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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34화 (34/420)

<34화> 여명의 기습(1)

다행히 평소보다 달빛이 밝아서 주변이 완전히 어둡지는 않다.

그렇다고 바다 속에 숨은 암초가 보일 정도는 아니고, 대충 너울의 크기와 하얗게 부서지는 포말 정도가 보이는 정도다.

그래도 이정도면 전생의 바다보다는 훨씬 양호한 편이다.

전생의 바다는 대부분 해가 지면 눈앞에 손바닥을 갖다 대도 안보일 정도로 어두웠다.

덕분에 견시 쪽 부담도 많이 줄어들었다.

오늘 같은 날 우르타라면 선박 정도 크기는 거의 10km밖에서 찾을 수 있을 거다.

볼라트의 경고는 상당히 심각하게 받아들여졌다.

덕분에 간부급들은 거의 밤을 꼴딱 새게 되었고, 선원들도 3교대로 근무를 서게 되었다.

지금 두 개의 마스트 상단에 있는 견시대에 두 명씩 올라간 것도 모자라서 선수와 선미에 두 명씩, 양쪽 현에 네 명씩, 무려 16명이 견시를 보고 있다.

낮에도 그렇지만, 사방이 어두운 밤에 바다만 노려보고 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졸린 것은 둘째 치고, 지루해서 시간이 더럽게 안간다...

“자네도 꽤나 긴장되는 모양이군?”

혹시라도 조는 녀석이 있을까봐 한 바퀴 둘러보고 잠시 숨을 돌리고 있는데, 뒤쪽에서 인기척과 함께 말이 들려왔다.

“아, 일등 항해사님. 좀 쉬시지 또 나오셨어요?”

일등 항해사 알리샤는 일전의 교섭 건 이후로 상당히 친해진 상태다.

처음 보좌관이라는 요상한 직책을 받았을 때 가장 불편한 눈으로 보던 사람 중에 한 명이 알리샤였으니 정말 장족의 발전인 셈이다.

“으음... 사실 나는 볼라트라는 사람,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괜찮은 사람인 모양이야.”

갑자기 이건 무슨 뻘소리람?

하지만 나는 직장상사를 대하는 기본적인 대처로 예의 바르게 물었다.

“아, 뭔가 의심스러운 부분이라도...?

“아니, 뭐 콕 찝어서 이상하지는 않은데... 그런거 있지 않나? 느낌, 직감 같은거.”

“네에...”

그런거 별로 안믿는다.

“물론 자네 케이스처럼 내 직감이라는거, 나도 크게 신뢰는 안가지만 말이야.”

그런 사람이 말은 왜 꺼내는데?

그것도 굳이 가장 친하게 지내는 내 앞에서 말이지.

하지만 직장 생활을 하다보면 상사의 동료 뒷담화 정도는 술에 물탄 듯, 물에 술탄 듯 넘어가 주는 것도 예의다.

“하하하, 저도 볼라트 항해사는 괜찮은 사람 같습니다.”

“그래, 요즘 꽤 친하게 지내는 것 같더군?”

“선장님이 가르치시는 것을 소화하는데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풋, 선장님의 가르침이라, 힘들겠군?”

“기대에 부응하려면 어쩔 수 없죠 뭐.”

“나도 꽤 기대하고 있다고. 힘내게.”

내 어깨를 두어번 두들긴 알리샤는 곧 몸을 돌려 선실쪽으로 사라졌다.

이제 이놈의 지겨운 밤이 절반쯤 지났으려나?

해가 떨어진 직후에 우리보다 더 긴장한 상태로 접근하던 다섯 척의 상선으로 이루어진 상선대가 서둘러 항구 쪽으로 빠져나간 후, 더 이상 눈에 띄는 선박이 없었다.

우리뿐만 아니라 선단 전체가 근처에 모여서 최고 수준의 경계태세를 유지하는 중이니 잘하면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갈 수 있지 않을까?

해적들은 보통 자기들 피해가 너무 클 것 같으면 지레 포기하기 마련이니 말이다.

솔직히 악명높은 서해 항로라서 긴장을 하는 것이지, 이정도 전력이면 내해에서는 거의 무적이다.

예전에야 십여척, 심하면 수십척으로 이루어진 거대 해적단도 있었다고 하지만 요즘은 내해에서 그 정도 규모의 해적단은 볼 수 없으니 말이다.

오죽하면 고드실카 같은 소형 상선들은 대포도 없이 혼자서 잘만 돌아다니겠나?

그런 소형 상선들을 노리는 해적들도 다 고만고만한 수준으로, 해적선이 고드실카보다 작은 경우도 종종 있었다.

물론 큰 해적선이 없다는 뜻은 아니고 그 정도로 능력 있는(?) 해적들은 굳이 고드실카 같은 작은 상선을 노리지 않는 것이지만 말이다.

* * * * *

그래, 그렇게 쉽게 넘어갈 리가 없지.

불길한 예상은 다 맞아도 낙관적인 예상은 다 틀리는 것이 세상의 법칙인 모양이다.

동이 트기 직전, 가장 어두워서 사위 구분도 잘 안되고 다들 기진맥진해서 경계가 슬슬 무뎌질 때쯤 우르타의 커다란 목소리를 시작으로 우리 선단 전체가 바쁘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별 일 아니었다.

상선으로 보이는 네 척짜리 선단이 후방에서 접근하고 있다는 보고는 약간의 긴장을 불러왔을 뿐, 그리 큰 위협은 아니었다.

중무장한 전투함이 아닌 이상, 네 척으로 여섯 척을 제압하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나 해적처럼 빠르게 치고 빠져야 하는 것이 필수인 직종은 무조건 압도적인 전력 차로 빠르게 전투를 끝내려고 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5분이 채 지나기도 전에 터져나온 우르타의 외침이 문제였다.

“전방, 전방 마다카트 섬 방향! 미확인 선박 접근 중! 다섯, 아니 이, 일곱! 일곱 척입니다! 으악! 선두 선박 선회합니다! 거리 500! 포격 유효거리입니다!”

근거리에 오도록 발견하지 못한 것을 우르타 탓만 할 수 없는 것이, 누구도 항구에서 해적(?)으로 추측되는 배가 나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우르타의 외침을 이해하기 무섭게 우리 선단의 옆을 지나치고 있는 네 척의 상선(?)을 노려보았다.

가장 가까운 메를리오네와의 거리는 대략 300미터.

메를리오네가 이제 닻을 끌어올리는 중이니, 당분간 속도는 0이다.

그러니까 그들이 원한다면, 충돌까지 남은 시간은 3분 미만이다.

테일러부터 모든 항해사와 갑판장이 선실에서 뛰어나왔다.

“갑판장! 당장 출항한다! 최대한 빨리!”

“네! 선장님! 야, 닻 올려! 메인 마스트! 풀 세일이다! 당장! 파손 신경쓰지마!”

“포병대장, 지금 당장 양 현 포 사격 준비!

“이미 준비 시켰습니다.”

“해병대 무장중입니다. 5분 이내에 완료됩니다.”

“보좌관! 선원들 무장시키고 석궁 꺼내!”

“일등 항해사! 바리케이트!”

“항해사들 좌우에 배치했습니다.”

퍼퍼펑!

정신없이 전투를 준비하는데 저 멀리서 포성이 울렸다.

그리고 이내 포탄의 착탄음이 들려왔다.

근처에 포탄이 떨어졌는지 차가운 바닷물이 내 몸을 절반쯤 적셨다.

이를 악 물고 포성이 울린 곳을 보니 이미 두 척이나 현측을 드러낸 채 포연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나머지 다섯 척은 아직도 접근중이다.

나는 정신없는 와중에도 테일러가 있는 선교(船橋)쪽으로 소리를 질렀다.

“피해 없습니다!”

거의 동시에 갑판장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린다.

“닻 올렸습니다!”

어느새 어렴풋이 밝아오는 바다를 배경으로 테일러가 선교에서 뛰어내리며 미즌 마스트로 뛰어가는게 보인다.

“거기 다섯 명! 날 따라와!”

테일러의 외침이 사방에서 터지는 고함소리에 묻혀 사라진다.

난 심호흡을 하며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배 위에서 뒤를 따르는 여섯 명에게 말했다.

“볼트는?! 좋아, 아직 장전 하지마! 첫 포격 후에 장전한다. 자세 낮춰!”

뒤를 따르던 한 명이 볼트가 들어있는 통을 잘 보이게 들어 흔들자, 나는 바로 자세를 낮추라고 명령했다.

대충 우현이 상대쪽에 거의 맞춰졌으니 곧 이쪽도 포격을 할 시간이다.

거짓말처럼 우리가 자세를 낮추기 무섭게 귀를 먹먹하게 하는 포성과 함께 배가 크게 출렁거렸다.

고개를 돌려 다가오는 선박들을 보니 얼마나 급하게 쐈는지 탄착군이 형편없었다.

명중탄은 고사하고 지근탄도 없다.

“장전! 장전! 나머지 어디 갔어?!”

“저기 옵니다!”

나는 허겁지겁 달려오는 선원 여덟명에게 소리를 질렀다.

“왜 이제와!”

“메인 마스트 지원하고 왔습니다!”

“시발! 당장 장전해! 너희는 2조다!”

“1조 사격 준비!”

따로 1조라고 말은 안해줬지만 이미 장전을 끝낸 여섯명이 얼기설기 놓인 엄폐물 뒤에 숨어서 다가오는 선박을 향해 석궁을 내밀었다.

거리는 150? 꼴을 보아하니 2차 포격은 물 건너갔다.

정확하게 우리의 우현을 가리면서 접현하려는 모양인데, 근거리에서 대포를 처맞을 위험을 감수하고 돌격하다니 배짱 하나는 끝내주는 해적놈들이다.

어려운 싸움이 될 것 같아서 각오를 다지는데, 굉음과 함께 다가오던 해적선의 후미에서 엄청난 나무 파편이 튀었다.

그리고 나는 꼴랑 15미터 정도 앞에 떨어진 포탄 덕에 쫄딱 젖었다.

“뭐, 뭐야?!”

“엘리아몬에서 쏜 것 같습니다!”

“이 미친놈들이?!”

대충 보아하니 우리랑 엘리아몬의 거리는 300미터쯤 되 보인다.

그런데 포격을 하다니, 함포의 정확도를 생각하면 우리가 맞아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쏴버린 것이 분명하다.

온갖 쌍욕과 저주를 퍼부으며 쇠뇌를 다시 살펴보는데, 전방을 보던 선원이 비명을 질렀다.

“씨발, 리안! 저 새끼들 선회 안하는데?!”

“뭐?!”

선수를 들이대며 빠르게 접근하는 해적선이 보인다.

이대로 진행하면 충돌이다.

“야, 노텐! 네가 지휘해!”

“어디가려고?!”

“그냥 좀!!”

나는 노텐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포갑판으로 구르듯이 내려갔다.

너무 근접한 적 선박에 포격을 가하다가 잘못하면 이쪽이 더 큰 피해를 입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혹시라도 충각 돌격에 당하면 이놈들을 격퇴하더라도 우리는 항해불능이 되버린다.

항해불능은 곧 이번 프로젝트의 실패를 의미하고, 지금 내가 잡은 출세줄(?)이 똑 끊어진다는 뜻이기도 했다.

계단을 뛰듯이 내려가는데 저 멀리서 엄청난 충돌음이 뒤통수를 때렸다.

이미 한 척이 충돌한 모양이다.

우리도 제대로 저지하지 못하면 같은 꼴을 피하기 힘들겠지.

이 놈들의 전술이 눈에 그려지는 것 같다.

우리의 주 화력은 이클로나, 멜를리오네, 엘리아몬 세 척.

이 세 척을 포격으로 견제하면서 충돌로 기동력과 화력을 빼앗으면, 남은 무장이 빈약한 상선 세 척은 제대로 반항하기도 힘들다.

심지어 상대의 수는 무려 11척이다.

6:11이라니, 제정신이 박힌 인간이라면 절대 싸우고 싶지 않은 전력비가 아닌가...?

아니야!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말자!

어쨌든 저놈들은 해적이다.

포격으로 우리를 완전히 박살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최대한 멀쩡하게 상품과 돈, 가능하면 선박을 강탈하는 것이 목적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지금처럼 장거리에서 포격으로 두들겨 패는 것은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어떻게든 접현해서 백병전으로 몰고 가려고 하겠지.

그리고 해적선의 크기가 우리보다 압도적으로 큰 것도 아니고, 크기에 비해 탑승인원이 많은 갤리선도 아니다.

그러니까 백병전에서 1:1로 붙으면 우리가 밀리지는 않을 거다.

이쪽은 소수지만 정예인 해병대도 있고, 선원 대부분도 군인 출신으로 칼질은 일반적인 선원들보다 훨씬 나으니까.

당장 석궁 쏘는 것만 봐도 훈련받은 티가 확 난다.

물론 두 척이 양현에 달라붙거나 두, 세척을 연속으로 상대하는 것은 무리겠지.

하지만 우리가 단독으로 두 척쯤을 백병전으로 날려버리고, 다른 배들이 조금만 분투해주면 나머지는 지레 겁먹고 도망갈 것이다.

지금 미친 듯이 달려드는 놈을 포격으로 항해불능으로 만들어버리면 더 쉽게 풀릴 수도 있다.

손 쓸 수 없을 때까지는 최악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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