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마다카트 섬
“우와! 여기 좀 봐 리안!”
“오... 신기하게 생긴 건물이네?”
하아... 한숨이 절로 나온다.
어제 새벽에 겪었던 전투가 거짓말인 것처럼 우르타와 네이선 이 멍청이들은 처음 보는 풍경에 아주 넋이 나갔다.
사실 7개국이니 뭐니 하지만, 내해의 모든 항구들은 풍경이 비슷비슷하다.
이상할 정로도 국가적 특징이 없다고나 할까?
그런데 지형이나 식생(식물의 분포, 종류, 생태)부터 건축 양식까지 기존의 항구들과 완전히 다른 마다카트 섬에 도착하니 신기할 수밖에 없기는 할 것이다.
전생이라는 전혀 다른 세상을 경험한 나도 수년을 비슷한 풍경만 보다가 이국적인 풍경을 보니까 조금 들뜨는 판이니, 오죽할까 싶다가도...
“하하하, 마다카트 섬을 처음 방문다면 다들 똑같습니다. 보좌관님도 신기하지 않으십니까?”
“아, 네... 신기하긴 하네요.”
웬만하면 내가 참아주겠는데, 우리끼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서 창피함을 피할 방법이 없다...
* * * * *
어제 아침, 아니 점심때쯤이 되어서야 만신창이가 된 우리 선단은 마다카트 항에 입항 할 수 있었다.
다들 어디 한군데씩 삐걱거리는 상황이라 암초지대를 통과할 때 꽤나 신경이 곤두서기는 했지만, 별 피해 없이 통과한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입항 후 선장님들은 모두 모여서 조선소로 달려갔다.
제일 심각한 피해를 입은 메를리오네와 만신창이가 된 엘리아몬 뿐만 아니라 모든 선박이 크고 작은 손상을 입은 상태라 조선소와의 교섭이 제일 시급했기 때문이다.
그 사이에 우리는 손상된 상품을 빼고,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배를 정리하고, 사망자와 부상자를 모았다.
여기에서 부상자는 당분간 배를 탈 수 없거나 죽음에 반쯤 발을 걸친 중상자들을 말한다.
막말로 온몸에 타박상과 잔상처가 가득한 나조차도 경상자에 못 들었으니 무슨 말인지 알거다.
대충 정리가 끝난 저녁이 되어서야 선장들이 돌아왔는데, 표정들이 우울한 것이 뭐가 잘 안된 모양이었다.
그리고 테일러는 이클로나와 메를리오네의 모든 간부들을 불러 모았다.
아직도 핏물이 비치는 붕대를 머리에 둘둘 감고, 팔과 가슴에 붕대와 부목까지 한 메를리오네 선장, 펠리엔의 모습이 안쓰럽다.
전투 중에 기절했다가 방금 전에야 겨우 거동 할 정도로 회복된 모양인데, 책임감 때문인지 부축을 받으면서까지 기를 쓰고 회의에 참석한 것이다.
물끄러미 펠리엔을 응시하던 테일러가 조용히 물었다.
“후우... 펠리엔, 좀 괜찮나?”
“네, 선배님. 조금 긁힌 것 뿐입니다.”
긁힌거란다, 남자들의 허세란...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것이 열도 심한 것 같은데 곧 기절해도 전혀 이상할 것 같지 않다.
“그래, 최대한 빨리 끝내지. 일단 다들 알다시피 우리에게는 시간이 별로 없다.“
아, 우리가 무슨 계약을 하고 가는 것이 아니라 시간제한이 없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상품마다 내구성이라는 것이 있어서 운송 기간은 짧으면 짧을수록 좋다.
특히나 바닷바람과 파도는 대부분의 상품에게 치명적이다.
“그래서 메를리오네의 선원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나포한 선박은 해체하기로 했다. 해체한 자재들을 활용하면 메를리오네와 엘리아몬의 수리기간을 줄일 수 있다더군.”
“그렇다고 해도 기간이 짧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만...”
“손상이 적은 배들은 자체 응급수리를 진행하고, 선원들은 수리에 전체 동원. 아쉽겠지만 상륙은 10개조로 나누어 1일씩만 허용한다.”
“그럼 수리가 열흘이면 끝난다는 뜻인가요?”
“선원들의 불만이 대단하겠군요.”
“부족한 선원은 어떻게 합니까?”
여기저기에서 중구난방으로 질문이 쏟아지자 잠시 손을 들어 조용히 시킨 테일러가 나를 보며 말했다.
“리안 보좌관, 자네가 내일 첫 번째 상륙자들과 함께 배에 내려서 섬의 상황을 좀 알아보게.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아. 우리 중에서 정보를 취합, 처리하는 부분은 자네를 따를 사람이 없을 것 같군. 볼라트 항해사에게 이미 도움을 요청했으니, 함께 하게.”
“네, 선장님.”
사실 조금이 아니라 많이 이상하기는 하다.
아무리 섬에 해군 전력이 없다지만, 그래도 한 국가의 주요 영토인 마다카트 섬이다.
그런데 이렇게 코앞에서 대놓고 해적질을 한다고?
심지어 그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나온 방향이 무려 항구 방향이다.
해적들이 대놓고 기항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물론 해적들이 몰래몰래 기항하는 것은 나도 알고, 너도 알고, 모두가 아는 비밀 같은 거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항구에서 나오자마자 대놓고 상선대를 공격하는 것이 정상은 아니지.
내가 낯선 항구에서 도대체 무슨 재주로 정보를 얻어야 하나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테일러의 굵은 목소리가 상념을 깨웠다.
“...마지막으로 선원들의 배치를 다시 해야겠어. 메를리오네쪽 인원이 급감했고 항해사... 들도 공석이 많아졌으니...”
“면목없습니다, 선배님.”
“그만하게, 자네 잘못이 아니니까.”
펠리엔의 고개가 아래로 뚝 떨어진다.
선장이 아무리 몸을 많이 써야하는 일은 아니라지만, 심각한 부상을 안고 수행할 만큼 만만한 일도 아니다.
게다가 지휘부라고 할 수 있는 항해사들 중에 1등 항해사 한 명만 남고 죄다 전사했으니, 면목이 없을만하다.
메를리오네의 선원들에게 대충 들어보니, 백병전이 너무 치열했다고 한다.
충돌의 충격으로 메를리오네의 바리케이트와 방어선은 완전히 무너졌고, 이어지는 해적들의 근접 사격 때문에 건너오는 해적을 제대로 막아서지도 못했다고 한다.
해병대가 버티기는 했지만 머릿수가 워낙 적다보니 사방에서 난타를 당해서 제대로 활약하지 못했고... 결국 방어선을 지휘하던 갑판장이 죽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지휘가 사라지고 사기가 곤두박질치면서 선원들은 일방적으로 도륙당하기 시작하자 별수 없이 선장인 펠리엔이 항해사들과 직접 칼을 들고 전투를 지휘해야 했다.
그런데 알다시피 펠리엔이건 항해사들이건 이 배의 간부들은 죄다 정체를 숨긴(?) 군인이다.
전투가 벌어지자 귀신처럼 날뛰었다고 한다.
상황이 그렇지 않고서는 전멸할 판이었다고 하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으려나...
“일단 펠리엔은 선장에 유임하고, 부선장 오엔이 선장대행을 맡도록 하지. 이클로나의 갑판장 게로아테와 2등 항해사 파비, 란돌프는 메를리오네로 옮긴다.”
“선장님, 그렇게 하시면 이클로나의 지휘부가 너무 비게 됩니다.”
“보좌관 리안에게 임시 갑판장을 겸하게 하고, 2등 항해사는 볼라트가 일을 돕기로 했어.”
순간적으로 좌중에 침묵이 내려앉았다가 봇물 터지듯 여기저기서 반대 의견이 튀어나왔다.
“갑판장이라니요! 다시 생각을...!”
“리안 보좌관은 이제 합류한지 1년도 안됩니다! 신뢰의 문제에서...!”
“고작 20대 애송이에게 갑판장이라니요!”
“선원들이 따르지 않을 겁니다!”
“보좌관은 임시 회계사도 맡고 있습니다! 일이 너무 과중합니다!”
뭐, 나도 이 정도는 예상했다.
애초에 수십 아니, 적어도 십수년은 배를 탄 베테랑 선원이 맡는 것이 갑판장이다.
그런데 경력은 좀 될지 몰라도 이제 고작 24살인 내가 비록 ‘대행’이라도 갑판장을 한다는데 다 좋다고 하는 것이 이상하지.
심지어 우리 배에 갑판장을 수행할만한, 충분한 경력의 선원이 없는 것도 아니다.
나조차도 설득되어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순간, 커다란 목소리가 좌중을 내리 눌렀다.
“그만! 다들 이게 무슨 추태인가! 지금 항명하는 건가?!”
항명이라는 말이 나오자 수많은 말이 쏙 들어갔다.
배에서 선장의 권위는 절대적이다.
특히나 반쯤 군함에 가까운 우리의 특성상, 항명은 즉결처형도 가능한 중죄다.
하여간에 일등 항해사 알리샤의 일갈에 모두가 입을 다물자, 약간 굳은 표정의 테일러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서며 말했다.
“믿을 수 없기는 다른 선원들도 마찬가지. 그리고 선원을 다루는 것은 보좌관이 할 일이다. 자네들이 걱정할 문제가 아니야. 나이가 어리다고? 보좌관이 그동안의 여러 사건과 이번 전투에서 활약하는 것을 봤는데도 그따위 생각을 한다면 그놈 모가지를 내가 직접 돌려서 바다에 던져주겠어.”
“......”
“좋아, 이제 반대하는 놈은 없는 것 같군. 리안 보좌관, 할 수 있겠나?”
믿어주시는 것은 감사한데, 그게 되겠습니까?
막말로 나보다 경력 많고 나이 많은 선원이 전체의 70%는 될거다.
하지만 야망을 가진 남자라면 질러야 하는 순간이 있는 법이지.
그리고 내가 보기에 그 순간이 바로 지금이다.
“감사합니다, 선택에 후회하시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좋군. 이만 마치도록 하지.”
힘들 것 같기는 한데, 여기에서 만약에 ‘전 못해요’라고 하면 나는 그냥 병신이 되는 거다.
그리고 그냥 평범한 선원으로 끝낼 생각이었다면, 애초에 테일러와 함께 하지도 않았다.
* * * * *
뭐, 그렇게 돼서 임시 갑판장이라는 놀라운 타이틀까지 획득했지만, 아직 비공식이고 급한 일도 아니다.
지금 급한 것은 처음 상경한 촌놈들처럼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감탄사를 내뱉는 이 멍청이들을 데리고 정보를 수집하는 일이다.
“병사들이 거의 안보이네요? 거친 놈들이 많아서 병사들이 돌아다닐 만도 한데... 여기 주둔병이 몇 명이라고 하셨죠?”
“제가 알기로 편제상 마다카트 수비대장 휘하에 1,200명의 수비대가 있습니다. 실제로는 행정상 비리와 휴가, 교대 따위 때문에 1,000명쯤 될겁니다.”
내 질문에 볼라트가 막힘 없이 대답했다.
1,000명이면 타국이 쉽게 넘보기 힘든 인원수이기는 했다.
해군이 없더라도 수비대 1,000명을 압도할 만한 육군 전력을 수송하려면 대형 수송선만 최소한 20척, 호위함까지 한다면 거의 40척에 육박하는 대함대가 필요해진다.
수송선의 규모가 큰 이유는 군인은 몸뚱이 말고도 수송해야 할 물건이 많기 때문이다.
무기, 군량, 그 외에 수많은 도구들...
타국들의 본토에서 마다카트까지의 거리를 생각하면 수송선 20척이라고 해도 수송할 수 있는 병력은 고작 1,500명 정도에 불과할거다.
그리고 타국에서 그 정도 대함대가 움직이는데 쿠샤 왕국이 모를 리가 없으니 호위함은 필수, 장기전이 되면 보급선까지 보내야 한다는 걸 생각하면 마다카트 섬은 난공불락의 요새나 다름없다.
“낮인데 말이죠, 병사가 너무 없지 않아요?”
내 말처럼 항구의 번화가에는 병사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거친 선원들이 많은 만큼, 보통 항구에는 수비대 병력이 꽤 많이 순찰하는 편인데 말이다.
게다가 이곳은 그 특성상 해적도 많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순찰을 도는 수비대가 한 명도 눈에 띄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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