은 잘 안건드리거든요.”
“그래도...”
“가끔 쿠샤 왕립 1함대가 방문하기는 하지만, 마다카트에 상시 주둔하는 해군이 없다는 것 정도는 비밀도 아니죠. 그러니 항구 앞에서 약탈을 하더라도 제지할 방법이 없다는 것쯤은, 해적들도 알고 있습니다.”
“제기랄, 오늘도 편하게 자기는 틀렸군요.”
“섬에 정박한 선박 중에 절반은 해적선일지도 모릅니다... 아, 그리고 우르타라고 했나?”
말끝을 흐린 볼라트는 갑자기 시선을 돌려 우르타를 보았다.
내 침대에 반쯤 걸터앉아서 지겨운 표정을 짓고 있다가 갑작스런 지명에 깜짝 놀란 우르타가 벌떡 일어서며 대답했다.
“엑! 네?! 네, 네, 볼라트 항해사님.”
“긴장할 필요는 없고, 이 배에서 눈이 제일 좋다지?”
“뭐... 그렇죠?”
“오늘 밤에 견시 좀 부탁하지. 선장님께도 이미 양해를 구했네. 견시가 중요하니까 해가 지기 전까지 미리 쉬어도 좋아.”
“네에... 그럼 전 이만. 리안 난 갈게.”
“아, 우르타 잘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우르타는 재빨리 문을 열고 사라졌고, 내 방은 침묵에 잠겼다.
음... 조금 어색하구만?
알다시피 우르타와 네이선, 그리고 친한 몇몇 선원들은 나에게 존칭을 쓰지는 않는다.
반대로 이번에 새로 편입된 녀석들 같은 안 친한 놈들은 당연히 존칭을 쓴다.
그들에게 나는 운 좋게 한자리 꿰찬 ‘옛 동료’가 아니라 자신들이 배를 탈 때부터 원래 ‘높으신’ 보좌관님이라 그렇다.
그리고 나와 서열관계가 애매한 볼라트는 적당히 상호 존칭을 하고 있다.
그런데 볼라트는 명실공히 선원에 불과한 우르타나 네이선들보다 상급자다.
그러다보니 이렇게 서로 간에 대화가 어색해지는 경우가 종종 있곤 하다.
우르타가 뛰듯이 방을 나가며 남기고 간 어색한 침묵은 어렵게 꺼낸 내 질문으로 겨우 내 방을 빠져나갔다.
“저, 항해사님은 오늘 밤에 해적들이 습격하리라고 보십니까?”
“글쎄요, 습격을 할지 안할지는 몰라도... 일단 찔러는 보지 않을까요? 그래서 우르타라는 친구에게 부탁한겁니다. 한밤중에 접근하는 선박이라면 호의를 가졌을 리가 없으니까요. 일찍 발견할 수만 있다면 대응이 편해질겁니다.”
하긴 정박 상태에서 기습을 당하면 일방적으로 얻어맞는 수밖에 없다.
정박한 배가 다시 제대로 움직이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한데, 그 동안 상대가 기다려 줄 리도 없으니, 재수 없으면 움직여 보지도 못하고 쳐맞기만 하다가 패배할 확률도 높다.
그리고 우리 선단 자체가 세 척에 무장을 거의 올인한 상태라, 세 척 중에 한 척만 전투불능이 되어도 전투력이 확 떨어진다.
아무래도 오늘은 곱게 자기 틀린 모양이다.
자다가 영문도 모르고 죽는 것은 사양이니까.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일단 전투가 벌어지더라도 침몰이나 나포만 면하면 항구가 코앞이라는 것이다.
막말로 전투중에 메인 마스트가 날아가더라도 어떻게 해서든 항구에 들어갈 수는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 밤을 뜬 눈으로 꼴딱 세우더라도 내일이면 마음 놓고 얼마든지 잘 수 있을 테니 날 새는 것도 부담이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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