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여명의 기습(3)
쿠다당!
숨이 이어지지 않는다.
윙윙대는 이명은 머리를 부술 듯이 울려대고, 마치 숨 쉬는 방법을 잊어버린 것처럼 정신이 없다.
난 지금 숨을 쉬기는 하는 건가?
혹시 폐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눈에 무엇인가 보이기는 하는데 뇌가 제대로 받아들이지를 못한다.
뇌가 마치 고장 난 컴퓨터, 라디오, TV인 것처럼 모든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아.
내가 누워 있나?
아니, 땅을 짚고 일어서야 하는데 내 손은 어디 있지?
아... 혹시 나 죽은 건가?
“커허허헉!”
와우! 입으로 폐가 튀어 나올 것 같다.
등에서 시작해서 온몸에 번지는 극렬한 통증에 눈물이 찔끔 났지만, 나는 최대한 팔다리를 놀려 일어서려고 노력했다.
...그래, 사실은 그냥 누워서 버둥거렸다.
몇 분이나 그렇게 있었는지 모르겠다.
겨우 정신을 가다듬고 자리에서 일어서니, 처참하게 박살난 우현 난간이 보였다.
그리고 주변에 나와 비슷한 꼬라지로 널부러진 사람들이 보인다.
기절한 것인지 죽은 건지 꼼짝 안하는 자들도 몇 명 보인다.
진짜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온 몸이 아프지만, 다행히 움직이지 않는 곳은 없다.
뭐, 부러지거나 심각한 상처를 입은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래도 전생이었다면 드러누워서 119를 찾았을 정도로 아프다.
하지만 그렇게 누워있다가는 진짜 영원히 드러눕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 문제다.
그렇게 되기 싫으면 전투에 복귀해야겠지...
몇 발자국을 떼기도 전에 진동이 울리며 겨우 잡았던 중심이 무너지면서 다시 바닥을 굴렀다.
다행히 우리 쪽 포격이다.
그보다 고작 이 정도에도 몸을 못 가눌 정도라니, 정말 많이 다친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된다.
그런 말도 있지 않은가?
전투중에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긴장으로 인해 엔돌핀 과다분비로 통증도 느끼지 못하다가 전투가 끝나고 나서야 자신이 중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나는 쓸데없는 상상을 그만두고 이를 악 물고 일어나서 이번에는 시야를 넓혀 바다 위의 다른 배들을 살폈다.
주변이 꽤나 밝아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어둑어둑해서인지, 뭐가 뭔지 제대로 구분이 되지 않는다.
특히나 이번 전투는 이쪽저쪽 할 것 없이 죄다 마스트가 두 개이다 보니, 더 구분이 어려운 부분이 있다.
아, 저기 두 척은 마스트 세 개 짜리군. 해적선이다.
그리고 그쪽을 향해 포격을 하는쪽이니까, 저건... 그래, 포의 수를 보니 엘리아몬이다.
양쪽에 에워싸이지 않으려고 풀 세일(돛을 모두 펼친 상태)로 급기동을 하면서 세 척을 상대로 분전중이다.
자기보다 크거나 비슷한 해적선을 무려 세 척이나 상대하면서 고군분투하는 엘리아몬을 보니 한동안 해적이 아닌지 의심하던 내가 미워질 지경이다.
그런데 의욕만 가지고 싸움에서 이길 수는 없는 법, 저대로 계속 진행하면 결국 엘리아몬은 침몰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비슷한 체급의 선박들이 비슷한 무장으로 싸운다면, 3:1의 전력비를 역전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일이니까.
메를리오네는... 백병전 중이다.
대충 보니 옆구리에 제대로 때려박힌 모양이다.
아마도 첫 번째에 들렸던 충돌음이 저쪽에서 난 소리 같다.
그쪽도 해병대가 있으니 쉽게 제압당하지는 않겠지만, 대충 봐도 반파상태라 전열 복귀는 물건너 갔다고 봐야한다.
완파는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봐야하나...
안타깝지만 저 정도 파손이면 자력항해가 거의 불가능해서 이번 전투에서 우리가 진다면 메를리오네는 백병전의 승패와 상관없이 전멸 확정이다.
그리고 엄청 멀리서 견제하는 해적선이 두 척, 방향을 계속 바꿔가며 전열에서 이탈하려는 우리 상선대가 세 척, 그 뒤를 쫓는 것이 하나, 둘...
“와아아아아아!”
정신없이 사방을 돌아보며 상황을 파악하고 있는데 갑자기 배 위에서 함성이 울렸다.
선원들이 전부 한 쪽 방향을 보며 환호를 하고 있다.
그리고 그쪽 저 멀리에는 불꽃을 피워 올리기 시작하는 해적선 한 척이 있었다.
배라는 게 화재에 워낙 취약하다보니 화재 대비는 철저하다.
게다가 지금의 단순한 쇳덩이 포탄으로는 화재를 내기가 진짜 힘들다.
끽해봐야 배가 흔들리거나 해서 불씨가 옮겨 붙는 정도인데, 그 정도는 별다른 기술이나 인원이 없더라도 손쉽게 제압할 수 있다.
그러니까 멀리서도 보일 정도로 불꽃이 일어났다는 것은, 사실 사람이 수습할 수 있는 수준을 벗어났다는 뜻이다.
포대에 있는 화약에 불이 붙은 것이 아니고서야 저런 불길이 일어날 일이 없으니까.
엄청난 열세로 전투를 시작했는데, 의외로 초반 교전 결과가 좋다.
이미 전투불능이 두 척이니까, 잘만 하면...
전열은 엉망진창이 되었지만 덕분이랄까, 해적들도 약간 중구난방으로 움직이고 있어서 오히려 쉽게 밀리지 않고 있었다.
일단 상선 두 척은 전력으로 회피하며 전장을 이탈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솔직히 좀 얄밉지만, 그 두 척을 뒤쫓는 것이 해적선 세 척이다보니 가진 전투력에 비해 굉장히 분발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기함인 힐레아테는 포는 몇 문 안되지만 포 자체가 장거리 포인지, 엄청 멀리서 돌면서 포격을 가하고 있다.
어... 솔직히 명중률은 형편없고 뒤쫓는 해적선을 피하는데 중점을 두는 것 같다.
우리는 당연히 메를리오네 쪽으로 향하고 있다.
일단 해적선 한 척이 더 접근중이라 제일 위험하기도 하고, 솔직히 다른 배들보다 메를리오네가 우리한테는 더 소중하잖아?
우리가 접근하는 것을 눈치챘는지, 메를리오네에 접근하던 해적선이 방향을 돌린다.
테일러의 지시에 따라 돛의 방향이 바뀌고 타륜이 회전했다.
두 배가 같은 방향으로 진행하며 포탄을 주고받는 정석적인 포격 대치, 우리 쪽이 약간 빠르다.
퍼퍼퍼펑!!
이윽고 포성이 울리고 몇 초 후에 해적선 근처에 다섯 줄기의 물기둥이 치솟았다.
그리고 물기둥이 가라앉기 무섭게 해적선의 선측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며 간발의 차로 포성이 들려왔다.
“모두 엎드려! 충격 대비!”
쿠웅! 쿠구궁! 쿵!
묵직한 해수면과 포탄의 충돌음이 들리고 우리 배 약간 뒤쪽으로 물기둥이 치솟았다.
포의 수는 우리보다 조금 많은 것 같지만, 아주 불리한 정도는 아니다.
그렇게 몇 번의 포격이 있은 후에 우리쪽에서 먼저 명중탄을 냈다.
해적선의 함수와 함미쪽에서 듣기 좋은 충돌음과 함께 나무 파편이 튀어 올랐다.
당황했는지 해적선의 포격 타이밍이 조금 늦었다.
그리고 우리의 다음 포격은 해적선 좌현 하부를 때리며 육안으로도 보일 정도의 커다란 구멍을 만들어 냈다.
흘수선(배가 물에 잠기는 선) 바로 위쪽이라 연신 바닷물이 흘러들어가는 것이 보인다.
당장 침몰할 정도의 피해는 아니지만(포격만으로 범선을 침몰시키는 것은 정말 어렵다) 우리 배가 맞은 곳처럼 마냥 내버려 둬도 되는 곳은 아니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해적선은 바로 뱃머리를 돌렸다.
우리와 점점 가까워지던 방향을 포기하고 멀어지는 쪽을 택한 것이다.
멀어지는 해적선을 추격하는 것이 쉽지도 않지만, 해적을 박멸하는 것은 우리의 목표가 아니니까 우리도 잠시 후에 방향을 돌렸다.
긴장해서 꽉 쥐고 있던 석궁을 바닥에 살짝 내려놓으며 다시 주변을 살펴보았다.
포격을 서너번만 더 주고받았다면 석궁사거리에 도달해서 한바탕 목숨을 걸었어야 했을텐데 다행이다.
우리가 해적선 하나를 쫓아내는 사이에 전장은 상당히 많이 변해 있었다.
걱정했던 메를리오네는 백병전에서 승리한 것인지 충돌한 해적선과 약간 떨어져서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었고, 엘리아몬은 도대체 포격을 얼마나 뒤집어썼는지 성한 곳을 찾기가 힘들 정도로 만신창이였다.
그 와중에 치명적인 피해는 없었는지 움직임은 쌩쌩한 것이 대단하다.
기함 힐레아테를 쫓던 해적선은 이미 꽁무니를 보이면서 전장을 이탈했고, 힐레아테의 포격은 나머지 두 상선을 뒤쫓던 남은 해적선들을 향하고 있었다.
해적선 한 척은 상선에 거의 근접해서 딱 10분, 아니 5분만 더 주어졌어도 백병전을 붙을 거리였는데, 힐레아테에 이어 우리까지 그쪽을 향하자 이내 포기했는지 도주하기 시작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해적도 자기 목숨 귀한 줄은 안다.
딱 봐도 동료 선박들 중 두 척은 완파, 한 척은 백병전에서 패배했고, 다른 한 척은 반파에 후퇴, 한 척도 이탈, 엘리아몬과 싸우는 세 척은 너무 떨어져서 지원 자체가 불가능한 거리다.
그런데 반대로 이쪽의 피해는 메를리오네를 제외하면 전투력이 유지되는 상태니까 사기가 곤두박질치는 것은 당연했다.
이후의 수순은 예상한 대로였다.
남은 6척의 해적선은 앞다투어 뱃머리를 돌려 해역을 이탈하기 시작했고, 우리는 우리대로 피해를 수습하기 위해 메를리오네 근처로 모여들었다.
메를리오네의 상태는 처참했다.
충돌 공격을 당한 오른쪽 현측은 끔찍할 정도로 망가져 있었고, 응급수리를 진행중임에도 불구하고 정상적인 항해는 틀렸다고 봐야 할 정도였다.
불행중 다행이랄까, 메를리오네에 충돌을 감행한 해적의 공격은 충각 공격은 아니었는지 흘수선 아래쪽은 피해가 미미해서 당장 침몰할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인명 피해는 적지 않았다.
해병대원 절반이 전사 또는 중상으로 전력에서 이탈했고, 갑판장과 2등 항해사들이 모조리 목숨을 잃었다.
안타깝기는 하지만 선원들을 지휘해서 전투를 수행하는 갑판장이 전사한 것은 이해가 된다.
내가 목소리 큰 해적을 저격해 버린 것처럼 해적들도 전방에서 선원들을 지휘하는 갑판장을 저격하는 정도의 머리는 쓸 줄 아니까.
그런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전투 시 후방에서 선장을 도와 조함만 해야 하는 항해사들이 모조리 목이 날아가?
심지어 선장인 펠리엔도 부상을 당해서 부선장 오엔이 선박을 지휘하고 있었다.
그리고 선원 피해는... 말할 것도 없이, 대충 봐도 절반이 죽거나 다쳤다.
그나마 멀쩡한 열심히 도망다니던 상선들이 메를리오네와 나포당한(메를리오네와 충돌한) 해적선을 예항하기로 하고, 우리는 천천히 마다카트 섬을 향했다.
해가 완전히 떠올라서 세상의 구석구석을 비추고, 바람도 살랑살랑 부는데다가 바다도 잔잔해서 항해하기는 너무 좋은 환경이다.
그런데 마다카트 섬을 향하는 우리는 한없이 우울하기만 했다.
상품 손실이니 인명 손실은 말할 것도 없고, 당장 다음 항해가 가능할지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선단의 피해는 심각했다.
아무래도 나, 망한 것 같은데?
특히나 메를리오네의 피해는 정말 심각해서 만약 수리가 불가능하거나 너무 오래 걸린다고 하면 선단의 다른 배들은 메를리오네를 선단에서 제하고 출발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 상황이 온다면 테일러는 메를리오네를 포기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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