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39화 (39/420)

<39화> 일단 살고 보자

“아무래도 잘못 말려든 모양입니다.”

“이대로 끌려가면 끝장일 것 같은데... 무슨 좋은 방법 없을까요?”

“리안, 혹시 선장님이 아시면 도움을...”

“그렇다면 좋겠지만... 크게 기대하지는 말자.”

우르타가 희망회로를 돌리려고 했지만 나는 빨리 그 시도를 막았다.

시대를 막론하고 개인은 집단을 상대로 이기기 어렵고, 아무리 강력한 집단도 국가 조직과는 싸우지 않으려 하는 법이다.

이번 일이 의문투성이기는 하지만 일단 냉정하게 정리해보면 최소한 마다카트 수비대, 최악의 경우 총독부와 얽힌 일이다.

이클로나나 상선단 전체가 얽혀든다면 몰라도, 선장님 입장에서는 고작 선원 몇 명을 구하기 위해서 맞상대하기에는 부담이 너무 컸다.

자리에서 일어나 벽으로 다가가서 귀를 기울이던 네이선이 조용히 물었다.

“밖은 조용해, 잘하면 탈출할 수 있지 않을까?”

신변이 구속된 것은 아니지만, 이미 무장은 다 해제 된 상황이라 빈말로라도 탈출이 쉽다고 하기는 어려웠다.

게다가 탈출한다고 해도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다.

섬이 넓다고는 하지만(섬 안에 산과 계곡이 있다), 우리가 이 섬을 떠날 방법은 이클로나를 찾아가는 것 뿐이니, 우리가 탈출한다고 해도 저들로서는 굳이 우리를 잡으려고 숨바꼭질을 할 필요도 없이 수리 중인 이클로나를 압박하면 끝이었다.

아니, 오히려 더 좋아하면서 배를 압박해서 더 큰 뭔가를 노릴지도 모를 일이지.

탈출 후 숨어서 기다렸다가 다른 배를 탄다는 선택지도 있기는 한데, 그것은 진짜 목숨 빼고 다 버리는 짓이라서 별로 선택하고 싶지 않다.

심지어 지금 섬의 꼴로 봐서는 내가 타려는 다른 배가 해적선일 확률이 절반 정도 될 것 같다.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좋은 방법을 떠올리려고 노력했지만, 시간만 속절없이 흐를 뿐이었다.

결국 우리도 지쳐서 손을 놓아버릴 때 쯤, 문이 열리며 병사 셋이 들어왔다.

“식사요.”

첩자 대우치고는 정말 과하게 친절하시군.

물론 식사라고 해봐야 넓적한 접시에 담긴 스프와 검은 빵 한 조각이었다.

거의 던지듯이 음식을 내려놓은 병사들은 우리를 제대로 보지도 않고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기 무섭게 빠른 움직임으로 문 앞으로 다가간 네이선은 조용히 귀를 기울이더니 힘빠진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문을 잠갔어... 이제 탈출도 힘들겠다.”

우리가 있는 방은 여섯 평 남짓한 작은 방으로, 창문조차 없는 걸로 봐서 애초에 용도가 이런 쪽이었던 것 같다.

아, 이런 쪽이 뭐냐고? 당연히 사람을 가두는 쪽이지.

이런 방은 문을 밖에서 잠그면 사실상 탈출 방법이 없다.

맨몸으로 벽을 부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네이선 이리와, 일단 좀 먹자. 설마 독을 풀... 아니야, 농담이라고!”

어쩌다보니 우리와 함께 일에 휘말린 볼라트는 언제부터인가 무표정한 표정을 유지한 채 아무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아무래도 화가 많이 난 모양이다... 하긴, 나라도 난대 없이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 휘말리면 화가 날 것 같기는 하다.

“케엑! 켁, 켁!”

“아, 뭐야? 더럽게!”

“좀 천천히 먹지... 이 새끼들은 물도 안줬어?”

사례가 들린 듯 켁켁거리던 우르타가 내게 무엇인가 내밀었다.

나는 불쑥 내밀어진 지저분한 손에 기겁하며 물었다.

“뭐야, 더럽게?!”

“이런게 나왔어.”

우르타의 손바닥에는 나무껍질과 재질이 비슷한 새끼손가락 굵기의 짧은 원통형 물체가 있었다.

모두가 예상한 것처럼 그것은 비밀 쪽지였다.

포장재질이 나무는 아닌지 꽤 얇고 탄성이 있었는데, 덕분에 스프가 새어 들어가서 종이에 쓰인 글자가 약간 번져 있었다.

‘식기반납, 탈출, 남동쪽, 붉은꽃, 지하’

글자가 번진 것은 문제가 아닌데, 내용이 문제였다.

종이 자체가 워낙 작으니 쓸 수 있는 내용이 얼마 안되는 것은 이해하지만... 너무 생략을 하셨다.

그렇다고 이해하기 난해한 암호문까지는 아니었지만...

“식기를 내가려고 할 때 탈출해서 남동쪽으로 오라는 뜻이 아닙니까? 붉은꽃과 지하는 남동쪽에 가면 알 수 있을겁니다!”

갑자기 얼굴에 생기가 돌기 시작한 볼라트가 신이 나서 빠르게 말했다.

어, 죽었다고 생각하다가 살아날 희망이 생기니까 흥분한 것은 이해하지만... 앞뒤는 재보고 덤벼야지.

“볼라트 항해사님! 잠시만요...”

“네? 보좌관님! 지금 이럴 시간이 없어요!”

“흥분 좀 가라앉히시구요, 일단 이걸 보낸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거야 쓸 공간이 없는 것 아닙니까! 이대로 총독부로 끌려가면 그냥 죽는 겁니다! 당신들이 뭐라하건 난 탈출할거요!”

어, 뭔가 사람이 되게 극단적이 된 것 같다.

눈에 핏발이 잔뜩 서고 근육이 완전 긴장상태로 돌입한 걸로 볼때... 한 마디만 더 하면 주먹질을 할거다.

그리고 나도 일단 탈출하자는 쪽이라서 말이지.

볼라트 말대로 이대로 무력하게 총독부까지 끌려가면 무력하게 죽거나, 이런저런 이유로 이용당하다가 죽거나, 우리 선단사람들을 낚는 미끼로 죽거나, 결국 죽을게 뻔하거든.

한 가지 걸리는 점은 탈출을 하게 되면 빼도 박도 못하게 진짜 범죄자가 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뭐 범죄자 아니냐?’ 라는 의문이 생길수도 있지만... 정확히 말하면 우리는 첩자 혐의를 받고 있는 것이지 첩자로 판정된 상태는 아니다.

물론 혐의가 부인될 가능성이 0%에 한없이 수렴하는 것 같기는 하지만...

그런데 ‘탈출’을 감행하면 일단 이쪽의 행정명령을 어긴 셈이 된다.

그리고 탈출 과정에 필연적으로 발생할게 뻔한 희생(병사들)에 사망이 포함되면... 아, 생각도 하기 싫다.

그래도 일단 급한 불은 끄고 보자.

볼라트 이 사람이 여기에서 트롤링을 할 줄은 진짜 몰랐다.

역시 사람은 오래 알고 볼일이다.

“네네, 저희도 같은 생각입니다. 일단 모여서 계획을 짜 보죠.”

“으응? 리안, 진ㅉ...읍!”

“응, 그냥 닥치고 말 좀 듣자?”

눈치 없이 반문을 하려는 우르타의 입을 제압하고, 우리는 다시 모여서 탈출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돕는 사람이 누구인지, 건물 배치나 목적지가 정확히 어디인지도 모르는 상황이라 여러 가지 변수를 고려하다보니 계획은 상당히 복잡하고 방대해졌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다.

필요가 없었으니까.

잠시 후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슬쩍 보니 들어온 두 사람 말고도 문 앞에 두 사람이 경계를 서고 있는 것 같았다.

들어온 남자들이 아무 말 없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동안 다시 문은 닫혔고, 심지어 잠그는 것 같았다.

‘이러면 계획이 틀어지는데?’ 라고 생각하는 순간 두 남자가 눈을 마주치더니 한 사람이 갑자기 다른 남자의 뒷목을 내리쳤다.

미리 준비한 듯 눈이 풀리며 쓰러지는 상대를 받아 든 남자는 그대로 그를 조용히 바닥에 눕히며 우리를 향해 낮은 목소리로 빠르게 말했다.

“문 여는 노크는 두 번, 남동쪽까지 가는 길은 최대한 비웠소만, 문 앞의 놈들을 포함해서 몇 놈은 못 치웠소. 지금 나를 기절시키고 나가시면 되오. 무기는 허리...컥!”

남자는 말을 하면서 우리가 치기 좋도록 자세를 살짝 낮추며 뒤를 돌았다.

역시 이럴 때 제일 빠른 것은 네이선이다.

남자가 자세를 제대로 잡기도 전에 네이선의 손날이 남자의 뒷목을 강타하고, 그대로 무너지는 남자를 한손으로 살짝 받았던 네이선은 조용히 기절한 남자를 내려놓았다.

음... 기절한건가?

“야, 죽은거 아니지?”

내 미심쩍은 질문에 피식 웃은 네이선은 우스꽝스러운 동작으로 문을 가리켰다.

우리는 쓰러진 남자들의 허리춤에서 숏 소드 두 자루를 찾아서 네이선과 볼라트에게 들게 하고 문으로 다가갔다.

노크를 두 번 하자 별다른 질문 없이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반쯤 열렸을 때 볼라트가 튀어나가며 왼쪽 병사의 목에 칼을 꽂았고, 한 발 늦게 튀어나간 네이선이 문을 열고 있던 병사의 뒤로 돌아가서 입을 막고 칼로 목을 그었다.

죽이지 않고 제압하는 방법도 있지 않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사실 아무소리도 안내고 사람을 죽이는 것도 난이도가 높은 편인데, 거기에 죽이지 않는다는 조건까지 추가되면 진짜 전문가들이 아닌 이상 불가능한 난이도가 되어버린다.

불쌍하지만 어쩌겠어? 내가 사는 것이 더 중요한 걸.

운 좋게 아무런 소음 없이 방에서 탈출 한 우리는 죽은 병사들의 무장까지 챙겨서 대충 남동쪽으로 추정되는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발소리는 최대한 죽였지만 발각되는 것을 피한다거나 숨어서 움직이는 그런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그런 것은 배운 적도 없고 괜히 어설프게 따라하면 속도만 늦어지는 법이다.

덕분에 모퉁이를 돌면서 마주친 병사 셋을 더 죽이면서 상당한 소음이 발생했지만, 별 상관 없었다.

저 앞에 건물 입구가 보였다.

건물을 나온 뒤로는 난이도가 더 낮아졌다.

일단 태양 덕분에 남동쪽이 어느 쪽인지 알기 쉬웠고, 건물 내부처럼 정해진 길로만 가야하는게 아니라서 몸을 숨기기도 편했다.

건물에서 300m쯤 떨어졌을 때 건물 안에서 고함이 터져 나오며 소란스러워지는 것이 느껴졌지만, 우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렇게 20분가량 이동했을까?

이제 슬슬 추격대에 대한 걱정이 파고들기 시작할 때, 우리가 지나친 나무 뒤에서 소리가 들렸다.

“그만, 이쪽이오!”

화들짝 놀라서 뒤쪽을 보자, 나무 뒤에서 한 병사가 우리를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우리는 잠시 눈빛을 교환한 뒤, 그 병사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여차하면 죽이고 튈 생각이었다.

다행히도 병사는 바닥에 교묘하게 숨겨진 땅굴의 입구를 보여주었고, 우리는 하나씩 그 밑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붉은 꽃은 언제 지나친거야?

지하는 생각보다 잘 꾸며져 있었다.

그렇다고 전생의 벙커같은 전문 시설처럼 쾌적하고 아늑하게 되어있다는 것은 아니고, 사람이 지나가기 충분한 통로와 작은 등으로 시야가 확보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밑에서 우리를 기다리던 병사를 조금 따라가니 약간 넓은 공간에서 우리를 불러낸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다행히 잘 찾아오셨군. 고생하셨소.”

“어...?”

“당신은?!”

“이게 무슨...!”

“당했나...!”

고개를 돌리며 피식 웃는 남자, 그 남자는 우리가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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